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실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하늘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처럼 깊고 높아 그 사이를 부는 바람 또한 싱그럽다. 햅쌀로 지은 밥맛은 입맛을 돋우어 비쩍 마른 사람도 절로 통통해 질 것만 같다. 그 뿐인가 온갖 과일은 또 향내를 풍기며 익어가니 과연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할 만 하다.
이토록 풍요로운 계절에 나는 어떤 결실이 있었던가.
“춘약불경(春若不耕)이면 추무소망(秋無所望)이니라 ” 라고 한 공자님 말씀처럼 내 인생의 봄과 가을을 생각해본다. 부지런한 농부의 곳간에는 풍요로움이 가득할 이 계절에 뜻밖에도 남편으로부터 가슴 벅찬 고백을 들었다.
자식 자랑은 반병신이고 자기 자랑은 온 병신, 마누라 자랑은 배내 병신이라고 하는데 굳이 팔불출을 자처하고 나선 남편의 말은 그래도 싫지 않았다. 앞으로 열흘만 있으면 환갑을 맞게 되는 남편은 “여보 ! 나 당신을 사랑 합니다 ”를 제1장으로 시작하여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이 다 그러하듯이 앞으로도 아내를 마음으로 의지하며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 같이 살아 가겠다 ”는 것이었다. 이어지는 내용은 매사를 고맙다는 말로 일관하면서 제 4장까지 끌다가 말미에는 “여보! 마누라, 고맙습니다 ”로 마무리 지었다. 남편은 한 술 더 떠서 이런 내용의 글을 우리부부가 자주 드나드는 홈페이지에 올려서 공개적으로 팔불출임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삼십일 년 전에 남편을 만난 나는 삼남매를 두었다. 작은아들은 홀 어머님께 효도하는 마음으로 아이 없는 맏동서한테 입양시켰다. 남편의 형님이니 집안 항 열로는 장손이 되는 셈이다. 그때 나의 심정은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삼남매 모두 잘 자라 주었다. 아들이 없는 형님을 안타깝게 여기시던 시어머님께도 효도한 셈이 되고 형님과는 누구보다도 끈끈한 우애로 연결될 수 있어서 좋았다. 남편은 속칭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할 정도로 어질고 착한 사람이다.
이러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어른들이 입을 모아 앞으로 잘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만 믿고 사랑의 씨앗을 묻었다. 결혼 비용을 결산한 후 나에게는 일만 원이란 돈이 남았다. 앞으로 삼십년 후에는 남편이 환갑을 맞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 때를 대비해서 삼십년짜리 장기저축에 들었다. 그 당시 일 만원이면 쌀 한 가마 값이었는데 그것을 삼십년 동안 저축해 놓으면 그 돈으로 근사한 환갑잔치를 치르고도 남을 것 같았다. 나는 이 금전 신탁 증서와 도장을 가보 1호쯤으로 생각하고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런데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니 그 동안 은행 이름이 자꾸 바뀌었다. 즉 한국신탁은행에서 서울신탁은행으로 바뀌더니 다시 서울은행으로 변신했다. 그러던 중에 삼십년 만기가 되고 2001년 9월26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은행을 찾아갔다. 소득세와 주민세를 공제하고 나니 일금 삼십팔만 삼천 일백팔십 원이 손에 들어왔다. 계산상으로야 틀림이 없겠지만 왜 그런지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삼십년 전에 맡긴 쌀 한 가마니 값이 채 두 가마니도 안 된다니... 그래서 장기간 은행예금을 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하는 말이 생겨 난지도 모르겠다. 일 만원이 사십 배가 되었다면 많이 증식된 것은 사실이지만 쌀값에 대비하니 너무 보잘 것이 없었다. 그리고 보면 내가 결혼 첫 걸음으로 내어 디뎠던 재테크는 완전히 실패하고 만 셈이다. 은행대리가 삼십년 동안의 정성에 감동했다면서 차 한 잔을 대접하겠단다. 차를 마시면서 그간의 비화(秘話)를 듣고 난 그는 귀빈용 선물세트 한 상자를 주면서 위로해 주었다.
남편을 위해 근사한 환갑잔치를 해 주겠다던 꿈은 날아갔지만 나는 이 소중한 돈을 의미 없이 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대학원에 다니면서 만학의 꿈을 불태우고 있는 남편에게 좋은 책을 사보라고 신권으로 바꾸어 봉투 채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는 그 어떤 진수성찬을 먹은 것 보다 좋다면서 감동하는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남편은 평소 사랑에 대한 표현이 인색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공개적으로 마누라 자랑 이야기를 쓴 “팔불출의 변 ”을 인터넷에 공개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환갑날엔 신혼시절 어설픈 솜씨로 담가 놓았던 결혼 1주년 기념 포도주와 2주년 기념 딸기 주, 그리고 3주년 기념 복숭아 주를 개봉하여 사랑의 열매인 자식들과 함께 행복의 축배를 들고 싶다.
지금 반세기만에 대풍을 맞게 된 우리나라는 가는 곳마다 풍년가가 메아리치고 있다. 이 뜻 깊은 21세기의 첫 가을, 나는 삼십년 동안 감추어 두었던 남편의 사랑을 이렇게 행복의 결실로 거두게 되었음을 못내 고마워하고 있다.
(2001. 10. 13)
꽃길 산책-(迎春花)
어디든 바깥나들이를 하고 싶은 화창한 봄날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꽃동산, 꽃 대궐이라 아름답기 그지없다. 며칠 전 하이얏트 호텔에서 나오는데 정문 옆 둔덕에 화사하게 피어난 샛노란 개나리 넝쿨이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동안 무심결에 지나면서 본 꽃잎이 몇 장인지 궁금했다. 개나리 꽃잎은 분명히 넉 장인데….
자세히 살펴보니 노란 꽃잎은 대개 다섯 장이었다. 하지만 개중에는 꽃잎이 여섯 장인 것도 있고 또 넉 장인 것도 간혹 있다. 문득 네 잎 클로버를 찾아다니던 때가 생각났다.
세 잎 클로버는 행복, 네 잎 클로버는 행운, 다섯 잎 클로버는 불행이라는데 이곳에 많이 피어 있는 다섯 장의 노란 꽃잎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까, 혼자서 의미부여를 해보았다.
그런데 꽃송이를 자세히 보니 새로 돋아나는 잎은 여느 개나리 잎보다 아주 작고 꽃잎도 더 얇은 것이 아닌가. 개나리꽃을 볼 때마다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모두 꽃잎이 넉 장이었고 이곳에 있는 꽃잎보다 도톰했었다. 그렇다면, 꼭 개나리 같은 이 꽃 이름은 무엇일까? 내가 개나리 꽃잎에 그토록 집착을 하는 것은 여학교 때 조화를 만든 기억 때문이다.
지금부터 사십여 년 전에는 겨울철에 생화를 구경할 수 없었으므로 꽃이 필요할 때마다 조화를 많이 만들어서 사용했다. 주로 장미와 카네이션과 개나리꽃을 만들었다. 그때 개나리꽃잎은 늘 다섯 장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개나리 꽃잎이 다섯 장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봄이 되면 개나리 꽃잎을 유심히 세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다가 이렇게 개나리꽃을 닮은 유사 개나리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작은 꽃가지 하나를 꺾어 들고 몇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이 꽃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남산 소파 길 방면으로 들어서니 눈처럼 곱게 핀 벚꽃이 내 마음을 유혹한다. 백범광장을 지나 퇴계로 방향으로 들어섰다. 남산케이블카매표소 건너편 위쪽으로 「남산 꽃길 산책로」란 현수막이 보인다. 도로 가에는 대여섯 대의 자동차가 서 있다. 안전지대처럼 느껴져 나도 옆에 차를 세우고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단풍나무에서 새잎이 돋아나는 모습이 여간 신기하지 않았다. 좁쌀 같은 작고 빨간 열매 같은 것이 피어나면서 연녹색 잎이 나온다.
여느 봄과는 달리 올해는 개나리 목련 진달래 벚꽃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함께 피어났다. 철책을 따라 내 키보다도 더 큰 샛노란 개나리 꽃줄기가 하늘로 쭉쭉 뻗어 있다. 산책로 양쪽으로 늘어선 커다란 벚꽃 가로수를 올려다보니 함박눈 같은 꽃눈이 내리고 있다.
아! 절로 탄성이 나온다. 돈 짝만 한 벚꽃, 고기 육 전 만한 왕 벚꽃, 만개한 벚꽃, 몽글몽글 막 터지려는 벚꽃, 이제 수수 알 만하게 준비하는 벚꽃, 더 흰 벚꽃, 바람이 휘익 눈송이 같은 꽃잎을 날린다. 능수버들처럼 아래로 꽃가지가 축축 늘어지는 능수 벚꽃은 한층 운치를 더해준다. 정상 쪽을 바라보니 소나무 아래로 붉게 타는 진달래 무더기가 여기저기 피어있고 고지대에서 보기 어려운 개나리가 정상 봉우리를 금실로 스티치 하듯 노란 띠를 두르고 있다.
삼삼오오 친구들과 가족들이 짝을 지어 산책하는 모습들이 전에 없이 좋아 보인다. 시각장애인들이 흰 지팡이를 짚고 더듬더듬 산책하는 모습도 많이 눈에 띄었다. 높은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정상인과 다름이 없다. 공연히 조마조마하던 나의 불안감은 기우였다.
야외식당이 무척 많은 사람으로 붐볐다. 나는 비치식탁에서 혼자 점심을 하였다. 뒤꼍으로 붓꽃 같은 노란색 난이 피어나고 목화송이처럼 탐스럽게 백목련이 부풀어있다. 배드민턴장에서 운동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런 곳에서 작은 모임을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친구들의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갑자기 까치 떼가 요란스럽게 지저귀며 날아오른다.
구석진 길 안쪽에 제갈공명을 받드는 사당인 와룡묘(臥龍廟)가 있다.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가니 단군 성전, 제석전, 약사전, 삼성각, 요사채가 있다. 원래 남산의 이름은 목멱산(木覓山)과 인경산(引慶山)이었단다. 이성계가 도읍지를 서울로 옮겨오고 나서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南山)이라 불렸고 또 풍수지리상으로도 충산(忠山)이라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단군 성전에 참배하였다. 나의 조상님을 뵙는 심정으로….
돌계단 옆으로 개나리 꽃길을 따라 이제 서울시 교육과학연구원으로 올라갔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보인다. 기념관 앞의 거대한 비석에 새겨진 안 의사의 계훈(戒訓)들이 나의 심금을 울렸다. 그 중에도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는 경구를 읽으려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문무를 겸비한 안중근 의사는 대 한국인(大韓國人)의 표상이요, 우리민족의 자존심이었다.
1968년에 최초로 개관된 식물원에 들어가서 열대 관엽 식물과 선인장류와 분재 류와 난 종류를 관람했다. 한쪽 코너에서 예쁜 꽃을 피운 작은 선인장을 젊은이가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농장에서 가져다 실비로 파는 것이라 했다. 창가에 두면 어울릴 것 같아 꽃 선인장 세분을 골라서 샀다.
식물원 바로 아래쪽에는 원숭이, 꽃사슴, 공작, 앵무새 등을 사육하는 작은 동물원이 있다. 많은 어린이에게는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되리라 믿어졌다. 남산 공원관리사무소 좌측에는 소월의 시비 산유화가 진달래무덤에 곱게 둘러싸여있다. 퇴계 이황 선생 상과 다산 정약용 선생 상은 홍매화와 자목련 백목련의 터지는 봄을 반기며 서 있는 듯했다. 하얀 홑이불이 펄럭이듯 벚꽃 우산 아래로 흩어지는 꽃비를 맞으며 도심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오랜 시간 혼자서만 꽃길 산책을 한 하루였다.(2003.4.10)~~~~~~~~~~~~~2011년 봄에야 영춘화(迎春花)라는 것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