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여정
2020년 11월 20일 저녁 한 끼 때우겠다고 오후 6시가 넘어서 집을 나섰다. 전주본가 콩나물 해장국에 들렸다.
그리고 이튿날 한밤중 영주시청에서 11월 20일 12시~오후 1시 전주본가 콩나물해장국을 방문한 사람은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라는 문자가 날아왔다.
나는 순간 아찔했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문자를 살펴보니 천만다행이었다. 시간이 비껴갔다. 우리가 전주본가 콩나물해장국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6시를 넘겼다.
그러나 2021년 3월 뜻밖의 비보가 날아들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술을 좋아했다. 술 좋아하는 이유가 어디 따로 있던가? 그렇게 해서라도 삶의 무게를 버티고자 애썼으리라.
그는 2019년 11월 병원에서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했다. 다만 고혈압이 있을 뿐이었고 따라서 그 어디에도 죽을 이유는 없었다. 먹고 싶은 것이나, 사 먹고 유유히 노년을 즐기면 되는 것이었다.
그는 2019년 11월에서 2020년 4월까지 무려 5개월 동안 방콕을 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밥도 먹지 않고 병원에도 가지 않고 씻지도 않고 삶의 의지가 꺾였다. 전화해도 받지 않았다.
도통 연락도 없고 연락이 되지 않았다. 급기야 집으로 찾아가서 동네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고 문을 두드리고 발로 걷어차도 인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적막함이 감돌았을 뿐이었다.
그는 2020년 4월에 이르러서야 겨우 꾸부정한 모습을 보였다. 여기저기에서 그가 힘이 없어서 걷지 못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아무튼, 그는 정신을 차리고 아주 깔끔하고 점잖은 신사로 돌아와 있었다. 그때까지만 그 누구도 그를 나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술만 안 마셨으면 하는 주변의 평가가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2020년 추석을 전후로 그는 다시 입에 술을 대었다. 다시 연락은 끊어졌다. 전화해도 받지 않았으며 집으로 찾아가도 문을 꼭꼭 걸어 잠가서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다.
결국, 2021년 2월의 어느 날 복지센터 직원들과 함께 그를 설득해서 병원으로 옮겼다. 그러나 입원한 지 채 한 달을 넘기지 못한 채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21년 4월 2일 난데없이 소변에서 피가 나왔다. 나는 또 다시 한번 아찔했다. 새벽에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결석, 또는 신장염, 방광염, 전립선염, 췌장염을 비롯한 췌장암, 방광암, 신장암, 전립선암 등이 거론되고 있었다.
나는 뜬눈으로 하얀 밤을 지새워야만 했고 이튿날 병원을 찾았다. 나는 주치의 선생님께 왼쪽 아랫배가 당기고 걸으면 아프다고 했다. 주치의 선생님은 결석일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말씀하셨고 경우에, 따라서는 CT 검사의 가능성까지도 내비쳤다. 검사결과 특이사항은 없었다. 다만 “아직은 이것 가지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물을 많이 마시라고 했다.
나는 그때부터 물을 많이 마셨고 맥주를 물처럼 들이켰다. 하지만 2개월이 지나도록 결석은
커녕 그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2개월을 지나고 있었다. 왠지 초조했다. 6월 초 병원에 들렀다.
결석은 언제 나오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 결석이라고 말했느냐며 결석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오리무중이었다. 마음은 초조하고 답답했다. 아니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렇다면 내가 본 피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주치의 선생님은 그것은 피가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과 전자현미경으로 보는 것은 다르다면서 적혈구 3개가 나왔는데 이게 어떻게 피냐고 반박했다.
나는 동네 의원을 찾았다. 그리고 그동안의 모든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원장님은 충분한 팁이 됐다면서 소변검사를 말씀하셨다.
前 원장님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혈이 나온 지, 2개월이 지났고 지속해서 혈이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결석이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서 할퀴고 나오면서 피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결석은 빠지더라도 그 현상은 계속해서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다.
또 혈이 끊어지지 않고 지속해서 나왔다면 암을 의심해보아야겠지만 현재 혈이 끊어졌다는 점에서 암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그렇게 소용돌이는 지나가는 듯했지만 이어 양쪽 겨드랑이에서 시작된 알 수 없는 통증이 갈비뼈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정형외과를 찾았지만, 속 시원한 말 한마디 듣지 못했다. 다만 뼈에는 이상이 없으니 근육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근육을 이완제 일주일 분을 처방받아 나왔다.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증상은 점점 심해져서 잠을 자다가 통증으로 새벽잠에서 깨어나기까지 했다.
다시 동네 의원(내과)으로 돌아왔다. 원장님께 정형외과에 갔더니 뼈에는 이상이 없다고 하더라고 말씀드렸다. 원장님은 잠시 무언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셨다. 그리고 지금 먹고 있는 약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지혈증약과 당뇨약이 있다고 대답했다. 원장님은 말로는 알 수 없으니 약 봉투를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다 해보았는데도 안된다면 한가지 접근법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마침 약 봉투에 여봐란듯이 당뇨병성 신경염, 약 처방되어 있었다. 이에 원장님은 앞으로 말초신경 이상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면서 약을 처방해주셨다.
문득 지난 작년 5월에 불쑥 찾아온 어깨 근육 긴장으로 인한 통증이 생각났다. 자꾸 아프기만 하고 낫는 게 없으니 보통 일이 아니라는 생각에 미쳤다. 거기에다 오래전부터 내 몸에서 떠나지 않는 그 이유도 모르고 평생 간다는 과민성대장증후군과 허리디스크 협착은 국· 공 합작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또 풍치로 인한 치통과 약한 잇몸으로 인한 불편한 틀니 이 때문에 이빨 혹은 잇몸이 아파서 일주일에 2~3번은 치과에 다녔고 신경치료와 발치를 반복하고 틀니 수리를 밥 먹듯 하는 나의 현실 앞에 이게 뭘까? 싶었다.
특히 어깨통증은 지글지글 끓어올랐고 점점 내 목을 조이고 머리를 아프게 했다. 이제는 새로운 병증이 나를 괴롭히고 있다. 급기야 알 수 없는 통증은 왼쪽 아랫배를 지나서 고환이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이는 샤워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온 신경은 곤두세웠다.
결국, 나는 모든 활동을 포기하고 치료에 힘쓰기로 했다. 다시 동네 의원을 찾았다. 뜻밖에 다른 원장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다시 당뇨 검사를 했다. 원장님은 이것저것 처방된 약과 검사결과를 비롯해 나의 상태를 아주 촘촘하게 살펴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진행이 빠르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당뇨보다 치료 과정이 앞서간다는 것이었다.
아직 이 약을 쓰지 않아도 되는데 너무 빨리 처방했다는 것이다. 결국, 합병증은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렇게 가슴의 통증은 오롯이 문제로 떠올랐다. 나는 원장님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있는데 이와 연관이 있을까요?”
원장님은 복부 초음파 검사와 대장내시경 검사의 필요성을 말씀하셨고 이에 나는 의뢰서를 받아 영주 적십자병원으로 향했다.
복부 엑스레이 검사결과 변비로 가스가 차 있었다. 나는 과민성대장증후군과 연관이 있는지를 물었고 가장 그럴 가능성이, 많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2주 약을 먹었고 상태는 많이 호전되었으며 2주 더 복용하고 있다.
또한, 그동안 한 달 넘게 컴퓨터 앞을 떠나 쉬면서 꾸준히 치료를 받았더니 어깨의 통증도 많이 호전되었다. 오늘도 병원으로 향한다. 그동안 거의 2년 정형외과에 발을 끊고 오직 침으로 관리해온 허리 디스크 상태는 어떻게 되었을까?
X레이, CT 검사결과 양호했다. 심한 것은 아니었다. 전에, 비해서 더 좋아진 것도, 나빠진 것도, 없었으며 현재 더 나빠진 것도 아니었다. 한결, 같았다.
이렇게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다가 알았다. 이게 나의 감사의 계보라는 것을. 앞으로 나의 삶에서 감사할 수 없는 것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이 더 유력해지는 듯 눈 앞에 선하게 찍힌다.
지금은 모르지만 이후에는 알리라 (요13: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