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내 고향 금산군 추부면 마전리에서 마전침례교회를 다닐 때 준 기를 만났다 처음 준 기를 본 것은 아주 어릴 적 제 엄마의 품 안에 안겨 산만한 덩치를 하고 생글생글 웃는 시기였다 녀석이 점점 큰다 싶더니 어느새 벌거숭이 몸으로 틈만 있으면 집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녔다 때로는 차가 지나가고 자전거가 무섭게 달려가도 그저 용감무쌍했다 당시 준 기네! 집은 추부초등학교 옆 있었고 그 길은 언제나 내가 돌아다니는 길이었다 어제는 추부중학교를 오가면서 보거나 우리 집 논으로 심부름 가면서 추부초등학교 담을 지나노라면 준 기를 보곤 했다 그때마다 참 녀석은 몸이 우람했다 이 산을 들어 저 바다에 던지라 해도 던질 것만 같은 느낌의 소유자로서 그야말로 내 눈에는 유별나게 큰 덩치로 산만하게 늠름한 자태를 뽐내는 아주 멋진 장군이었다 잘 웃지만 잘 울지는 않았으며 그리 까다롭게 낯을 가리지도 않았다 툭하면 제 엄마 품에서 이탈을 꿈꾸며 늠름하게 앉았다가 제 엄마가 한눈을 팔면 때는 이때다 싶던지 냅다 대문 밖으로 달려나와 뭐가 그렇게 신 나는지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뛰어다녔다 남들은 남들이고 역시 준 기는 준 기일 뿐이었다 세월은 그렇게 준 기를 안고 무심히 흘러만 갔다. 늘 오가며 얼굴만 봤지 한 번 안아보지도 못한 녀석을 본의 아니게 나는 준 기가 크는 모습을 그렇게 꾸준히 지켜보았다 세월은 나무를 대패로 깎아내는 듯하게 아주 고결한 물결이 보이지 않게 흘렁흘렁 지나갔고 나는 마전침례교회를 다니고 있었으며 준 기네! 집은 추부초등학교 옆에서 마전침례교회 옆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때까지도 준 기는 옷을 입는 날보다 벗은 모습으로 나올 때가 더 많았다 이미 어려서부터 벗고 큰지라 오히려 옷 입는 것이 귀찮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무섭게 몸에 밴 듯했다 하긴 내 동생 해규도 어려서부터 옷을 벗고 컸다 한 번은 초등학교 때 봄 소풍을 태봉산으로 갔는데 이놈이 다른 날을 다 몰라도 소풍 가는 날은 귀신같이 알아놓고 과자 하나 얻어먹자고 나를 기다리곤 했는데 그날은 벌거벗은 채 아주 동구 밖에 나와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서 있는데 왜 또 하필이면 그때 시간이 맞아떨어졌든지 마침 소풍을 마치고 길게 줄을 지어 학교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 반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주책없이 반가워 뛰어오는데 친구들이 "누구 동생이야!" 하는데 눈치 없이 녀석은 호떡집에 불이라도 난 양 옷 한 벌도 제대로 챙겨 입을 틈도 없이 불길을 피해 집 밖으로 뛰쳐나오는 꼴인지라 얼마나 민망하든지 온통 웃음바다가 된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이제 준 기까지 그 짝이 난 것이다 제 엄마 아빠는 맞벌이 부부인지라 아침에 눈만 뜨면 무섭게 직장으로 출근하고 제 누나는 엄마 아빠도 없이 준 기와 아침밥을 먹고 어른스럽게도 조용히 과제물에 준비물 그리고 도시락을 챙겨 학교에 가고 나면 준 기는 늘 혼자였지만 두리뭉실하게 엄마 아빠를 찾지도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집 밖으로 나와 날아다니는 고추잠자리를 쫓아다니며 놀았다 그런 준 기를 볼 때마다 나는 안타깝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여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고생해본 사람만이 고생하는 사람의 심정을 안다고 거창한 동질감을 앞세워 준 기와 놀아주었다 그래 나도 그랬지 아침에 잠에서 깨어 일어나면 어느새 엄마 아버지는 들에 나가고 없으니 온 종일 혼자 집을 보며 마당에 나가 흙장난을 하다 배가 고프면 긴장에 밥 말아 먹다 졸리면 자다 그렇게 측은하게 컸지만 준 기는 달랐다 늘 씩씩했다 구김살이 없이 자랐다 나는 그런 준 기를 언제부터 인가 "장군아! 장군아! " 입버릇처럼 불렀다 애들이 크는 것이야 개똥밭에서 데 구르며 크더라도 절대 어디를 가나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커다란 꿈나무가 되어주길 원했다. 얼핏 남들이 보기에는 장난 같지만, 다른 사람들이 앞에서 준 기를 세워 놓고 나는 말했다 "너는 장군감이야. 장군!" 하고 말이다 어느 날은 아침나절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다가 점심 먹을 때가 다 되어 준 기가 교회에 나타나면 나는 어김없이 물었다 "너 밥 먹었어. " 묻는 내가 바보였다 어린애가 어떻게 밥을 차려 먹는다고 나는 밥을 차려 준 기와 마주 앉아 깻잎 김 김치 어묵 시금치를 밥상 위에 꺼내어 놓고 젓가락으로 이것저것 짚어 보이며 "이거, 이거 줄까? "물어가며 원하는 것으로 수저 위에 올려주곤 했다 밥을 먹고 나면 준 기는 졸리는지 방바닥에 벌렁 누워 자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녀석의 옆에 같이 누워 팔베개를 해주고는 자장가를 속삭이듯 이렇게 이야기해주었다 "너는 이다음에 커서 꼭 장군이 될 거야." 준 기는 한 두 시간을 자고 2~3시면 어김없이 일어났고 준 기의 이마에 매직으로 별 네 개를 커다랗게 그려주거나 반짝이 종이로 네 개의 별을 만들어 오려서는 준 기의 이마에 붙여주고 장군이라 했었는데 오늘 준 기 생각이 난다 왜 그럴까? 대전중앙교회 천태일 목사님 말씀이 오늘 참 인상적이었다 천태일 목사님도 장남으로 컸는데 밥상을 받을 때면 꼭 김이 올라오곤 했었는데 누나들이나 동생들에게는 한 장씩 주면서 할아버지는 천태일 목사님에게만큼은 꼭 두 장씩 올려 주었고 어머니는 한 장씩 더 올려주었다 천태일 목사님은 늘 이유가 궁금했다 왜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나에게만 김 두 장씩 한 장씩 더 올려주실까? 그러던 어느 날 천태일 목사님은 할아버지께 여쭈어보았다 "할아버지 왜 저에게만 꼭 김 두 장씩 주세요."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중에 내가 소천을 하면 (이 세상을 떠나면) 동생을 네가 섬기며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천태일 목사님은 울먹이셨고 나는 가슴이 찡했다 이게 뭘까? 깊은 사색으로 물들어갈 때 또 다른 말씀이 들려왔다 천태일 목사님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가장 좋은 곳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살았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알아주는 서울대학교를 나왔으며 가정에서도 할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장남 대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자랐고 현재 대전에서 알아주는 대전중앙교회 목사가 되었고 심지어 서울대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아주 훌륭하신 교수님 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많이 배웠다고 했다 당시 그 교수님은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제자들 앞에서 아주 열심히 열정을 가지고 가르치셨는데 그런 스승의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이런 질문을 일으켰다 당신은 좋은 곳에서 더 많이 배웠으니 더 많은 곳에서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았다 천태일 목사님은 이때부터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무슨 일을 하며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달았다고 한다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서울대학교를 나오고 또한 그 좋은 곳에서 가장 좋은 스승을 만나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배웠다 해도 좋은 부모 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랐을지라도 남을 섬기지 못하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함부로 생각하며 산다면 누군가 자신을 가리켜 당신은 가장 좋은 곳에서 많은 것으로 배웠으면서 왜 그렇게 형편없이 사느냐는 호통을 칠 것만 같은 마음으로 천태일 목사님 당신은 가장 좋은 곳에서 좋은 스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니 이제 많은 곳으로 가서 좋은 것으로 남을 섬기는 봉사하는 정신으로 살겠다는 것이다 나는 천태일 목사님 말씀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언젠가 나와 준 기가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난다면 가장 좋은 곳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많은 곳에서 서로 협력하여 봉사하며 남을 섬기는 삶의 모퉁이 돌이 되어 만났으면 좋겠다.
Contact Us ☎(H.P)010-5151-1482 | dsb@hanmail.net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73-3, 일이삼타운 2동 2층 252호 (구로소방서 건너편)
⊙우편안내 (주의) ▶책자는 이곳에서 접수가 안됩니다. 발송전 반드시 전화나 메일로 먼저 연락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