오밀조밀 들어 차 있는 비좁고 가파른 긴 골목 도린 곁 어귀.
발갛게 녹슨 함석지붕의 조그만 단칸방에 할머니가 외롭게 살고 계셨습니다.
피붙이라곤 하나도 없는 분입니다.
몹시도 맵찬 추위에 오싹오싹 떨던 지난겨울 어느 날.
한차례 죽을 것 같은 몸살을 앓고 난 할머니는 이마에 패인 굵은 주름살이 더욱 깊어지고 작은 키가 더 작아져 왜소하게 보였습니다.
한낮인데도 비좁은 방안은 을씨년스런 밖의 날씨와 똑같았습니다. 춥다고 외출도 안하고 계시던 할머니 방에선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꽃샘바람의 시샘에 봄빛이 희미하기만 했는데 하나님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동장군은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고 봄은 수줍은 색시처럼 살며시 다가왔습니다. 움츠렸던 새싹이 고개를 삐죽 내밀고 닫힌 꽃봉오리가 활짝 웃으며 새봄을 맞이했습니다.
할머니는 짓무른 눈으로 찬란하게 내리 쬐는 햇살을 바라보며 이젠 기억조차 까마득한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단칸방에서 지낸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오십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 후 떠나온 고향.
더 늙기 전에 할아버지 산소에 꼭 한 번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습니다. 날품팔이를 하여 어금니처럼 아낀 돈과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엄청난 재산이 송두리째 할머니 통장에 저금되어 있습니다. 고생하며 힘들게 사시는 모습을 지켜 본 주위사람들은 물려 줄 자식도 없는 데 뭐 하러 아끼느냐면서 답답한 할머니라고 비웃었습니다.
할머니에겐 남모르는 큰 꿈이 있기 때문에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그들을 웃음으로 넘기며 꿋꿋하게 살아오신 분입니다.
기력이 약해지자 저절로 마음이 조급해진 할머니는 그 꿈을 실현할 때가 지금이라고 절실히 느낍니다.
향기로운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는 어느 일요일 아침.
할머니는 겨우내 묵은 한복과 조끼를 꺼내 입고 나들이 채비를 하셨습니다. 마음은 동심되어 날아갈 것 같은데 다리는 휘청 휘청거렸습니다.
나이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문득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고 가파른 골목을 쉬엄쉬엄 비틀거리며 내려갔습니다. 큰길가까지 나오는데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전봇대에 기대어 택시를 잡으려 애를 썼지만 얄미운 기사들은 못 본척하며 지나가 버렸습니다.
기다리다 지친 할머니는 가빠지는 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습니다. 몸이 무거워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병든 닭처럼 목을 움츠린 채 도와줄 사람을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은 측은하게 생각하면서도 그냥 스쳐 지나가 버렸습니다.
전봇대 옆 길 가장자리에 무덕무덕 곱게 핀 예쁜 팬지꽃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 힘내세요."
해쓱한 얼굴의 흰 팬지가 안타깝게 외쳤습니다.
"그래. 생각해 주어 고맙구나."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주름진 눈가에 눈물이 볼을 타고 목으로 주르륵 흘러 내렸습니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습니다. 으슬으슬 한기가 들어 눈을 뜨고 있을 힘마저 없었습니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자 워낙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경민이는 동생 주원이와 궁리 한 끝에 호들갑을 떨며 엄마를 부릅니다.
"엄마! 엄마!"
"무슨 일이니? 깜짝 놀랬구나."
"백화점에서 사진전과 서화전이 열리고 있다는데 데려가 주세요. 네?"
아이들 마음을 이해하시는 엄마는 흔쾌히 대답을 하십니다.
"좋아. 봄나들이 할 겸 가자구나."
"야! 신난다."
경민이는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신바람 나서 뜀박질까지 하며 소리칩니다. 주원이도 두 팔을 내저으며 환호성을 터뜨렸습니다.
"우리 엄마 최고."
"원 녀석들도 저리 좋을까?"
한바탕 시끌벅적 소란을 피운 후 경쾌한 기분으로 대문을 나섭니다.
햇병아리처럼 노랗게 핀 개나리 담 밑에서 뛰어 놀던 깜순이가 꼬리치며 반겨합니다.
"멍멍. 나도 데리고 가 주세요."
엄마 뒤를 멈칫멈칫 하며 따라 옵니다.
"안돼요. 깜순이는 집을 지켜야지."
쓰다듬어주며 깜순이를 달랩니다.
"멍멍. 집은 걱정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비쓱비쓱 꽁무니를 뺍니다.
엄마는 그런 깜순이가 얼마나 귀엽고 미더운지 모릅니다.
백화점에 도착하여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유심히 작품을 보시던 엄마는 경민, 주원에게 설명을 해 주십니다.
경민, 주원의 관심은 딴 곳에 쏠려 있어 엄마 말씀이 좀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둘은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만 끄덕이며 속닥속닥 귓속말을 주고받았습니다.
손발이 척척 맞는 경민과 주원입니다.
"엄마!"
"응."
작품 감상에 몰두하신 엄마는 건성으로 대답하십니다.
"엄마 ……. 제 말 좀 들어보셔요."
볼멘소리 하는 주원의 입술이 주먹만큼 튀어나왔습니다.
경민, 주원의 마음을 훤히 들여다 보시면서도 모르는 체 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들이 원해서 이곳까지 왔는데 무슨 불만일까?"
타이르듯이 다정하게 눈웃음치며 묻습니다.
어색한 웃음 흘리며 뒷머리 긁적이던 주원은 머쓱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실은 장난감 구경하고 싶은데 엄마한테 혼날까 봐 전시회보고 싶다고 거짓말했어요."
"눈 감고 아웅 하는 식이로구나."
경민과 주원이가 멋쩍어 하며 엄마 양팔에 매달리자 성화에 못이긴 척하며 전시회장을 빠져 나와 쇼핑을 시작했습니다.
장난감 코너 앞에 서자마자 겜보이. 로봇, 새로 나온 게임기와 예쁜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 입고 뽐내는 엘사, 안나, 쥬쥬, 미미, 토토가 친구삼자고 방긋 웃으며 손짓합니다.
경민과 주원이는 어리광부리며 사달라고 엄마께 조릅니다.
엄마는 아주 곤란할 때 짓는 표정으로 두 아이를 쳐다보시며 심각한 목소리로 말씀하십니다.
"이 순간에도 소말리아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며 허덕이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단다. 너희들은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 살면서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어 불평을 하니 한심한 생각이 드는구나."
엄마의 말씀을 듣고 난 경민이와 주원이는 아쉬운 듯 서로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엄마는 꼭 필요한 생필품 이외는 욕심 부리지 않고 절약하는 형이십니다.
가끔 시간 날 때마다 도서관에 들러 신간 잡지와 책을 보신 후 집안에서 쓸모없는 물건들을 신제품과 비교하여 재활용하는 손재주도 갖춘 분입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엄마에게 두 손 번쩍 들었습니다.
경민, 주원이가 엄마의 마음을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빈손으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경민, 주원의 발걸음이 무겁습니다. 서운함을 눈치 채신 엄마는 저녁에 맛있는 카레와 탕수육을 만들어 주신다며 달랬습니다.
입맛 당기는 말씀에 그제야 쀼루퉁한 입이 쏙 들어갔습니다.
참새처럼 재잘거리며 앞서가던 경민, 주원이가 전봇대 밑에 쭈그리고 앉아 신음하고 계시는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깜짝 놀라 토끼 눈을 하고 가까이 다가가 여쭈었습니다.
"할머니! 어디 아프세요?"
"집은 어디세요."
아픔을 참느라 얼굴이 더 쪼글쪼글 해진 할머니는 가물가물한 눈으로 경민, 주원이를 번갈아 바라 보셨습니다.
뒤따라오시던 엄마도 핼쑥하신 할머니를 눈여겨보셨습니다.
"아이고, 할머닐 어쩐 담! 많이 아프신 가 본데……. 연락 취할 전화번호는 있으세요?"
할머니는 힘겹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조심스레 힘없는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어려운 부탁인 줄 알지만 나를 병원에 데려다 주오. 혼자 걸을 수가 없구려. 은혜는 잊지 않으리다."
보살펴 주실 그 누구도 없다는 말씀에 말문이 막힌 엄마는 대답대신 할머니 팔을 붙잡아 간신히 일으켰습니다.
할머니는 몸보다 마음이 더 급하신지 발을 자꾸 허둥거리기만 하였습니다. 경민, 주원이도 어쩔 줄 몰라 하며 뒤따라갔습니다.
병원에 다다르자마자 진찰을 받으셨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심한 폐렴에 영양실조까지 겹쳐 입원해야 된다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부득이 묘한 인연을 맺게 되어버린 가족입니다. 애달픈 눈빛으로 바라보는 할머니를 매정하게 떼어놓고 집에 갈 엄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경민이는 할머니 부탁으로 오불꼬불한 달동네 단칸방에 심부름을 갔습니다. 썰렁한 방안을 한 바퀴 휙 둘러보았습니다. 문풍지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구린내 나는 냄새를 경민이 코끝으로 살짝 스쳐 보냈습니다. 어렵게 사시는 할머니가 측은하게 느껴져 저절로 눈가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입원 하실 때 필요한 이불과 세면도구를 대충 챙겨 들고 숨을 헐떡이며 바삐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사이 엄마는 입원 수속을 끝마치고 입원실에서 할머니를 간호하고 계셨습니다. 집에 가시면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은데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하신 자랑스러운 엄마입니다.
누가 말했던가요.
『어려운 일은 함께 나눌수록 작아지고 즐거운 일은 함께 할수록 커진다』고.
우연한 만남으로 자주 병 문환 가서 할머니의 깊은 마음도 스스럼 없이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다 쓰러져 가는 단칸방에 사시지만 마음은 부자인 할머니라는 것을…….
엄마의 헌신적 사랑과 봉사 덕분에 빠른 차도를 보였습니다.
눈부시도록 목련꽃이 활짝 핀 화창한 날에 퇴원을 하셨습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처럼 봄나들이 다녀오다 만난 할머니와 별수 없이 정든 가족입니다.
능글맞을 정도로 깜찍한 경민이와 정이 뚝뚝 흘러넘칠 정도로 웃음이 많은 주원이는 외로운 할머니를 친할머니 이상으로 정성껏 섬기며 말동무가 되었습니다.
학교 끝나는 대로 틈틈이 달동네에 놀러 갔습니다.
엄마도 색다를 먹거리를 만드실 때마다 할머니 잡수시라고 경민에게 심부름 보내며 안부를 궁금해 하셨습니다.
자주 방안 청소와 빨래도 도와주며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때마다 수없이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전의 건강을 가까스로 되찾으신 할머니는 엄마에게 자신의 포부를 들려주셨습니다.
오갈 데 없는 불쌍한 노인들을 보살펴 주는 무료 복지시설 세우는 게 소원이라고요.
엄마는 할머니의 뜻에 따라 꿈을 펼칠 수 있도록 아버지와 함께 최선을 다하여 협조를 해주셨습니다.
밤과 낮이 바뀌고, 별이 뜨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부모님의 도움으로 순풍에 돛을 달 듯 어려움 없이 무료 양로원이 설립되는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소외 받고 천덕꾸러기처럼 손가락질 받고 지내시던 불쌍한 노인들의 보금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할머니의 소문이 달동네에 퍼지자 그때부터는 답답한 할머니가 아닌 트인 할머니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트인 할머니는 게딱지만한 단칸방에서 키워 나가던 꿈이 이루어지자 의지가 약해지셨는지 노환으로 시름시름 앓아 누우셨습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 주신 트인 할머니의 병은 자꾸 깊어만 갔습니다.
지켜보는 경민 가족은 안타까울 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희뿌윰하게 밝아오는 새벽녘.
할머니는 점점 기운이 빠지고 정신이 몽롱해졌습니다.
정든 고향 친구들과 할아버지가 어서 오라고 반겨합니다.
이름 모를 조그만 새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포르르 날아다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트인 할머니는 얼굴 가득한 주름 골마다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통과 슬픔과 외로움이 없는 할아버지 곁으로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