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4월도 중순인데 여의도 윤중제(輪中堤)의 벚나무는 아직 꽃망울을 터드리지 못하고 있다. 예년 같았으면 지금쯤 하얀 꽃비를 맞기 위해 남산으로 여의도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고사만 연상시키고 있다.
하지만 꽃샘추위 속에서도 개나리 진달래는 때를 어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봄의 여왕 목련꽃도 여기저기서 하얀 꽃술을 벙글리고 있다. 꽃샘추위가 아무리 심술을 부려도 계절이 펼쳐놓을 꽃의 향연은 막지 못하는 것 같다. 우리가 희망의 봄을 기다리는 것도 계절의 운행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에 처음 만난 초로의 여인을 보면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깊은 감회를 느낀 적이 있다. 그녀는 우리나라 남쪽 끝 바닷가 도시에 살면서 이른 새벽부터 야채시장에 나가 야채도매업을 하는 당찬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난 날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나가 안내해 준 일이 있다. 그다음 주에 만났더니 귀한 두릅이며 자연산 표고와 애호박을 안겨주며 고맙다고 답례를 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젊었을 때 학원을 경영했던 지성적인 여성이었는데 경영에 실패하고 생활고 때문에 손쉬운 야채장사를 시작하였단다. 갖은 고난을 겪으며 오랫동안 신용을 쌓아 지금은 자녀도 모두 성가시키고 새벽 도매업에만 열중하고 있단다. 그래서 가끔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면서 문필(文筆) 생활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와 수필을 쓰면서 예술에의 꿈에 취해 있을 때 어느 훌륭한 문인한테서 문인화 한 점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그 그림을 바라보며 그렇게 훌륭한 작품을 그려낸 화가를 만나 직접 그림 지도를 받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혀 몇 달을 보냈단다. 야채장수가 그림공부 한다는 것이 어쩐지 주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것만 같아 용기가 나지 않았으나 잠재되었던 욕망은 끝내 그로 하여금 서울행 버스를 타게 하였다.
서울과 그곳은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렇게 훌륭한 선생님은 수강료도 대단할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움츠러들기만 하였다. 혼자 고민 고민하다가 친한 친구와 맏아들하고 의논하였다. 나이 많은 여인을 제자로 받아줄 것 같지도 않다고 하니 친구와 아들이 용기를 보태주었다. 일단 상경하여 화가 선생님께 간곡히 매달려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이 어림짐작으로 일러준 수강료를 마련하고, 손수 만든 갓김치와 파김치를 챙겨들고 서울행 우등버스를 타게 되었다. 선생님과는 전화로 약속하고 서울에 도착하니, 황송하게도 선생님이 손수 운전하는 차로 마중을 나와 주셨다. 그렇게 마음으로 존경해온 선생님과의 첫 대면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도록 편안하고 소탈하게 대해주셨다. 그간의 모든 걱정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수필가이며 소설가인 사모님도 부군과 합심하여 후진양성에 온 정성을 다 쏟고 있음을 보고 적이 안심되었단다. 흔쾌히 제자로 받아주시는 노부부는 어렵게 수강료문제를 여쭙자 정말로 그동안의 걱정이 무색하게 말씀을 하셨다. 거기다가 점심상 저녁상까지 정성껏 마련해 주시는 데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에 하루는 만사 제치고 서울에 와서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게 되어 행복하다고 하는 그녀를 통해 오히려 나 자신이 뜨거운 감동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만난 날도 아직 서울 지리에 어두운 그녀의 귀로를 돕느라 고속버스터미널까지 동행하였다. 저녁식사까지 들고 가게 하신 선생님 내외분의 정성에 감복하면서 서둘러 작별인사를 올렸다. 저녁 7시 버스에 숨을 헐떡거리며 겨우 시간을 맞추었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선생님 댁에 그녀가 시간 맞추어 버스를 잘 탔다고 알려 드렸다. 그런데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선생님 댁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나는 우리 집 문턱에 발 들여 놓는 한 분 한 분에게 축복의 기도를 매일 드리고 있는데 우리 집에 오신 그 손님께 이 무슨 날 벼락입니까. 아, 글쎄 오 선생님이 카드, 증명서와 함께 돈이 가득 든 지갑을 차표 끊을 때 잃어버렸다지 뭡니까. 그 어렵게 번 돈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그렇게 우등고속버스로 다섯 시간이나 걸리는 머나먼 곳에서 오랜 숙원의 꿈을 펼치게 되어 좋다고 좋아하던 그녀의 꿈이 사그라질까 걱정이 되었다. 이리저리 심란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뒤척일 때 또 사모님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돈 지갑 찾았대요, 표 파는 곳 아가씨가 잘 보관하고 있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요. 답답한 가슴이 쫙 펴지는 듯했다. 나중에 버스회사에서 다음 버스로 곧바로 돈지갑을 보내주어 그날로 찾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 좋은 나라, 선진국이야,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어.’하는 생각이 들었다.
육십 대 후반인 그녀는, 매주 화요일마다 부푼 꿈을 안고 왕복 열 시간이나 걸리는 버스를 타고 서울을 왕래하고 있다. 평생 간직해 온 예술가의 꿈은 나이를 먹지 않고 아직도 싱그럽기만 하다. 이렇듯 온 심혈을 기울여 작품 활동에 임하는 그녀에게 예술을 향한 오롯한 꿈이 활짝 피어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10/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