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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규 시인
어르신의 절망
작성자: 정선규 추천: 0건 조회: 10271 등록일: 2011-03-08

어르신의 절망

법 없이도 살아가실 어르신께서 딸네 집에 가시다
길에서 난데없이 볼일 생기는지라
급하게 화장실을 찾았습니다
이리저리 정신없이 둘러보다 보니 작은 공원이 보였고
어르신께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화장실 쪽으로 달려가셨습니다
너무 급하다 보니 앞뒤 잴 시간도 없이 일단 볼일이 생겼으니
얼마든지 입실할 자격이 생겼구나 싶어 보이는 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엄마 뱃속에서 나오던 날부터 쉼 없이 생기는 볼 일을
힘을 주어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여자들의 수다스러운 이야기가 밖에서 들려왔습니다
순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급하다 보니 혹여 여자 화장실을 잘못 들어왔나 싶은 조바심이
일기 시작하면서 마음이 조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긴장했는지 아무리 힘을 주어도 없던 볼일은 결재를
보류하듯 미루어가면서
기름칠 덜 된 기계가 버겁게 헛돌 듯했습니다
어르신은 문을 살짝 열고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두 여자가 들어왔는데 한 여자는 바로 옆 칸으로 입실을 마치고
다른 여자는 손을 씻고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너무 황당한지라
"이럴 때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잘했다고 소문이 나지
그냥 나갈까 아니야 그럴 순 없지 남자 체면에 어떻게
아니야 그냥 미친 척 두 눈 한번 꼭 감고 나가는 거야"
횡설수설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119에 구조 요청을 하는 거야"
어르신은 얼른 손 전화를 걸어 119에 구조 요청을 했습니다
"여보세요 119이지요. 여자 화장실에 사람이 갇혔어요
빨리 와주세요."
잠시 후 어르신은 119도움을 얻어 여자 화장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뭔가를 화장실에 그냥 두고 나온듯한 꺼림칙함에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단 한 번쯤 조금만 살펴보았다면 하는 아쉬움에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권력이 있다는 것을 무엇이 머리이고 꼬리인지
우선순위에 따라 일상의 서열에 따른 일상의 권력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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