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금통
내가 어릴 적 방에는 돼지 저금통 있었고
아침마다 콩나물 오백 원어치 사오너라. 엄마가 심부름시키시면
심부름값이라 하여 백 원씩 받는 재미에 빠져 있었던 지라
두말하지 않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시장으로
달려갔었던 추억의 한 페이지가 봄바람에 부딪혀 날아가고
이에 뒤질세라 이웃집에서 오늘의 저금통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다세대 주택인지라
단 하루도 사건이 없는 날이 없고 이야깃거리가 떨어질 건더기 없는
단란하면서 사람 사는 냄새가 구수하게 소용돌이치는 집입니다
모두 8세대가 살고 있는데
그중의 한 사람만이 노총각이고 다른 사람들은 가정을 꾸려 살아갑니다
주인아주머니는 다른 사람 이야기는 별로 흥미롭게 하지 않는데
옥에 티처럼 별난 노총각 이야기를 잘하십니다
착실하게 직장을 잘 다니는 이 사람은 얼마나 돈을 잘 쓰는지
매월 25일 월급을 타면 일주일도 못 가서 동나고
퇴근길에 집에 들어섰다 하면 아주머니 방문을 노크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는
"아주머니 죄송한데요.
만 원만 빌려주세요
다음 달 월급 타면 틀림없이 드릴게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말합니다
주인아주머니는 이런 총각의 모습에 콩깍지 씌웠는지
아들같이 순수하고 맑고 깨끗한 느낌으로 물들어
월급은 벌써 다 어디에 쓰고 혹은 돈 아껴써 군말 없이
모르는 척 그러려니 하고 만 원을 빌려주면
하루나 이틀이 지나서 또 찾아와서 많이 아니고
전과 똑같이 만 원을 빌려 달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달에 몇 차례 이렇게 반복하다 한 달이 차 25일이 되면
약속대로 틀림없이 다 빌린 돈 십만 원에서 심오 만원을
갚습니다
이렇게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는 것이 어느덧 십 년
이제는 주인아주머니나 총각이나 그렇게 습관이 되어
지금까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애들이 저금통에 오늘 돈을 넣었다
내일 과자가 먹고 싶으면 다시 저금통에 돈을 꺼내어
사먹 듯 이 총각은 주인아주머니한테 월급 타면 돈을 갚아주고
다시 돈이 필요하면 빌리면서 생활한다는 모습에서
언제부터인가 저금통이 되어 버린 주인아주머니 인생을
발견하고 누군가를 위해 잠시라도 내 인생을 빌려줄 수 있다면
사람 위에 사람 없는 아리따운 삶은 두고 보기에도 아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