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규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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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conclution: “죽음과 부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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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선규 |
추천: 0건
조회: 3334 등록일: 2023-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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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 (conclution: “죽음과 부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1~3) 성경에서 “죽었다”라는 표현과 “무덤에 장사 되었다”라는 두 가지 표현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명사로 표현하면 “죽음과 무덤”이라는 단어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세기 2:17) 결국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고 죽게 되고 말았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세기 3:19) 여기서 죽음이란?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흙으로 만들어진 육체가 죽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무덤에 장사 되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 된다. 구약에서 말할 때 “다시 살아났다”라는 단어가 있다. 다시 살아났다는 말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뜻인데 그렇다고 해서 다시 살아난 자가 영생한다는 뜻은 아니다. 잠시 살아났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를 가진 뜻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구약에는 부활이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부활은 다시 살아난다는 구약 적 의미는 아니다. 반면 부활이라는 단어는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산다는 단어이며 이는 반드시 죽는다는 의미는 없다. 요한복음 5장에서 부활은 2가지로 나타나 있다. 첫째 부활은 영생으로서의 부활이고 둘째 부활은 심판으로서의 부활인데 이는 심판으로의 부활을 “죽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되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1~29) 그렇다면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예수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으므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영생을 얻은 것이다, 생명으로 옮겨질 것이라는 미래 완성형과는 거리가 멀다. 이미 옮겨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완료형이다. 그렇다면 언제 옮겨졌을까? 예정설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그 믿는 자는 이미 선택된 자이고 때가 되어 그 입으로 구주를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은 그 즉시로 이루어지고 그는 영생을 얻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가 예수를 믿고 사는 동안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전의 일이 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은 구원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요한복음 29절을 살펴보기 전에 마가복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앉아 묻자 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가복음 10:17~ 18) 그는 영생을 얻기 선한 행실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에 예수님은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고 대답하셨다.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보면 동문서답을 하신 것이다. 하지만 영생을 위한 유일한 선한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었다. 그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어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영생을 묻는 그에게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구원의 주체가 사람의 행실 즉 행위가 아니라 선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씀하셨다. 자 여기서 다시 요한복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한복음 5:29) 그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믿는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요한복음 6:29) 하시니, 그렇다면 과연 선한 일을 행하는 자는 누구일까? 답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악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나님의 선한 일을 거부하고 반대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에게 박해를 가하고 훼방하는 자들이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 하리라.”(마태복음 12:30~32)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한 일에 대한 증인이다. “또 인자 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요한복음 5:27) 예수님은 반드시 하나님의 선한 일을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영생의 부활로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을 불신하고 훼방하는 자들을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하실 적임자이시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니이다.”(요한복음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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