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조카딸
2015년 지루했던 한 해도 뉘엿뉘엿 저물어가던 어느 날, 아주 특별한 손님이 블로그를 다녀갔다. “외삼촌 보고 싶었다. 응답해라.” 순간 나는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외삼촌 보고 싶었다.”에서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었다. 20년을 훌쩍 넘어서 지금 외삼촌은 사십 대 중반이 되어 있었고 조카딸은 삼십 대 중반이 되어 있었다.
나는 20대에 경주 누나 집에서 직장생활을 했었다. 조카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는 경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지금 길을 가다 마주친다 해도 전혀 몰라보겠다. 이제 30대의 어엿한 아가씨가 되어 직장생활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으리라.
“외삼촌도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그런데 외삼촌은 전보다 살 많이 붙었네. 나는 외삼촌이 이렇게 살진 모습은 처음 봤어. 나하고 외삼촌은 많이 닮았어. 교회 다니는 것도 그렇고 나는 작가를 꿈꾸고 외삼촌은 작가로 살고.”
정말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조카는 학교에 갔다만 오면 내 옆에서 종달새처럼 쉬지 않고 지저귀었다. 친구들 이야기, 선생님 등하굣길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불현듯 작가가 되겠다는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 땅에서 작가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할 수만 있다면 그 마음을 돌이키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작가가 될 수 있는지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블로그에 들어온 것이었다.
조카는 오래전에 결핵을 앓았다고 했다. 결핵이 폐와 기관지, 목, 림프샘까지 전이돼서 결국 림프샘 제거 수술을 했고 전염 균이 떨어지지 않아서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여 지속적으로 약을 먹었는데 약의 부작용이 있어 간 수치가 두 번이나 오백까지 뛰어 올라가서 약을 바꾸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다행히 그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겨우 몸은 다 나았지만, 불행하게도 스물여덟 살 되던 해 교통사고를 당해 목 디스크, 어깨충돌 증후군, 척추 족만 증을 앓고 있다고도 했다. 또 결핵약 부작용의 후유증으로 인한 말초 신경염으로 양쪽 발 감각이 떨어지고 늘 저리다고 한다.
하지만 천만 다행한 것은 죽지 않을 만큼의 한정 되어 있는 정도라서 그나마 직장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단다. 다행히 고생에도 그 질량이 있어 그 부피만큼 다루어지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