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밖에서
海月정선규
어느 날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도 귀찮아지고 심지어 보기도 싫고 같이 웃기도조차도 매우 힘들 때가 있다. 이럴 때면 나는 모든 주위 사람들과 대화를 끊고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은 채 사색에 빠진다. 내가 왜 이럴까? 내 마음이 죽 끓듯 하루에도 서너 번씩 변하는 것이 왜 그런 것일까? 고민에 빠진다. 모든 사람들에게서 떨어지는 것은 서로 떨어지는 것은 그럴 때 자꾸 사람과 부딪히면 아음에도 없는 말이 나오고 사소한 것 작은 것 하나에도 예민하여 평소 같으면 그냥 웃고 농담으로 받아 칠 것도 이상하게 가시처럼 찌르거나 마음의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내가 피해 있는 것이 지혜로운 생각이라고 단정 짓고 그 원인을 찾든지 기분을 풀든지 할 때까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일상의 밖에서라고 한다. 내가 물질의 여유가 있어 더불어 마음의 여유까지 얻었다든지 응모한 작품이 뽑혔다든지. 출간한 책이 많이 팔렸다든지 하는 등 좋은 소식만 듣고 접하면서 원하는 대로만 살아간다면 나는 그 얼마든지 마음의 평정 가운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마음에는 절로 여유를 타게 될 것이다.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해. 그러니까. 아주 자상하면서도 너그럽게 모든 사람을 만날 것이다. 좋아도 흥! 싫어도 흥! 그래 옛날에 나도 그랬어. 살다 보면 그 그런 거야. 다 지나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추억이 묻은 미묘한 웃음만 너털너털 나온다고. “내가 자네를 보면 말이야. 나를 똑 닮았어. 내 삶은 그대로 밟는 것 같아.” 마치 무의식 속에서 잠재된 다른 남자가 출연할 것이고 보는 이들 또한 내게 마음이 더 흔들릴 것이다. 지금과는 아주 다른 낯선 사람, 그 남자의 삶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남 보기를 추억의 내 모습에 비유하며 “나를 보는 듯해.” 하면서 등을 토닥이며 흐뭇하게 즐길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날 밤에 잠을 잔다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왠지 몸이 무겁고 머리가 띵하며 이유도 모를 마음만 착잡하다. 옆에서 누가 살짝 살을 스쳐만 가도 “뭐야. 누구야.” 먼저 큰 소리를 낸다. 그러면 상대방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사람이 지나가면서 살짝 스칠 수도 있고 건드릴 수도 있지. 그게 그렇게 무슨 큰 잘못이냐. 다짜고짜 따지고 묻고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아닌 거로 문제는 걷잡을 없이 커지고 만다. 그렇게 하다 보면 상대방에게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음에 상처를 안겨 주는 말을 하고 말게 된다. 누가 싫어서 방을 옮기고 누구 때문에 오늘 아침에 싸웠다. 밥을 먹었느니 못 먹었느니. 참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눈덩이처럼 커져서 나중에는 화해의 기회조차도 잃고 만다. 사람을 알기 때문에 사람을 피해야 할 때는 비켜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그들 가운데에서 살짝 빠져서 그들의 일상을 바라보며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 나뭇잎에 맺힌 빗물이 뜸벙뜸벙 떨어지면 둥글게, 둥글게 나이테의 파문을 물고 물결을 지어 밖으로 나온다. 물이 아름답다, 물에서 물이 합쳐진다. 이것을 나는 생성이라 말한다. 싱그럽다. 물에서 물을 파고 또 파면 바닥이 보이지 싶은 데 반해 둘이 하나로 셋이 하나로 합쳐져서 끊임없이 옹달샘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신선하다, 맑고 깨끗하다. 청량하다. 끝내 그 물빛이 연초록색을 띤다. 뭔가 나올 듯한데 잡히지 않는다. 다시 눈을 뜨고 뭘까? 뭘까? 어느덧 빙그레 미소를 띠고 있다. 마음의 평정이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람이 합칠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일 있을까? 피의 생명이 있다. A형과 A형이 있으며 B형과 B형이 있다. 같은 형질을 가진 사람들끼리 둘이 합치면 된다. 아주 온전하게 생명을 보존하며 지킬 수가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질과 조직으로 생성된다. 마치 삶으로 축적된 기술의 조직 그 표본 같은 기분이다. 이렇게 본다면 너는 나고 나는 너이며 내가 네가 될 수 있고 네가 내가 될 수도 있는 시간의 굴레를 돌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던가? 내가 평생 마음에 품고 다니는 말이 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도 사랑할 줄 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참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뭐 이런 엉터리 말이 다 있어.”
나도 나를 모르는데 어떻게 나를 사랑하며 남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뭔가 이건 거꾸러진 말이 아닌가?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끊임없는 도전에 불이 붙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줄 안다고. 나는 나일 뿐인데. 남은 남일 뿐인 것을. 세상에 사랑하면 남을 목적에 놓고 하는 말이 아니던가? 남녀가 지극히 사랑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봤어도 자신을 지극히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본 일이 없어. 매일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한참 성경책을 보며 교회 다닐 때였는데 늘 내가 알고 싶어 안달이 나는 문제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첫째가 은혜였다. 아무리 성경책을 찾아봐도 은혜라는 단어는 나오는데 정확한 뜻이 없었다. 그런데다가 교회에서 부흥회만 한 번 했다. 하면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느니 안 받았다느니, 모르겠다느니 파벌만 생성되는 듯했다. 거기에다가 부흥강사의 말이 사람들은 사업이 잘되면 그것은 은혜받은 것이고 사업이 잘 안 되면 은혜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강대상을 두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분노를 표출하는 듯했다.
집사, 장로, 교사, 다 잡고 이야기해봐도 정확한 답을 주지 못했다. 다만 은혜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결단을 내렸다. 기도해보자. 기도해봐야겠다. 그러고 나서 내 앞에 성경책을 가지런히 놓고 두 손 모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듯 기도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아버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이때였다. 내 눈은 밝아졌다. 싱싱한 포도 한 송이 깨물어 먹다가 새콤달콤한 단물이 입안으로 화하게 퍼지면서 아! 바로 이것이다. 마태복음 10:8절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나는 또 기도했다. “아버지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으로부터 이 시간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군요.” 지금 내 기억으로는 2002년 월드컵 4강의 열기에 응원하느라. 골이 들어갈 때마다 집이 떠내려가라. 고래고래 온 힘을 다하여 소리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오르거나 힘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정 반대로 성경을 놓고 씨름하고 있었다. 자취방이 좋겠는 것이 특히 혼자 있다는 것이 남의 이목에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기도하고 싶을 때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싶을 때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저녁노을은 빨갛게 물들어 서산에 걸려 있었다. 창문을 잠시 묵상에 들어갔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넌지시 두 눈을 감고 이 말씀을 생각하며 또 생각에 몰두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온 힘을 다하여 오직 정신을 한곳으로 모았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또 그리고 옹달샘에 돌을 던져 파문을 일 듯 침대 아래 무릎을 꿇고 쥐 죽은 듯이 생각에만 잠겨 있었다. 동그라미 하나가 떠오를 때마다 싱그럽고 신선하면서 이제 곧 예정된 해답의 시간으로 흘러가듯 손에 뭔가 잡힐 듯한데 아직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참으로 마음만 더 답답하고 목마른 사슴처럼 물을 찾아 헤매듯 했다. 기분은 날아갈 듯이 기뻤고 참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미쳐서 웃고 또 웃었다. 그런데 이때 또 한 가지 말씀이 내 머릿속에 튀어 올라왔다. 로마서 3:24 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을 통하여 그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되었음이라. “아! 나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창문 밖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니 노을의 절정이었다. 시뻘겋게, 시뻘겋게 구름이 타면서 숯으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 마음도 뜨겁게 달아올라서 내 마음을 어디에 둘지 몰랐고 누가 내 얼굴에 밀가루 반죽을 쑤는지 화끈 달아올랐다. 덕분에 나는 생전에 보지 않는 거울 앞에 섰다. 빨갛게 달아오른 사과 같은 내 얼굴이 다 뜨거웠다. 금방 내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화장하지 않은 탓으로 실핏줄이 다 터질 듯한 후유증은 아닐까? 성령의 임함이라.
그야말로 무지하게 아니 무아지경으로 빠져 들어갈 지경이었다. 그런데 더 이상한 일은 내 모습이 왜 그렇게 사랑스러운지 물고 빨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나 같은 사람이 은혜를 깨달아 알다니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역시 은혜로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나중에는 다른 사람들까지 달리 보였다. “왜 기도 안 하세요. 기도하면 은혜받습니다. 몇 번이고 말하고 싶더니만 나중에는 그들조차도 다 사랑스러웠다. 저들도 기도하면 은혜받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정말 사랑스러웠다. 다 같은 성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다 할 수 있는 사람들. 누가 말했든가. 나를 사랑하면 남도 사랑할 줄 안다고.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 일이며 두고 볼 일이다. 얼마나 나 같은 소중하고 존귀한 사람들인지 어떻게 생각하면 불쌍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나에게서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후부터 내 생각이 달라졌다. 남이 잘되면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다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다 큰일 할 사람들에 풍성한 능력으로 꽉 붙들림 받은 사람들이다.
너와 나는 큰일을 같이할 사람이다. 아니 큰 일꾼이다. 그렇게 다 놀라운 자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으며 나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는 부대끼며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사람 구경을 나갈 때가 있다. 대전에 있을 때에는 구 지하상가에서부터 신 지하상가까지 실컷 구경했다. 한 번은 지하상가를 지나가는데 어떤 사람이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코를 후비며 지나가는데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왜 그게 바로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나도 가끔은 거리를 걸어가면서 남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코를 찌르지 않든가? 또 누군가는 볼일이 급한지 엉거주춤하게 뛰어간다. 내 얼굴에 미소가 흐른다. 왜 그 사람 같은 경우를 나도 당해봤으니까. 자연스럽게 내 모습으로 알고 웃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다들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야말로 황홀경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떻게 싸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다 성품이 있고 생각과 개성으로 뚤뚤 뭉친 사람들인 것을 문제는 이해와 배려하는 가운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그것이 어디 물에서 물로 합치는 것처럼 하나가 된다든가. 과정이 있는 것을.
한 방에서 한이불을 덮고 한 솥의 밥을 먹고 같은 공간을 사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사회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나는 사람을 가장 소중한 자산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그 사람과 떨어져서 많은 생각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지켜보다가 그래 사람이 다 그렇지 뭐. 싸울 때 싸우더라도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가 언제 그랬지. 생각을 돌이켜 일상으로 돌아가서 또 살면서 그렇게 알아가는 되는 것이다.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알아가는 기쁨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풍경 속으로 깃들어가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