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이면 더욱 그리워지는 숙부(叔父)
민문자
곱게 물들었던 뒷동산의 단풍이 스산한 바람에 흩날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하늘을 찌르고 있다. 약수터로 가는 산책길에 접어드니 유난히도 차가운 새벽바람이 내 젊은 날의 회억을 헤집어 놓는다. 미나리꽝을 굴착기가 아름다운 습지공원으로 변화시킨 곳을 스쳐 지나가는데 문득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신 작은아버지 얼굴이 떠오른다. 생수를 길어다 담근 백김치가 요즘 맛이 잘 들어 김칫국물을 떠먹을 때마다 떠오르던 모습이다.
나에게 작은아버지는 아버지 버금가는 분이다. 맏이인 내가 열다섯 살 중학교 2 학년 때 아버지는 서른아홉 젊은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셨다. 위독하다는 소식 듣고 한달음에 달려온 동생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유언을 남기셨다.
“휴암리에 있는 논 열 마지기는 네 형수한테 주어라. 너는 그거 아니라도 살 수 있지 않니?”
“예,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작은 아버지는 한 마디 불평도 없이 그대로 순종하셨다.
인천에서 철물상을 하시던 작은아버지는 그 후 팔순을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오 남매나 되는 어린 조카들과 형수의 농사일을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자주 청주에 내려와서 우리 가족들을 알뜰히 보살펴 주셨다. 모심기나 김매기 때는 일부러 내려와 일꾼들에게 담배와 술을 대접하면서 어머니의 수고를 덜어주셨다. 또한 명절 때와 제사 때에는 한 번도 빠지는 일 없이 참석하셨고, 초등학교 교정에 국기 게양대를 설치해 줌으로써 우리 남매들의 기를 살려주는데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어느 날 하굣길에 우연히 작은아버지를 만났다. 우리 집에 오셨다가 돌아가시는 중이라면서 탁상시계를 사왔노라고 환하게 웃으시는 것이었다. 막 뛰다시피 달려서 집에 와 보니 미색의 예쁜 사발시계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아침 일찍 따르릉 따르릉 깨워주던 시계, 그것은 우리 집에서 처음 맞이한 귀중품으로서 오랫동안 우리 식구들의 사랑을 받았다.
방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는 것을 면하고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작은아버지께서 책상을 사 오신 덕분이었다. 또 명절 때마다 당신 자식들은 그냥 지나쳐도 할아버지와 우리를 위해서는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라도 잊지 않고 사오셨다.
아버지도 안 계신 넉넉지 못한 집안 형편에 상급학교 진학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을 때 고교진학을 하게 해주셨다. 대학에 몰래 시험을 쳐 합격하니 또 등록금을 보내 주신 분이다. 그 시절에는 학부형이 학교에 찾아오는 일이 극히 드물었는데 얼마나 어린 조카들을 걱정해 주셨던지 대학 일 학년 때 우리 학교와 고교생인 동생학교를 찾아와 격려해 주기도 하셨다.
드디어 교대를 졸업한 후 시골 초등학교에 초임교사 발령을 받고 근무할 때에도 여러 가지 맛있는 먹을거리를 많이 사가지고 찾아오셨던 분이었다. 작은아버지는 나를 생각해서 사온 것이지만 나는 이것을 모두 교장 선생님께 갖다드리면서 은연 중 작은 아버지 자랑을 늘어놓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살던 우리는 무엇이든 색다른 먹을거리가 생기면 어른께 드리는 것이 도리인줄만 알고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직장의 어른인 교장선생님에게도 그렇게 하면서 살았다.
차츰 나이가 들어 혼기가 되니 작은아버지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작은아버지 안목에 차는 사람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래도 천생연분이란 반드시 있는 법인지 숙모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과 만나서 어른들의 허락을 얻을 때의 작은아버지 표정이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인천 배다리 산유화다방에서 세 번째 만나는 날, 어머니와 작은아버지가 다른 자리에서 신랑 후보를 숨어 보다가 합격이면 손을 얼굴 위로 들어 표시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이야기가 다 끝나서 나가게 되었는데도 그때까지도 아무런 표정이 없다가 어른들 앞을 지나쳐 나오니 그때에서야 황급히 작은아버지가 손을 들어 사인을 해주시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작은아버지는 돈을 많이 벌어 큰 빌딩을 지었다. 건축한 후 아무도 입주하지 않은 새 빌딩에서 약혼식을 베풀어주셨고, 곧 이은 결혼식장에서는 내 손을 잡고 입장해 주셨다. 그러고 난 이후에도 어려울 때마다 온갖 힘을 보태주시던 고마운 분이다. 동생 하나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얼마나 애통해하셨는지, 나머지 우리 사 남매가 대학까지 모두 공부할 수 있게 어머니를 얼마나 위하고 도와주셨는지 모른다.
작은아버지는 식혜를 좋아하셨다. 그래서 식혜를 만들면 주전자에 담아서 택시를 타고 가져다 드리곤 하였다. 어느 해인가 고춧가루 없이 하얗게 담근 총각김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어 또 택시를 타고 가져다 드리니 맛있게 잡수셨다. 우리 가족을 그렇게 끔찍이 사랑해 주시던 분이 내가 결혼해서 칠 년이 되는 해 여름날 저녁, 목욕 후 맥주 한 잔 마시고 주무시다 그대로 홀연히 돌아가셨다. 쉰다섯 아까운 나이에.
해마다 작은 아버지 기일에는 우리 온 가족이 숙모와 사촌들과 함께하는 시간으로 삼아 작은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되새기고 있다. 올해는 숙모께서 7년 동안이나 아이가 없어 걱정하더니 뒤늦은 쌍둥이 손자 손녀를 보게 되어, 작은 아버지 영전에 기쁜 소식을 고하게 되었다고 전에 없이 흐뭇해 하셨다.
해마다 초겨울에 접어들면 결혼허락을 받기 위해 인천에 갔을 때의 일이 떠올라 절로 웃음을 머금게 한다. 합격신호를 기다리던 초조감 때문인지, 며칠 전에도 꿈속에서 작은 아버지를 만났다. 내 유년시절부터 아버지 대역으로 각인된 작은 아버지, 오늘은 작은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한국논단 원고)
약력
민 문 자 (閔文子 1944.7.2 청주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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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 부부시집 『반려자』『꽃바람』
* 수필집 : 『인생의 등불』
* 서재 : 민문자.시인.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