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현실 속에서
海月정선규
매우 자상한 더위를 찌는 날씨에 선풍기를 머리맡에 놓고 한참 고요하게 자고 있는데 불현듯 빗발치는 소나기 소리에 마지못해 실눈을 뜨고는 창문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비 온다, 이상하게도 웬 비가 이렇게 많이 오지.” 참 창 박에 죽창이라도 세워놓았으면 진짜 큰 사고가 날뻔했다. 싶을 정도로 장맛비는 쏟아졌다. 어떻게 들으면 토닥토닥 어머니가 내 등을 두들기시면서 잘했다. 칭찬하시며 따뜻한 어머니 손길로 가볍게 두들겨 주시는 것만 같았다.또 속히 잠들었다. 주책없이 잠결 밖에 있다가 이재민이 되면 어떡하나, 떠내려가지나 않을까? 하는 심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잠을 잤다. 아주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잤을 탓일까? 긴 터널을 지나온 듯하여 손목소리를 얼른 내려다보니 이제 겨우 30분이 지난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다시 창문을 바라보며 “정말 비가 많이 온다. 비 내기를 하나?” 그런데 더 이상한 것은 내 주위에 아홉 사람이나 더 있었는데 그중에 누가 한 사람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별일이다. 다른 때 같으면 “야 잠 좀 자자.” 야단을 쳤을 텐데. 언제 이렇게 분위가 바뀌었지. 나는 정신없이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달려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아뿔싸! 그 어디를 봐도 비의 흔적은 반쪽만 한 콩알 딱지만큼도 전혀 없었다. 선풍기만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 이것 봐라. 그럼 선풍기 소리에 비가 온다고 그 난리를 죽인 것인가? 어떻게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를 비 오는 소리라 읽었을까? 참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내 얼굴에 표정이 살짝 돌아가면서 씩 미소가 스쳐 간다. 뭔가 짚 히는 것이 있었다. 대전에 있을 때에도 가물 정도로 비가 그렇게 오지 않더니 영주에 오니까 역시 비가 가물었다. 언론에서는 중부지방에 호우경보니 주의보니 떠들었지만 어쩌다가 소나기만 지나갔을 뿐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시원하게 비가 와주었으면 더위를 깨끗이 날렸으면 하는 마음에 열중하고 집착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내 자작극에 지나지 않았다. 참 내 어릴 적부터 귀신같이 잠귀가 밝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지만 이런 일을 겪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이럴 때 신선한 충격이라 하던가. 또, 한번 씩 웃고는 휴게실로 나가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런두런 살펴보아도 전혀 비는 오지 않았다. 아직도 현실 파악을 못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꿈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일까? 참 말로 우리의 18번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했다. 아무튼, 신선한 충격의 첫 경험이라.
물론 우리 병실 사람들은 가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에 비 온다는 말들을 하곤 했었다. 선풍기가 돌면서 무엇을 툭 하고 건드리고 지나가는지 쌔 애액 바람의 바탕소리 들려주듯 그렇게 돌았다. 처음 남들이 선풍기 돌아가는 바람 소리에 창문을 보며 “비 오는가?” 중얼거리며 창밖을 내다볼 때면 “아니 저 양반이 정말 미쳤나? 여기가 어디야.” 하고는 와장창 유리 깨어지는 웃음소리로 웃었더니 아니 오늘은 내가 양지에서 음지가 된 꼴인 것이다. 어이가 없다 싶은 마음에 참, 참, 참, 혀를 토닥여주었더니 이제는 사탕을 입안에 물고 있기라도 한량 달기까지 하다. 언젠가는 저녁 시간이 다 되어 텔레비전을 병실에서 보다가 눈을 들어 보니 온통 어슴푸레하게 어두운 것이라. 또 발병이 나서 한마디 한다. “형 비 오겠어. 하늘이 잔뜩 찌푸렸네.” 중얼거렸더니 정말 어이가 없었던지 형은 이렇게 말했다. “여기가 어디야. 정신 차려.” 한다. 그래서 밖을 보았더니 서쪽으로 해가 넘어가면서 아주 옅은 까만색을 서산에 걸어놓고 있었다. 그러고서야 상황을 파악하고 늘어지는 소리를 한다. “아~” 감탄도 감명도 아닌 것에 놀라고 있으니 역시 사람은 좌우지간 오래 살고 볼이다 싶은 마음에 푼수처럼 고개를 까딱까딱 목이 다 부러지게 운동을 한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그리움이란 말이 떠오른다.
내가 얼마나 비를 기다렸든지 이건 그리움보다 더 진한 사모의 향수에 젖어 있었던 모양이다. 사랑하면 그리워할 줄 알아가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고착된다고 하더니 이는 나를 두고 말한 것인가 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실현을 하리라. 상상을 초월했겠는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생각과 마음이 다르듯이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놓인 삶을 보듬어보게 된다. 내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내 생각을 누가 알겠는가? 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내 삶의 일부분이다. 하지만 내 육체 안에 있는 영혼은 내 모든 처지에 형편을 작가 삶의 고뇌에 내 갈 길과 해야 할 일을 처지와 형편을 알 것이다. 이 일은 결코 우연히 아니라 비 오기만을 간절히 원하던 내 마음에 생각을 아는 영혼이 예민해진 것은 아닐까? 잠에 취하여 깊은 잠으로 일관하고 있는 육체에서 영혼은 깨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내가 가자고 있을 때 영혼이 육체 밖으로 나와서 내 사정을 알고 물끄러미 바라고보만 있다가 안타깝게 돌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잠에 취해 있는 육체의 잠결 밖으로 웅 웅 이는 나이테의 파문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는 꿈을 막연한듯하면서도 언제나 살아 있는 소리를 준다. 무의식에서 잠재된 힘은 깨어나 밖으로 나오는 듯한 시간의 비상구가 만들어진다. 내 마음의 영토가 떠오른다. 이것은 곧 무의식 속에서 의식으로 돌아오는 잠재력이 아닐까? 그리움의 전쟁이다. 그리우면 기다리다가 사모하게 되고 갈망의 꼬투리는 잡히는 것이다. 세상은 나그네의 학습장이다. 우리의 입으로 사랑합니다, 사랑해요, 하면서도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육체적 쾌락에 방황하며 시간을 보낸다. 자신에게 자신이 속아서 산다. 사랑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요. 법은 익히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여 옮기며 행동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인지 방법을 모른 채 감동적으로만 옮기다 보니 결국에는 진정한 사랑보다는 육체적 쾌락의 자태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또 다르게 말하면 그리움은 꿈과 현실 속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다만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실상이다.
자신의 꿈을 말로 시인하여 믿어 실현하는 것이다. 꿈은 장래의 내게 주어질 것들이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꿈이 이루어질 꿈은 나타나고 증거는 그렇게 나타나서 보이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듣기 싫은 말이 나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은 혼자뿐이어야지. 다 나 같으면 밋밋하게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개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무엇일까? 살아진다는 말이다. 아직은 국어사전과 맞춤법 검사기에서는 어긋나는 단어이다. 하지만 나와는 가장 좋아하고 친밀하게 지낸다. 살아가다, 산다, 살아가야지, 등등 많은 언어의 단어가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자동성은 없다. 부드럽게 알아서 꺾어져서 돌이켜지는 것도 없다.
돌이 히다는 타성에 젖어 있고 돌이킬 줄 모르고 외골수, 외고집의 형상을 입었지만 살아지다는 아니다. 돌이켜지다는 자동성이다. 정말 알아서 뉘우치고 반성하며 대성통곡을 하며 깊이 깨달아 스스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본능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에 그리움의 바탕 위에 자신의 깨달음으로 더해냈다. 부드러우면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변해가는 것이다. 사는 것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지는 것이다. 나는 성경에 나오는 모세를 가장 좋아한다. 왜냐하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하여 불순종하는 죄를 짓는 바람에 여호수아에게 배턴을 넘기고 산꼭대기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기뻐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나는 항상 말한다. 꿈과 현실 속에서 그날의 증거를 얻어라. 내가 원하는 즉 마음으로 바라보는 꿈은 당장은 이루어지지 않은 보이지도 않고 보일 수도 없는 아주 애매하면서도 미련스럽다. 생각할 줄 모르지만, 꿈이 이루어지는 날 그의 증거를 받기 위해서라도 꿈과 현실 속에서 살아가거라. 이것이 종이 한 장이란다. 꿈이 현실이 되는 날이 되기 전 마음껏 내 꿈을 그리워하며 사모하면서 바라보며 기뻐하라. 이것이 삶의 있어야 할 인내하는 덕목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