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 표 김치
새벽 5시 하늘은 가슴을 활짝 켜고 파란 대문을 열었다. 주인집 아저씨는 자전거를 타고 밭으로 나가셨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막을 내릴 때쯤이면 아저씨는 자전거 뒷자리에 오롯이 상추를 태우고 돌아오셨다.
붉은 노을은 구름 속에 타오르는 환각처럼 끼었고 아저씨는 파릇파릇 날개가 싱싱하게 돋아 날아갈 것 같은 상추를 과묵하게 내려 놓으셨다. 아주머니는 파릇하게 톡톡 튀는 상추를 가지런히 다듬었다.
저녁 햇살이 들어오는 한적하고 아늑한 방에서 책 읽고 있으면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가 빗발쳤다. “아저씨여! 아저씨여!” 한 사람을 경이롭게 표현하듯 혹은 선포 하듯 사람의 마음에 호소를 해오는 듯 아주 특별한 느낌이었다.
“밥은 해서 먹어요? 이거 우리 밭에서 직접 재배하는 건데 갖다 먹어요.” 나는 몸을 꺾어 돌려 토라지듯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게 중에 가장 크고 넉넉한 보통보다 비길 수 없이 더하고 심한 성질과 마음씨를 지닌 그릇을 가지고 나왔다.
마당에 솥뚜껑을 엎어 놓은 것 같은 두껍게 쌓인 상추를 보니 좀 우습지만 말 그대로 새로운 감회가 밀려왔다. 양푼에 밥 한 주걱 퍼 담아 그 위에 살짝 상추를 덮어 참 기름 한 방울 뚝하고 떨어뜨려 시뻘건 고추장을 듬뿍 넣고 오른 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고 우유자적 밥 한 그릇은 금방 뚝딱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은 긍정을 추론했다.
비로소 욕구는 충족 되었고 그 지극한 기쁨에 취해서 몸과 마음이 녹아 내렸다. 오늘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이튿날 온종일 다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직 무던히도 상추만 추구했다. 누군가 말하고 있었다. “형 목구멍에서 풀냄새 나요” 그래도 좋았다.
남자 혼자 살다보면 끼니마다 무엇을 해 먹을까 혹은 내일은 무엇을 먹어야 하나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봄이면 예외였다. 상추 한 가지만 있어도 싸먹고 비벼 먹고 겉절이 해서 먹으며 이리저리 미꾸라지 새끼처럼 잘도 빠져 다니며 즐겼다. 누군가 자신은 한 번 입에 술을 대면 끝장을 봐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한 번 입에 상추만 댔다하면 뿌리를 뽑았다. 상추가 물린다 싶으면 열무로 살짝 간을 바꾸어 맞추었다.
세상의 그 어떤 여자도 절대 모르는 이 특별한 순간을 언제부터인가 나는 가슴 속 깊이 묻어 놓고 살아 왔기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이치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허둥대며 먹었다. 배는 차지게 불렀다. 아니 좀 엄밀히 말한다면 배가 부른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뿌듯한 것인지 알 수 없이 좋았다.
그렇게 나날이 상추는 발이 달려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배추나 사다가 김치나 담아볼까 싶어 집을 나서는데 뒤에서 주인집 아주머니가 붙잡았다. “김치 있어요?” 귀가 솔깃했다. “없어요.” 아마 그때 내 표정은 딱 시침 떼기였을 것이다. “묵은 지 좋아해요?” “그럼요” “우리 집에 작년 11월 달에 담은 김치가 있는데 못 먹는 것 준다고 욕할까봐.” 나는 문득 김치찌개 생각이 났다. 묵은 지보다 더 좋은 것은 찌갯거리는 없었다. “그래요” “언제부터 반찬을 챙겨주고 싶어도 뭘 잘 먹고 뭘 안 먹는지 잘 몰라서 상추만 줬네요.” “그래서 잘 먹었습니다.” “돼지고기 사다가 넣고 김치찌개 끓여 먹으면 맛있어요. 다 먹고 떨어지면 또 얘기해요” 아주머니는 과감하게 김치냉장고를 개방했다. 가슴이 풀리듯 냉기는 포도나무 넝쿨처럼 밖으로 뻗어 나왔다. 냉기의 기류 속에 하얗게 파묻힌 싱싱한 김치를 꺼내어 손으로 쭉 찢으면 그대로 되니라 하는 맛깔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