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는 영원한 것일까”
오낙율
우주는 영원한 것일까?
아니면 ,무서운 폭약이나 불붙은 유황처럼 현란한 빛을 발하며, 끝내는 연소되어 사라질, 그래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극의 상태로 되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과연 지구는, 인간의 끝없는 연민과 보호를 받아야만 비로써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일까.
우주와 그 굴레속의 지구와 나 또한 자연의 일부이고, 그렇게 보면 ,인간이 자연을 회손 한다는 것이 자연이 자연을 범한다는 말이 되는데, 어느 여름날 커다란 태풍이 인간 사회를 덮쳐 엄청난 재앙이 일어났다고 치면, 그것은 분명 자연이 자연을 향해서 커다란 범죄를 저지른 샘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재앙을 부른 것은 우리 인간이고 가해를 한 태풍은 아무 죄도 없는 그냥 자연현상 이라고 할까?
이런 철없는 의문을 같다보면, 과거에는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다가 지금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 하여가고 있다 는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태풍쯤은 간다하게 막아내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는 장담을 할 수 없을 만큼 과학문명이 끝도 없이 발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것이 음 양의 도전(倒顚)이다, 거대한 자연의 윤회인 것이다.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다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다가를 반복하는, 그런 대 자연의 큰 흐름 앞에 우리는 영문도 모르고 조바심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어머님의 양수를 마시는 태아에 비교해보면 어떨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머님의 태반 속이라고 가정한다면 어찌 한 방울의 물과 공기라도 가벼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자연이 상처받을까 노심초사 하는 마음을 내가 내 부모님을 걱정하는 마음이라 가정한다면...
먼 훗날 어느 종말의 날이 있다면, 지구라던가, 우주라던가, 아니면 자연이 먼저 종말을 맞을까? 그 때문에, 자연의 일부에 불과한 인간이 그들 자연과 동반하여 종말을 맞이할까? 아니면 이 지구상에, 인간 먼저 사라지고, 우주와 자연의 치료자 역할을 해야 할 인간이 사라진 탓에, 우주와 자연 스스로가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또 아님, 인간은 사라져도 자연만은 살아남을까? 아니면 자연은 망가져서 제 구실을 하지 못하여도, 환경 적응력이 높은 우리 인간만은 그 모습들을 약간씩 바꾸어서 여전히 살아남을까? 또 자연은 그 변해가는 그 자체의 모습만으로도 계속해서 자연으로의 호칭을 받으며 존재해 갈까? 스스로가 자연의 일부임을 애써 외면한 체, 자연을 바라보는 일부 인간들의 머릿속에 그려진 자연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질서 있게 진행 되어가는 자연의 순리를 거부하며, 왜? 왜를 외치며, 끝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어느 골빈 철학자의 푸념에도 귀가 솔깃해지고, 대 자연의 운행 원리에는 아예 관심도 끈은 체, 본인이 대 자연의 일부이라는 사실도 잊은 체, 잡다한 장송곡 같은 이론에 매달려서 인생을 허비하는 우리 인간들의 머릿속엔 과연 자연이라는 단어가 얼마만큼의 비중으로 자리 잡고 있을까?
인간은 끝없이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사라져 가는 자연이다. 다시 말하면 ,이성간의 교접을 통해서 무극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순환인 것이다. 좀 외람된 쪽으로 화재를 끌고 가자면, 흙이 기형적으로 모양을 생성한 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또 다른 흙들이 음양 기운을 갖추고 현상적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동물이나 식물 등인 것이다.
인간사나 자연사나 언재나 말썽을 일으키는 것이 물과 불, 그 중에서도,봄볕에 적당히 달궈진 물인 모양이다. 그리고 흙은 언재나, 물과 불을 만나야만 제 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세상 모든 생명체의 태생비밀은 흙의 외도에 있는 것이다. 흙이 물과 불을 만나서 그 변화한 모습이 생명체인 것이다. 그 생명체에서 불기운이 떠나면 나무 막대 등의 고형물이 되는 것이다. 또한 흙과 물과 불의 배합 비율에 따라서 식물이 될 수도 있고, 동물이 될 수도 있고, 뜨거운 피와 의식을 가진 인간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해서 그 물과 불의 양과 질적인 농도에 따라, 만상의 서열이 정해지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우리 인간은 가장 짙은 농도의 물과 불을 지닌 흙의 조형물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을 지배하고 도시를 만들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다른 수화의 기운을 받은 , 즉,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언어? 그것은 그들 에게도 있다. 동 식물 들에게도 각기의 의사소통 주파수가 있다는 뜻이다. 말은 소리에 해당하고 소리는 그 특유의 주파수를 띄게 되고 그 특유의 주파수를 가진 소리를 우리는 언어라고 부르고 있다. 해서 언어는 여타 동물들과 인간의 경계를 구분하는 항목에 들지 못 한다. 흙 쌓기다!. 인간과 동물을 경계 지어 구분 할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흙 쌓기에 있다.
어느 들길을 걷다가, 요란하게 흙을 쌓아 만든 개미집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많은 일개미들이 쌓아 만든 개미집들은 마음먹기에 따라 발 하나로 뭉개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인간이 쌓은 흙은 누가 지울 수 있을까. 아파트니 63빌딩이니 하는 바로 그런 것들이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인간의 흙 쌓기 능력인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며 빌딩이니 하는 것들의 군림인 도시는, 평평한 대지위에 무리지어 쌓아놓은 개미들의 집들과 무엇이 다른가. 시멘트와 화려한 돌들, 그것들은 흙의 굳어진 모습들일 것이고, 빌딩들의 높이를 지탱해주는 철 구조물들은 흙의 요소에 해당하는 철의 집합체가 아니던가! 탁월하다! 부리로 흙을 물어다 추녀 끝에다 집을 짓는 제비들이나 개미들에 비하면 흙 쌓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래서 인간이 아닐까? 어느 명인의 영예처럼 흙 쌓기의 명수에게 붙여진 영광의 호칭이 인간이라는 단어가 아닐까?
흙은 흙을 감추기 위한 도구일 뿐, 흙을 위장하는 데는 흙이 최고의 도구가 될 뿐, 세상은 흙의 윤회이다. 우주라 해도 좋고 자연이라 해도 좋고, 어찌 되었던, 흙이 여러 가지 형태로 변화하는 현장이 세상이다. 水火의 도움을 받아 흙이 천지에 조화를 부리고 있다. 그런 천지의 공간에 난, 또 하나의 작은 조형물로 빚어져 다듬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 존재의 가치가 다할 때 죽음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쳐, 원래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엔 흙과 물과 불의 삼위일체가 허물어져, 수화는 하늘로 떠나 허공에 대기하고 나는 흙으로 남아 또 다른 창조를 준비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나만한 예술품으로 이 지상에 남아있고, 후일 내게서 수화가 떠나는 날, 나는 또 다른 예술작품을 준비하며 수화의 응기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마른 흙이 묽을 부르고 차가운 흙이 불을 부른다. 그게 음양의 순환 원리이다. 왜 나는 못 사는가? 왜 나는 건강하지 않은가? 당신은 아직 덜 마른 흙이고, 당신은 아직 덜 차가운 흙이 아니겠는가? 극 즉 필 반(極 卽 必 反)이라는 말이 있듯, 많이 괴로워하고 많이 가난 하고 많이 불상하고 많이 슬퍼해야 순환의 때에 이를 것이 아닌가?
인간은 죽음을 위해서 어차피 먹어야 한다. 어차피 태어났으니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을 위하여 일정 양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다. 요즘세상 얼마나 죽기에 좋은 세상인가. 예전엔 먹 거리가 곤궁해서 죽기조차 쉽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 요행히 쉽게 죽음에 이를 수 있었다면, 아마 굵은 모래알처럼 거친 흙이 되어서, 지상에 머물고 말았을 것이다. 머물고 마는 거친 흙, 작은 먼지처럼 바람에 흩날리다가, 물을 만나 기뻐하고 그러다가 또 불을 만나서 희망이 생기는 그런 부드러운 흙이 되지 못한, 즉 윤회하지 못하는 흙들을 일러 우리는 지옥의 지 귀라 하지 않을까? 음양의 구원을 얻지 못한 흙, 물과 불을 만나지 못한 흙, 그런 흙들이 세상에 넘쳐, 죽음을 유혹 하는데, 잘 먹어야 잘 산다, 잘 살아야 잘 죽는다, 잘 죽어야 또 잘 태어난다는 그런 순환의 원리를, 지상의 여린 식물들, 특히 가을에 씨앗을 떨 구고 봄에 그 씨앗으로부터 새로이 환생하는 일년생 야초들로부터 새삼 발견하며 나 스스로를 충실한 씨앗으로 가꾸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曉 泉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