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주머니에서 나왔어
海月 정선규
사람이 살다 보면 가끔은 동네에 나갔다가
커피 한 잔에 아는 처지에 그냥 헤어질 수 없어 날을 잡았는지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인 찰나에
여기저기에서 모처럼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는 말들이 주파수가 되어
날아들고 우리는 누가 먼저 가자고 할 것도 없이 벚꽃이 흐드러진
거리를 누벼 바람 따라 보문산으로 향하는 길 참에 신 중앙지하상가를
지나 대전 중구청 쪽으로 가지런히 흘러간다.
늘 하는 말이지만 나는 늘 걸으면서 해찰하듯 술렁술렁 볼 것 다 보고
생각할 것 다 생각하며 걸어야 직성이 풀리는데다가
더욱 불리한 것은 작달막한 키에 짧은 다리를 가졌으니 키가 크고 보폭이 넓은
형님들을 따르려면 빨리 걷는다고 해봐야 방방 뜨는 총총걸음일 뿐인 것을
내 어찌 성큼성큼 걸어가는 내 다리의 두 배는 되는 걸음을 쉽게 따라가랴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다리가 찢어진다는 옛말만 거듭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언제든지 나는 키 큰 사람들 틈바귀에 단단히 끼어 걷노라면
꼴찌는 내가 맡아놓은 당상이고 그런 와중에 가끔 나를 앞서 가는
형들은 농담인 듯 진담 같은 말로 나를 놀려주노라
앞만 잘 보고 가다가도 불현듯 쫓기듯 뒤를 돌아보며 딴전을 부린다
"선규 어디 갔어."
"어! 이상하다. 조금 전만 해도 뒤에 있었는데
어디 갔지.
화장실 갔나?."
"그런가 봐
부지런히 가다 보면 뒤에 따라오겠지."
다들 언제 그렇게 짜는지 척척 죽이 맞는다
물론 나는 못 들은 척 따라가며 빙긋이 웃고 만다
왜냐하면 내가 이 시점에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나서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런 말이 나온다
"키가 작아서 어디 보여야지.
남들 다 클 때 뭐했어."
뻔한 일에 이제는 언어장애인 아닌 언어장애인이 되어
그렇다고 하지요.
그렇다니까요! 까마득하게 익숙해져
마음에 흐르는 리듬으로 들으며
하회탈처럼 웃고 마는 것이다
옛날 그 시절이 떠오른다.
스산하게 낙엽 지던 가을날
교회에서 전도사님하고 나 그리고 자매하고 세 사람이 오랜만에
교회의 틀을 벗어나 단출하게 소풍이라도 다녀올까 싶은 마음으로
간단히 김밥을 싸서 칠백 의총에서 놀다 올 때 역시 두 사람을 앞세운 채
나는 뒤를 따랐는데 불현듯 앞에 가는 자매가 뒤를 돌아보더니
"어디 갔지." 하는데 전도사님 말씀이 "화장실 갔나?" 했다
처음에는 누구를 찾는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세상에 나를 찾느라고
뒤돌아보았는데 역시나 키가 작아서 안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웃기도 했는데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화가 치밀어오른다
"그래 당하는 것도 어디 한두 번이지
세 번 네 번 다 당할 수는 없지."
아주 단단히 새치름해져서는 틈만 있으면 길을 가다가도
이 길이 지름길이다 싶으면
어떻게든 보는 눈을 피해 빠지거나 아니면 "형님들 먼저 가세요.
저는 잠깐 볼일 좀 보고 바로 뒤따라 갈게요. "해놓고는
소매치기 살짝 그 옆 골목으로 들어가 앞지른다.
그랬더니 이후에 소문이 났다.
"요즘 선규! 몸이 안 좋은 것 아니야.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는 것을 보니 혹시 당뇨
아니 어쩌면 전립선에 이상이 생긴 거야?"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통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아무튼, 어딘가 몸이 고장 난 게 틀림없어."
자기네끼리 온통 추측성 소설에 드라마를 쓰고 시나리오를 써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이 하루를 보내고 만다
같이 길을 가다 말도 없이 갑자기 뒤에서 사라졌으니
그 속을 도통 모르겠다는 둥
홍길동처럼 서에 번쩍 동에 번쩍 걸음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둥
참으로 이상한 성격이라는 둥 참으로 재미 좋은 일상으로 번져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또 유난히 얄궂은 형님이 있었으니
같이 길을 가다가 저 골목이 지름길이다 싶으면 얼른 그곳으로 빠져나가
느닷없이 앞서 가는 내 뒤통수에 대고 황당한 말을 한다
"도대체 어느 주머니에서 나왔어." 하기에 나는 나한테 하는 말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채 뒤돌아보면서 "형님 어서 와요."
신이 나서 떠들어댄다
그러면 형님은 더 큰 소리로 "너 도대체 어느 주머니에서 나왔어.?'
하는데 더 황당한 것은 주머니 속에 도토리라도 넣어둔 양 정말 자신의 잠바 주머니를
뒤 적 뒤적거리면서 "어느 주머니가 구멍 났는지 할망구한테 당장 공사를 하라고 해야겠구먼."
중얼중얼 외다가 허허실실 실타래 풀듯 웃음을 흘린다
산다는 게 뭘까?
이렇게 좋은 인연의 끈으로 타박타박 돌아가는 초침이 되어 세상을 돌고
뚜벅뚜벅 분침으로 살며 걸어가는 텃밭이 아닐는지
울퉁불퉁 서로 인연의 키를 재며 새치름하게 부대끼며 살아가는 재미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