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상 서랍을 정리하다 희뿌연 먼지를 책표지에 잔뜩 끼고 있는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이 내 손아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덩그러니 방바닥으로 쏟아졌다 빛바랜 은행나무 잎이 책에서 흘러나와 내 발아래 둥지를 틀어 앉는데 매우 반가웠다 벌써 추억 속으로 빠져버린 은행나무 잎으로 만든 책갈피를 만나다니 내가 초등학교 시절 우리 누나는 네 잎 달린 토끼풀이나 샛노란 은행나무 잎을 주워 책장에 살짝 꽂아 놓곤 했었다 특히 작은 은행나무 잎은 그 끝이 두리뭉실 매끄럽게 깎은 듯한 몇 개의 곡선미가 돋보이는 봉오리는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손등을 잘록하게 튀어나온 관절뼈를 떠올리는 듯한 깊은 인상을 준다 그래서일까? 내 조카들 생각이 난다 큰 누나로부터 난 조카가 둘인데 큰 아이는 명희이고 작은 아이는 지철이 인 데 누나가 친정나들이를 오거나 아니면 내가 어머니 심부름으로 경주로 내려가거나 방학 때 놀러 가는 일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이 녀석들과 함께하면서 장성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생에 이처럼 어린아이가 장성해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느 날인가? 누나가 큰 조카를 재워놓고 화장실을 갔는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다 깊은 잠에 빠진 명희를 보니 머리가 이상했다 내 생에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이 있었으니 이마 위의 머리 한가운데가 매우 물컹거리면서 들숨과 날숨을 쉬듯 들쑥날쑥한 것과 잠을 자면서도 연신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꼼지락 꺼리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빈손에 그 무엇을 잔뜩 쥔 듯 꼭 거머쥐고는 전혀 펼 줄 모르곤 했는데 나는 그것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호기심으로 내 손가락 하나를 귀엽고 작은 조카의 손바닥 위에 살짝 올려놓았다 그러면 조카는 세상에서 무슨 고귀한 보물이라도 잡은 양 잠에서 깰 때까지 절대 손을 펴지 않았으며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럴 때면 내 손가락 끝으로 알 수 없는 옹 앓이를 하면서 짜릿하게 들려오는 뭔가 꽉 찬듯한 느낌에 나는 굳이 손가락을 빼려고 하지 않은 채 녀석이 다만 깊은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 옆에 누워 기다리다 나도 모르게 깊은 잠이 들곤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무튼 내 큰 조카는 그 후 무럭무럭 잘 자랐고 내 작은 조카 지철이가 태어났다 큰 아이 명희는 어려서부터 잘 울지 않고 다소곳하면서도 얌전하게 잘 자랐다 하지만 작은 아이 지철이는 남자아이티를 내느라 그러는지 몰라도 별종 맞게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역시 큰 아이 명희처럼 잘 울지 않아서 돌보기는 좋았으나 때로는 너무 조용해서 뭔가 이상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누나는 녀석을 나한테 맡겨놓고 빨래한다고 밖으로 나갔고 나 혼자 지철이를 보다가 열린 방문 사이로 따사로운 4월의 담장 아래 샛노란 개나리 꽃그늘 아래 땅에 배를 바짝 붙이고 촌곤증이 왔는지 깊은 낮잠을 자는 멍멍이의 모습에 역시 개 팔자가 상팔자구나 싶은 마음에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다 너무 조용한지라 뭔가 이상하다 싶어 옆을 돌아보니 세상에 이럴 수가! 녀석은 언제 볼일을 봤는지 큰 것에 작은 것을 방바닥에 섞어놓은 채 무슨 말이라도 탄 양 그 위에 앉아서 똥, 오줌을 뭉개어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엉덩이를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여 철썩이며 그 작은 손에 크고 작은 배설물을 잔뜩 묻혀서는 물에 밥 말아 먹듯 손으로 퍼 먹고 있었다 순간 나는 웃기기도 하면서 당황하여 매우 급하게 누나를 불렀고 누나는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어와 애 하나도 제대로 못 본다며 얼마나 핀잔을 주던지 말이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으로 피어나는 추억이지만 그때 내 마음은 얼마나 급했었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후 세월이 지나 지철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온통 얼굴에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지철이를 불러서 물었다 "너 얼굴은 왜 그래" 하고 다그쳤더니 이 녀석 말이 가관이다 " 내 옆 짝꿍이 내 연필을 가져가서는 안 주잖아 그래서 친구랑 싸웠어." 나는 더 크게 화를 내면서 물었다 "그래서 친구한테 맞고 온 것이야." 녀석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내는 그 놈한테 한대 맞고 나는 그 놈을 두 대 때렸다" 누가 경상도 사내가 아니랄 까봐서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신감 있게 말했다 그때 당시 그 녀석의 대답에 참으로 듬직했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리 만큼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비교하여 알게 되었다 큰 녀석 명희는 여자아이라서 그런지 학교에서 친구들과 싸우거나 혹은 말다툼을 하거나 서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집으로 와서 다짜고짜 울기 일쑤이면서도 평상사에는 저희 친구 아무개의 이야기에서부터 저희 담임 선생님 이야기애 이르기까지 심지어 저희 친구 오빠에 엄마에 다다르는 이야기까지 다 하면서 수다를 떠는지 그야 말로 지지배배가 따로 없이 예쁘기가 그지 없었다 이제 성인이 되고 어른이 되었으니 이 세상에서 큰 주먹을 펴고 세상을 크게 도우며 당당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세상을 이기고 선한 일군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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