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환경의 영향을 받고 부모와 이웃의 교육을 받는다. 살아가면서 학교에서는 선생님을 만나고 사회에서는 우연히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인생을 살찌워 간다. 스승의 지혜로운 말씀이 희망과 꿈을 심어준다. 행복하고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만난 좋은 인연이 내 모자란 부분을 지혜로 성숙시켜 준다.
후반기 인생의 보람은 많은 훌륭한 스승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여기 아홉 분은 가슴 속에 환한 빛으로 갈 길을 잘 인도해 주었다. 행복한 꿈을 품고 살 수 있게 해준 등불이다. 마음의 등불이 된 그중의 한 분은 어윤배 박사이다.
1987년 내 나이 마흔네 살 때 남편의 권유에 의해서 숭실대학교 중소기업대학원에 부부가 등록하고 6개월간 최고경영자과정을 공부하면서 당시 대학원장이던 어윤배 박사를 처음 만났다. 그분은 어찌나 참배같이 친절하셨던지 일일이 악수를 하면서 따뜻하게 맞아주던 분이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바쁜 시간을 쪼개어 학교를 찾아오는 원생들에게 등교시간이 되면 미리 대기하고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남편 이외에 외간 남자와 악수를 하기 시작한 것이 아마도 이때가 처음인 듯하다. 이때는 회사경영의 이론을 공부하는 재미도 컸지만 소극적이며 사교성이 전연 없던 나를 활동적으로 변모시켜 주었다. 개인적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그분과 그때 그 악수의 손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분은 숭실대학교에 중소기업대학원 과정을 세계 최초로 설립하여 우리나라 중소기업을 부흥시키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분이다. 우리나라 웬만한 중소기업 대표들과 역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은 모두 숭실대학교에서 중소기업대학원을 거친 분들일 정도로 중소기업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 분이다. 숭실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것을 끝으로 이미 2002년 10월28일 너무 일찍 고인이 되셨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도 그분의 향기를 잊을 수가 없다.
두 번째 등불은 선비 중의 선비로 서강대학교의 부총장을 역임하고 사이버대학교 총장으로 계신 이우용 박사이다. 언제나 이우용 박사의 신선하고 아름다운 언어는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다. 이분과 처음 만난 것은 1991년 남편이 공부하고 있던 서강대학교 부부특강에서였다. 신선하면서도 위트 넘치는 말씀은 내 가슴에 큰 진동을 일게 하였다. 나 자신도 공부할 결심을 하게 하였다.
그 후 은사로 모시며 공부하고 다년간 여러 동문과 오페라며 뮤지컬이며 여행을 함께하며 주옥같은 말씀을 많이 듣고 배우는 행복을 누렸다. 삼베 같던 나의 생활이 결 고운 비단 같은 문화생활도 즐길 줄 알고 자신에 대한 자존감도 인식하게 되었다. 그 후 더욱 알차게 배우려고 노력하게 되었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지금도 연말연시가 되면 제자들에게 아름다운 글로 안부를 묻는 분이다.
세 번째 등불은 ‘한국언어문화원’ 원장 김양호 박사이다. 1994년부터 남편 대신 작은 주간 신문사를 경영하는데 남의 앞에 서면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여 찾아가서 스피치 교육을 받았다. 김양호 박사는 불모지였던 언어학, 화법론의 선구자였다. 특히 언어표현력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고 화술과 인간관계, 매너와 화법 등 스피치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교육에 헌신한 분이다. 한국언어문화원스피치 교정교육은 자신 있게 대화 하는 힘을 길러 주었다.
네 번째 등불은 진천 도솔암의 대안스님이다. 스님과 대화를 하면 번뇌는 사라지고 영혼이 청정해지는 듯하다. 십여 년 전에 그분의 스승 회정스님과의 인연으로 만난 분이다. 세상사 괴로운 일이 있어 자문하면 전화 한 통화로 엉킨 실타래 같은 마음은 금방 풀리고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제고 찾아가면 편하게 쉴 곳이 있고 반가이 맞아줄 분이 있다는 것은 여간한 행복이 아니다. 하안거와 동안거는 물론 많은 시간을 일심으로 선(禪)에 정진하여 높은 경지에 이른 분이다. '부처와의 대화'를 비롯한 여러 편의 명상 시, 선시(禪 詩)를 음반으로 내어 대중에게 보시하는 선승(禪僧)은 내 마음의 큰 별이다.
다섯 번째 등불은 글 쓰는 즐거움을 갖게 해 주신 스승님, 김병권 수필가이다. 현재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으로 팔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젊은이 못지않게 각종 행사와 세미나에 참석, 축사를 해주는 노후가 아름다운 영국신사 같은 분이다. 신세대 못지않게 이메일로 작품을 꼼꼼하게 지도해주시는 애정이 깊은 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선생님께서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활동하실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아름답게 함께 늙어가며 내조해주시는 사모님 덕분이다. 젊은 세대에게 본보기가 되는 이상적인 노부부의 생활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여섯 번째 등불 정공채 선생님은 일 년 전에 이미 고인이 되셨다.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시인’이라 격찬을 하신 스승, 혜산 박두진 시맥(詩脈)을 이은 분이다. 올곧은 시인의 자부심으로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의 명강의로 제자들의 존경을 받던 분이다. 정공채 선생님은 시선(詩仙)의 경지에서 시작(詩作)을 지도해 주셨다. 그분은 귀족 같은 카리스마를 지니고도 호탕한 성품이었다. 강화 해변과 송산에서 안동소주와 밴댕이회를 즐기며 제자들과 자연을 노래하기를 좋아하셨다. 이십여 년 간 자료를 모으고도 아리랑 작품 발현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75세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야외수업을 가자.” 와병(臥病) 직전에 하시던 말씀의 회한(悔恨),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던 스승님의 호안(虎眼)이 몹시 그립다.
일곱 번째 등불은 임보 강홍기 시인이다. ‘프랑스의 상징주의 천재시인 랭보를 너무 좋아하여 림보(林步)가 되었다.’ 늦깎이로 정공채 스승님의 강의를 듣던 첫해에 임보 강홍기 시인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이런 연유로 임보 시인의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을 자주 찾게 되었다. 임보 시인의 시 화살이 내 가슴에 깊이 꽂혔다. 인터넷 카페지기로서 문학의 길로 이끌어 주시는 친절과 정성은 가히 감동적이다. 전통적인 선비기질을 갖춘 현대의 진정한 시인, 내 마음속에 영롱한 시별(詩星)로 모시게 되었다.
여덟 번째 등불은 한국낭송문예협회 회장 장충열 시 낭송가이다. 우리나라 문단의 큰 행사에서는 어김없이 사회를 보는 분이다. 어느 행사에서 시낭송을 하는 장충열 시낭송가에게 매료되어 나보다는 한참이나 연소하지만 스승으로 모시기로 마음먹었다. 정확한 발음법과 부단한 노력을 요구하는 선생님과 동참하는 시간은 새로운 인생의 즐거움이었다. 그야말로 신의 목소리를 타고난 그분의 시낭송을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시간이다. 그래서 한국낭송문에협회 행사 때마다 글과 사진으로 스케치하여 홍보해주는 것이 새로운 기쁨이다.
아홉 번째 등불은 문인화의 대가 한국문인화협회 부이사장, 창남 하진담 선생님이다. 그 부인 되시는 ‘진도 아리랑’ 작품의 소초 한동엽 소설가를 만난 인연으로 선생님의 제자가 되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나마 예술세계에 눈이 트인 것은 행복이다. 작품전시회가 있는 곳을 자주 찾아가 감상하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다. 바위처럼 과묵하신 노화가를 만나고 난향 그윽한 예술혼에 심취하는 시간이 여간 기쁜 것이 아니다.
마음의 아홉 등불과 그 외 여러 사람이 후반기 인생에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스승은 응원하고 겸손하게 하고 때로는 채찍질도 하면서 밝은 빛을 비춰주었다. 마음의 등불은 새로운 세상의 이정표였다.
세상사에 찌들어 자존감을 잃었을 때 만난 좋은 인연이 괴로움을 이기고 새로운 분야에 관심을 두게 하는 등불이 되었다. 문학을 논하며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을 공부하는 기쁨은 무엇과도 견줄 바가 아니었다.
같은 여성 앞에서도 말 한마디 자연스럽게 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는데, 말하기공부부터 시작해서 문단에 입문하여 문학 활동을 하면서 늦게나마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보내게 되어 행복하다.
인터넷 세상에서 젊은이 못지않게 사진과 글을 잘 올려 실버세대에게 좋은 정보나 문학으로 봉사할 힘을 기른 것은 이제 와 생각하니 참 잘한 일이다.
지금은 작고 문인에 대한 회고담이나 존경하는 문인들의 특강이 있을 때 찾아가서 글과 사진으로 그 내용을 정성을 다하여 정확하게 스케치하는 일을 즐긴다. 참석하지 못한 분들도 쉽게 볼 수 있도록 인터넷 세상에 상세히 알려주는 일을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환한 등불이 되고 싶다. 세상사 번뇌로 고민하고 삶이 고단할 때 가슴에 와 닿는 ‘지혜의 말 한마디는 천금보다 낫다’라는 생각이다.(2009.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