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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규 시인의 작품읽기

정선규 시인
사색의 향낭
작성자: 정선규 추천: 0건 조회: 10299 등록일: 2013-09-22

사색의 향낭

海月정선규

 

비가 내린다. 참 향기 없는 날이다. 굴뚝의 연기는 모락모락 일고 파도는 너울너울 넘어오고 아지랑이 지렁지렁 산소 그을려 끓어 넘치는데 비는 주룩주룩 밋밋한 밑줄 하나 그 듯 빗살만 세워 뻗어 내려서도 받아줄 토기 하나 없으니 말 그대로 투척한다. 하지만 빗방울이 터지는 그 찰나를 생각하면 아마 왕관을 만들어 흩어지지 않을까. 가늠해볼 따름이다. 특히 이곳 영주는 비가 와야 오는 것이지 온다, 온다, 온 동네방네 소문만 낼 줄 알았지 여간해서 속 시원하게 비 쏟아지는 날이 없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토끼 오줌 싸듯 오늘 오후 찔끔 내일은 비가 올지 말지 봐야 할 미결수 신분이다. 여기저기 쫑알쫑알 콩 볶듯이 날아와 터지고 또 터지면서 하늘과 땅 사이 허공을 따돌리고 문만 죽도록 두드린다.

우중충한 분위기에 저녁 같은 오후로 생각만 쳐진 채 늘어진다. 이런 마음을 공허하다고 하던가? 비하면 허공을 떠돌다가 어느 날 끌러나간 사형수가 말없이 방을 나간 후 그 어떤 소식도 바람도 없는 듯이 착 가라앉은 느낌이다. 우리말에 이런 말이 있다. “ 너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아 봐야 정신 차릴 거야.” 그래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원숭이가 챙긴다고 그 말이 딱 맞다. 온종일 밖에서 기다랗게 떨어지는 매질을 당하고도 또 당한다. “참 쟤가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고 있구나,” 피식 창밖을 보며 웃는다. 아니 말은 사람에게서 나갔건만 왜 나무가 말의 씨가 되는지 세상은 참 아리송이 하다. 그렇게 얼마를 더 맞고 맞았는지 푸른 잎은 떨어져 발아래를 덮고 불어오는 바람에 들려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이산가족이 따로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래도 흘끔 쳐다보면 나무는 매우 태연하게 때릴 테면 얼마든지 때려보라 날 보란 듯이 서 있다.

글쎄 하늘과 땅 사이의 거리에서 달려오는 비의 속도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을 터인데 잎에 묻으면 바람에 툴툴 털어내고 햇살 아래 유난히 푸르게 서 있다. 사람들은 흔하게 말한다. 비가 콩알 볶아대면 이러저리 튀어 뭐 잠깐 유리창에 닿기도 하는 것을 유난스럽게도 그리움이라. 읊어댄다. 빗물의 파편에도 고정된 관념으로 과메기처럼 틀 듯 꽈리를 틀어 그렇지 않아도 보고 싶던 그 사람이었는데 감성을 톡톡 건드려 감질나게 하니 참다못해 다들 그리움이라 핑계하는 것이리라. 요즘 건물은 다 옥상이 있지만, 그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우던 날에는 참 그랬다. 초가집에서 지붕 끄트머리에서 빗물이 똠방, 똠방, 떨어졌다. 그러다가 새마을운동 이후던가. 개량되어 슬레이트 지붕에 기와지붕이 나왔다. 비 오는 날이면 일부러 처마 밑에 서서 잊을 만하면 떨어지고 또 떨어지던 빗방울을 손바닥 내밀어 받아내곤 했었다. 그러다 보면 빗방울의 간격은 얼마나 될까? 혼자만의 사색으로 잠기곤 했었다.

 그 어린 시절 왜 그렇게 집집이 쥐는 많던지 쥐와의 전쟁으로 쥐약 놓는 날이 따로 있을 정도였다. 날은 비가 올 듯 점점 찌푸려오는데 터벅터벅 집으로 가는 길에 몇 번 맛보지도 못한 쥐포 생각이 났다. 나는 늘 궁금했었다. 쥐포는 무엇으로 만드는가? 분명히 쥐포에는 쥐 고기 들어갈 거야. 우기 대며 어머니한테 물어보고 사촌 형들한테 물어보았지만 내가 원하는 속 시원한 대답은 전혀 나오지 않고 귀찮아하면서 모른다고만 했다. 그런데 이날 그 생각이 떠올랐으니 이건 날 잡은 것이려니 동네 형들에 동생들까지 다 불렀다. “형 우리 쥐 구워 먹자. 쥐포 만들어 먹자.” 부추겼다. 그리고 이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정은 되었다. 나는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어머니 몰래 성냥 한 갑을 훔쳐서 가지고 나와 마침 그곳이 부자를 심는 밭인데다 어럽쇼! 이게 웬 떡이냐. 짚단을 쌓아놓았다. 그야말로 다 차려진 밥상이었다. 이미 부자는 다 캐었겠다. 우리는 쥐약 먹고 죽어서 밭에 나뒹굴어 다니는 쥐의 사체를 볏짚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을 댕겨 볏짚에 살짝 올려놓았다. 순간, 순간, 참 볼만했을 것이다. 확 하고 불이 타오르자 온 동네 생난리가 났다. 집 안에서 자고 있던 어머니는 놀라서 부지깽이 들고 쫓아오시고 다들 도망가느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척이나 날 새게 도망가기 바빴다. 그런가 하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지서에 함께 있던 의용 소방대가 타오르는 불길에 하늘 높이 솟구치는 하얀 연기에 놀라서 소방차를 몰고 달려왔다.

거기까지 보았는데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부지깽이를 들고 닭 잡으러 쫓아오셨다. 나는 산으로 튀었다. 뒤에서는 누군가 말을 했다. “선규가 시켰어요.”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 오직 잡히면 안 된다. 어머니한테 잡히면 나는 죽는다는 심정으로 뛰고 또 뛰어 산으로, 산으로 올랐다. 나는 어머니께서 힘들어서 산을 못 탈 것이라는 생각에 산을 도주로로 확보하고 뛰었는데 이런 세상에나 어머니의 힘은 어디에서 그렇게 쌩쌩하게 나오는지 끝까지 따라와서 나를 잡았다. 그리고 집으로 끌려왔다.

어머니는 말이 필요 없었다. 나를 끌고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벌거숭이가 되었다. 홀라당 발라당 다 옷을 벗겨 놓더니 새끼줄로 두 손을 모아 꼭꼭 묶었다. 그리고 집에 내 쫓았다. 참 그 사나이 기분에 아무리 어리지만 그래도 남자의 그 무엇이 있기에 묶인 두 손으로는 달랑달랑한 밑천을 가리고 비는 그래도 다 맞고 친구네 집으로 들어가자니 창피하고 어쩔 도리 없이 친구네 집 처마 밑에서 오돌, 오돌 떨면서 서 있었다. 비 오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언제 비는 그치려나. 상심하고 있는데 구원자가 나타났다.

동네 할머니였다. 지나가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웃으신다. 그리고는 물었다. “너 왜 쫓겨났어?” 나는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했고 할머니는 내 손을 끌다시피 하여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부엌에서 밥 짓고 있던 어머니께서는 이번에는 빗자루를 들고 쫓아왔다. 나는 얼른 할머니 뒤에 착하고 달라붙었고 할머니는 그만하라고 어머니를 나무라셨다.

그리고 나를 자상하시게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손수 옷을 찾아 입혀주셨다. 곧 어머니도 부엌에서 하던 일을 멈추시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어머니께서는 자초지종을 모두 말씀드렸고 할머니는 나를 보시더니 빙그레 웃으셨다. “그러니까. 머슴애지. 그만 하고 이제 밥 먹여.” 하시고는 나가셨고 이제 다 끝난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 이튿날 밖에 나갔더니 애고 어른이고 다 나만 보면 웃는다. 동네방네 소문이 다 난 것이다. 아이들이 놀렸다. “ 얼리리, 꼴리리.” 그래서 그 후 동네아주머니들은 나를 보고 별쭝맞다고 별 중이라고 불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그럴싸한지 모르겠다. 그런 영광이 또다시 어디 있겠나? 싶은 마음이다.

비록 혼이 쏙 빠지게 야단맞았지만 그래도 뭔가 멋을 알기에 대가를 치르는 그 사나이 마음을 누가 알까? 참 우리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나 한 나절을 보내며 그 이야기 하라면 얼른 하겠다. 그래서 어른들 말씀이 사내아이는 사내였다. 아들이라고 딸랑 있는 것이 집에서 나갔다 하면 돌연사고 치는데 선수였으니 참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가지 없는 나무에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는 매우 엄격하고 무섭게 야단쳤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항상 감싸주셨다. “너도 나중에 자식 나서 키워봐라.” 하시던 그 말씀이 생각난다.

특히 할머니는 또 얼마나 큰 집 손자보다 나를 좋아하셨든지 큰 엄마, 큰아버지, 형들 몰래 사탕이며 호박이며 좋다는 것은 다 먹이시며 오냐! 오냐! 칭찬만 해주셨다. 그래서 내가 집안의 불난 거리였다.

그 덕분에 나는 무슨 짓을 해도 할머니만 있으면 무사통과였고 어머니, 아버지, 큰어머니, 큰아버지도 할머니 앞에서는 절대 나에게 야단치지 못했다. 얼마나 기고만장했는지 죄 없는 병아리를 발로 밟아 죽이면서 아니 죽어가는 모습에 생글생글 얼굴을 들이대 웃었다. 그런가 면 내가 큰집으로 들어설 때마다 짖으면 또 짖는다고 가만 놔두지 않고 발로 차고 목걸이를 잡아당겨 개목이 빠질 뻔도 했고 잠자리, 매미, 메뚜기를 잡아 생 고문고한다고 물에 다가놓고 뱅글뱅글 돌렸다가 발로 밟아 죽이면서 고문, 고문, 말끝마다 입에 붙어 있었다. 그러면서 죽어가는 동물들 앞에서 얼마나 희열과 쾌감을 느꼈든지 모른다. 그렇게 잔인했던 내 성품이 돌아선 것은 결국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다 돌아가시고서야 나는 그때 깨달았으며 그때 임용배 목사님을 만남으로써 생전 처음 교회 갈 때만 멋으로 보란 듯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것이 성경책인가 봐. 왜 사람들은 성경책 읽어라 하지도 않고 그 누구도 내 눈 앞에서 성경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항상 나는 말은 안 했지만 왜 성경은 읽지 않나? 몹시 궁금했는데 그때 마전 성심 교회에서 임용배 목사님을 만나서 내 생의 처음 성경책 읽으라는 말과 함께 읽는 것이 성경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성경을 읽던 중 물가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예수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의 모습을 보면서 온유한 성품의 예수님 닮고자 했고 지금의 온순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때에 베드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후에는 알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나를 깨뜨리기 위해 내 모든 것을 그렇게 하나님께서 빼앗아 가셨다는 것을 항상 감사의 영광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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