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찾아서
어느 날 가명(假名)은 주민등록등본을 손에 들고 나타났다. 매우 상기된 표정에 흥분이 고조된 목소리였다. “엄마를 찾았어.” 하고 외쳤다. 엄마는 아주 오래전 아빠와 이혼하고 집을 떠난 후 소식이 끊어졌다며 울상 짓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주민등록등본을 빼앗았다. 매우 선명한 글씨로 또렷하게 가명 엄마가 있었다. 마침 볼 일이 있어 한 번은 대전에 다녀와야 하겠기에 가명과 동행했다.
“형! 이렇게 아무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가도 될까? 새 아빠도 있을 텐데. 엄마가 만나 줄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잘하는 것일까?” 만약 만약에, 가명의 말대로 엄마가 만나주지 않고 문전박대한다면 그 상처는 고스란히 가명의 몫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냥 포기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내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득 현대칼라에서 만난 아저씨 말씀이 떠올랐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정말 힘들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복잡하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지 말고 단 한 가지만 생각해요. 그리고 앞만 보고 가면 돼요” 어느새 열차는 대전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쌍둥이 빌딩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옷깃을 파고드는 칼바람에 부대껴 부랴부랴 눈에 들어오는 대로 여관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데 여관방에는 따뜻한 온기 하나 없는 냉골에 침대 위의 전기장판이 전부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먹어야 살고 살아야 엄마를 찾을 수 있기에 김치찌개 2인분을 시켰다.
금방이라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은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갈까? 우리는 바싹 쪼그리고 날아갈 듯이 바들바들 날갯짓 하며 밥 한술 제대로 뜨지 못했다. 하필 이때 누군가 나타나서 그렇게 사느냐고 나무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명은 긴장이 되는지 밥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밤새도록 오직 술만을 응대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정말 이러다가 사람 하나 잡겠다 싶었다. 이튿날 아침 어차피 온수도 나오지 않는 여관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겨우 찬물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3000냥 해장국 집을 찾았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주민 센터에 들러 다시 한 번 주소를 확인했다. 직원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길을 나섰다. 매서운 한파를 뚫고 가슴으로 들이치는 칼바람에 온몸을 부대꼈지만 우리는 무던히 걸었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우리 앞에 걸어가는 초등학교 3, 4학년쯤 되는 여자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혹시나 저 아이들 틈 속에 가명의 동생도 끼어 있지 않을까. 나는 아이들을 불러 세웠다. “얘들아! 너희들 H 동 D 호 아니?” 아이들은 낯선 우리를 보고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황급히 달아났다. 한 아이가 어느 집 앞에 멈추어 서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게 우연일까? 필연일까? 바로 우리가 찾는 집이었다. 나는 힘껏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안에서 여자가 물었다. “주민 센터에서 나왔습니다.” “무슨 일이시지요” 여자가 불쑥 밖으로 나왔다. 순간 가명은 절규를 쏟아냈다. “엄마! 나 가명이 엄마 아들 가명이”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면 서도 아들을 힘껏 안았다.
“내 아들 가명이?” 가명은 집요하게 엄마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응 엄마 나야!” 모자는 부둥켜 안고 한동안 떨어질 줄 모르고 마냥 소리 내 울었다. 안에서 낯선 남자가 나왔다. “가명이? 당신 아들 가명이 여기를 어떻게 알고 와?” 가명은 이 남자가 새 아빠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안녕하세요.” 난생처음 새 아빠를 만나는 순간이었다. 엄마는 자리를 비켜주듯 옷 입고 나오겠다며 집으로 들어갔고 그 남자는 우리를 놀이터로 데리고 나왔다. “아버지는 잘 계시고”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예” 가명은 남자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도 잘 계시고?”
“예” “누나는 뭐 하고 서로 연락은 하고 살아?” “예 수원에서 가게 해요” “무슨 가게?” “술집 해요” 두 사람은 핑퐁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마 가명은 바로 이 시간이야말로 정말 어쩔 수 없는 하루가 십 년 같은 것이었으리라. 남자는 퉁명스럽게 다그치듯 물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어” 가명은 솔직히 말했다. “등본 떼어보고 알았어요.” 남자는 당황하는 듯 보였다. “제가 다리가 통풍이 심해서 제대로 걸을 수 없어 일을 못해요. 그래서 국민기초생활 보장수급자라도 만들어서 살아보려고 주민 센터에 갔는데 엄마, 아빠 금융거래정보공개동의서에 도장이 필요하다고 해서 왔어요.” 남자는 가명을 나무랬다. “그건 것 만들면 못써.” 녹록하지 않을 듯했다.
이때 엄마가 왔다. “밥 안 먹었지 어디 가서 점심이나 먹자” 엄마는 쫓기다시피 아니 아들을 데리고 쫓겨나다시피 식당으로 내달렸다. 이야기를 들으니 지금 사는 아파트는 아버지한테 받은 위자료이며 그 남자는 빈 몸으로 들어와서 딸 하나를 낳았단다. 그 후 엄마는 가족을 위해 분식점을 했지만, 요즘 손님이 없어 접어야 한다고 했다. 도와주겠다며 앞으로는 다시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어느 날 가명은 술로 인한 간 경화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