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시인협회 2009 가을 세미나 참가 스케치
― 시와 영상미학
가을단풍이 곱게 물드는 2009년 10월 18일 한국현대시인협회는 2009 가을 세미나를 북한산 아카데미하우스 불암홀에서 열었다.
본회 상임이사 김종제 사회자가 개회와 국민의례 순서로 진행하고 신세훈 현대시협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였다. 요약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마다 여름세미나를 했는데 현대시협 서른아홉 살에 가을 세미나는 처음이다. ‘시와 영상 미학’의 전문이론을 갖춘 최만산, 이상옥 두 연사의 초현대적인 주제 발표를 펼치게 되어 기쁘다. 한국 詩林은 이렇게 해서 한 단계씩 배우고 깨달아가며 발전해 온 것이 아닌가. 오늘 참가한 회원, 연사, 토론자, 시낭송자들께 감사하고 제2회 ‘한국현대시인작품상’ 시상식을 하게 되어 함께 자축하며 수상자 안재찬 시인의 앞날에 詩運이 계속 빛나기를 바란다.”
다음은 본회고문 문덕수 예술원회원의 축사내용의 요약이다.
“현대시협은 많은 큰 에너지를 가졌던 단체였는데 이제 안으로 내실을 가져온다고 본다. 시의 가치결정에 미디어가 큰 역할을 하는 시대가 되었다. 미디어의 힘에도 단체가 영향을 크게 받는다. 단체로서의 아이덴티티(정체성)방향을 잡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를 쓰는데도 난맥상을 가져온다. 이제 시 쓰는데도 영상미학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다음 신규호 본회 명예이사장과 한분순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의 격려사가 있은 다음 1부 행사 종료 후 잠시 휴식했다.
2부 시상식 행사는 김용오 본회 부이사장이 심사보고를 하고 신세훈 이사장이 안재찬 수상자에게 제2회 ‘한국현대시인작품상’ 을 시상하였다. 이어서 안재찬 수상자의 수상소감이 있었다.
‘안녕을 손짓하며
재넘어가는
찬연한 일몰이여’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삼행시를 서두로 아름다운 마침표를 꿈꾸고 있다고 하였다. 문단의 어른이신 신세훈 이사장, 이성교 심사위원장과 심사위원들께 공정하고 엄격한 잣대로 수상자 반열에 세워주심에 고개 숙여 감사하다는 말과, ‘한국현대시인’ 명찰을 달고 문단 말석이나마 땀 뿌려 선배들이 가신 그길, 올곧은 선비의 길을 부끄럽지 않게 걷겠다고 하였다.
시집 《침묵의 칼날》속의 수상작품을 김경안 시인이 낭송하였다.
물음표만 남기고 / 안재찬 시 / 김경안 낭송
봄이 가기 전에 물음표만 남기고,
이름을 거두었다
별안간 파열음 한 갈래로 찍은 마침표
에 대하여
시루 속 물 먹은 콩나물처럼
사위는 속성한 의문부호가 무성하다
긴머리 소녀 닮은 물음표—
곱다란 뒷모습을 어디에 두고
불쑥 한 뼘 땅에 묻히어,
티끌 하나에 다름없는 봉분을 보고
신은 무슨 말을 건넬까
팔만 뻗으면 시간을 뛰어넘어
은사시나무 우거진 둔덕에서 어둠이 내려도
곧잘 조잘거리던 영혼,
꽃잎 분분한 사월 금요일
까칠한 순례자의 종언이 스며들은
물음표, 해독하는 이 심사가 적막하다
사회자는 이성교 심사위원장을 대신해서 심사소감을 (P26-27) 요약해서 읽었다.
‘안재찬 시인의 시는 자연 서정성을 촘촘히 끌어올려 주지적 빛을 발하게 하는 독특함과 존재에 대한 깊은 시정신과 철학적 깊이를 갖추고 있다는 심사위원들의 공통 의견이었다. 그리고 우리말의 감각적 표현을 긴 호흡으로 경쾌하고 힘있게 끌어올린다는 점이 특히 믿음을 더하게 해 요즘 젊은 시인들과 실력을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견해를 갖게 했다.’
강정화 시인과 문봉선 시인의 축하 시낭송으로 이어졌다.
아직도 우리사랑 유효해 / 강정화
지상에서 가장 열렬한 우리사랑
숲길 헤매다 꿈길에서 만날까
그대 곤드레 된 잠결 찾아
애타게 부르다 세상소식 잊을까
새벽 열어 하늘 바다에 이르렀네
나 한시도 그대 미워한 적도
그대 한순간 나 싫다 한적 없어도
다만 우리 사랑 서툴렀을 뿐
내 그대 사랑한 것 보다 많이
그대 나 사랑한 것 보다 훨씬 더
우리 사랑 익어 영글어질 때까지
한날한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후회없이 죽도록 사랑하다가
꿈같은 우리사랑 노을되어 타올라
세상이 온통 어둠의 장막 내릴때
하늘바다에 별이 되자 했으니
아직도 우리 사랑 유효한 걸
가뭄비 뒤에 / 문봉선
오시니껴
오시니라
오신김에
오래오래
노시다가
애간장 녹았을시더, 먼길
푹 쉬시다가 고마
맘놓고 그래 가시이소
제3부 행사
세미나는 신규호 본회 명예이사장이 좌장으로, 이상옥 본회 권익위 부의장이며 창신대문창과 교수와 최만산 본회 국제문화위원이며 군산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였다.
첫 번째 주제발표는 이상옥 교수가 ‘가장 진화된 형식, 디카 시’를 주제로 첫 번째 문자 시와 영상, 두 번째 디카와 영상에 대해서 발표를 하였다. 발표요약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문자 시와 영상’의 주제에서 ‘시는 언어로 그린 그림, 이미지’ ‘시는 이미지이다.’ 라는 말의 관점에서 원래 시는 영상을 내포로 거느리고 있다. 박목월의 나그네를 보기로 들었다.
나그네 /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영상세대가 출현하면서 문자만으로는 시의 표현의 한계를 넘지 못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문자외의 것들을 시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가장 보편화된 것이 사진 영상도입이다.
보기로는 베스트셀러 신현림 시집 《세기말 불르스 》(1996년 창작과 비평)의 시 ‘나의 싸움’ 이다.
나의 싸움 / 신현림
삶이란 자신을 망치는 것과 싸우는 일이다
망가지지 않기 위해 일을 한다
지상에서 남은 나날을 사랑하기 위해
외로움이 지나쳐
괴로움이 되는 모든 것
마음을 폐가로 만드는 모든 것과 싸운다
슬픔이 지나쳐 독약이 되는 모든 것
가슴을 까맣게 태우는 모든 것
실패와 실패 끝의 치욕과
습자지만큼 나약한 마음과
저승냄새 가득한 우울과 쓸쓸함
줄 위를 걷는 듯한 불안과
지겨운 고통은 어서꺼지라구!
사진 영상은 문자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의 문자와 사진의 결합은 기존의 구체시, 혹은 형태시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발자국 / 김명수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주었네
포토포엠의 시와 영상의 결합은 문자시가 문자를 시각화하거나 문자외의 다른 매체를 활용하는 형태시와는 또 다르다. 이는 기존시와 그림의 결합방식인 시화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포토포엠이 성행하는데, 이는 디지털 영상시대를 맞이하여 멀티감각에 익숙한 독자들을 문자만으로는 사로잡을 수 없기 때문에 사진 영상을 곁들여 시를 독자와 효과적으로 소통하려하는 시도이다. 그런데 이 포토포엠은 시와 사진의 영구 결합보다는 일시적인 성격이 짙다. 포토포엠의 시와 사진은 각각 독립성을 지닌다. 시는 시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각각의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두 번째 ‘디카와 영상’ 주제에 대하여 말했다. ‘디카는 날시이다.’ 날시를 상상력으로 본
것 같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맞아 시는 더욱 언어 예술이라는 좁은 카테고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상상력을 보인다.
높지 않지만 높다 / 장동명
어디론가 비행하는 참새떼
저기 뭔지 아니?
작게 속삭인다.
뭔지도 모르는 채
갈길을 날아간다
고성군의 협조를 받아 지난 5월 30일 제2회 경남 고성 디카 시 페스티벌 디카 시 백일장 고등부 최우수작 (수상자 장동범, 경남항공고2년)이다. 디카 시 페스티벌 백일장 행사는 고성 남산에 학생들을 모이게 하고 자연의 현상을 디카에 옮기고 그 시적 형상을 포착해서 옮겨 이메일로 보내면 심사위원장은 받은 즉시 심사하여 학교로 보낸 것이다.
디카 시 운동은 2004년부터 시적 실험으로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격세지감이 들 만큼 진척되었다. 디카 시를 날시라 하는 개념은 기존의 전통적 개념의 시적 대상, 혹은 소재를 넘어서는 것이다. 전통적 개념의 시가 소재를 예술적으로 변용시켜서 하나의 예술품을 창조해내는 것이라면 , 디카 시는 언어너머의 시를 포착하는 것이다. 즉, 디카 시는 자연이나 모든 피사체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인 날시(raw poem)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문자로 재현한 시이다. 원래 디카 시는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형상(날시)을 문자로 그대로 옮겨온다는 것이기 때문에 시인의 상상력이 개입할 틈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표현방식은 시인의 개성에 따라 얼마든지 주관적으로 변용될 수가 있다.
저녁 무렵 / 김영남
뒷산 마루터기 소나무 숲에서였을까
엉클어지고 심란한 내 얼굴 앞에
저렇게 크고 예쁜 가슴 꺼내어
젖꼭지 물리려했던 그때 그 누나는
디카 시는 순간포착이 중요하다. 디카 시의 상상력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옮기다보니 짧은 시가 된다. 자연이나 사물에서 포착한 시적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얼마든지 자유롭게 기술할 수 있다.
디카 시론집 ‘디카 시를 말한다’(2007)을 펴냈고 ‘앙코르 디카 시’라는 제목으로 제2의 디카 시론집을 구상하고 있다. 디카 시 전문잡지가 통권 6호 발간되어 유수의 시인 1백여 명이 신작 디카 시를 선보였다. 지난해부터 지역문화운동으로 경남 고성군의 지원으로 디카 시 페스티벌이 정기적으로 열린다. 올해 디카 시를 콘텐츠로 ‘시가 흐르는 서울’ 행사도 선유도에서 7,8월 매주 토요일에 열렸다.
이제는 보다 많은 이론가들이 참여하여 더욱 체계화된 디카 시론을 탐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평론가협회 주관으로 디카 시 세미나도 개최하기로 예정이 되어 있고 보다 많은 시인들이 신작 디카 시를 쓸 수 있도록 디카 시 전문잡지를 보다 지속적으로 발간할 토대를 마련하기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상옥 교수의 주제발표가 끝난 후 임소내 시인과 김길애 시인의 시낭송이 있었다.
배꼽 항(港) / 임솔내
가와바다야스나리의 ‘설국’을 가기위해
비행기채 휙 날아오른다
그리 오래지 않아 내 떠나 온 그곳이
밑으로 깨알처럼 멀어진다
비행기가 제 발을 오무려 들이는 그 순간부터
내 몸엔 날개가 돋기 시작한다
어둡고 아득한 공간 내 태아기의 어머니 몸 속, 태고의 바다
엎질러진 청춘의 잉크 물 같던 그 바다를
떠나올 때도 그랬다
배꼽 항港의 비릿내도 따라 왔었다
뿌리째 뽑아온 내 바다 넘실댄다고
쪼글쪼글 구겨진 바다 함부롭게 잊었다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햇볕에 졸아 달빛에 졸아 가문 전답처럼
실강江만 흐르는 그 바다 지금도 이생에 계신다
청청했지만 내 뒷골목의 만행
아직도 바람이 불때마다 내 심장에서 헤엄치던 것들은
비릿해지면서 무겁게 닫힌 자궁 바다 빗장을 연다
세상하고 품이 맞지 않아 거북할 때 마다
그 바다 그리웠다
그렇게 훌렁훌렁 떠나는게 아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주제, 그 바다가 마르지 않기를
나는 바랬고, 하마, 혼백이 희붐해져 챙김도 버림도 모르는
그 바다를 밥 먹듯 버리는 몹쓸 나는 딸년이 맞나?
가재 / 김길애
살 수 있을까
염려하며 플라스틱
물통 속에 넣어두었다
가끔씩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 줄 때면
나와 눈맞추곤 했다
며칠 전 가재는
제 온 껍질 허물 벗었다
밤새도록 물통벽을 친 후였다
멍으로 온몸이 새파래진 가재
기진맥진 물렁해진 가재
허물 벗지 못하는, 날 보며 웃는다
두 번째 주제발표자 최만선 교수가 시와 영상 미학 ―그 시적 회고와 퍼스펙티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하우저Houser는 현대를 한마디로 ‘영상 시대’라고 규정해 놓았다(Houser 214). 아드르노Adorno에 의하면 영화 자체가 일상적인 세계를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기 때문에 방금 영화관을 떠난 관객은 바깥의 거리를 영화의 연속으로 인지하며, 바깥세상이 영화속에서 알게 된 세계의 연장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기 쉬워 우리의 삶은 영화와 더 이상 구별되지않는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죽기 2년 전 1908년 한 인터뷰에서 다가오는 새시대의 여명을 놀라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자신은 카메라가 영화를 찍듯이 글을 쓰고 싶다고 고백한 바 있다.
영화는 문학 (소설)로부터의 원천이 있었다. 소설을 쓰듯 영화를 서술하고자 했던 그리피스의 의도와, 변화하는 사회 상황과 그시대의 지각 방식에 반응하여 영화를 찍듯 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톨스토이의 생각은 전혀 상충되지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톨스토이는 현실의 인상을 뛰어넘어 자신의 현실에 나타나고 있는 가속화를 디킨스처럼 영화적으로 보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영화 그자체를 바라보고 영화적으로 보는 방식에 따라 현실의 일부로서 발견한 영화적 표현과 문학적 표현과의 관계를 달성해보려 했다.
1950년대 프랑스 문단에서는 알랑 로브그리에Robbe-Grillet를 중심으로 누보로망Nouveau Roman(신소설)이라는 새로운 소설 양식이 대두되어 1960년대를 전후로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문예 잡지들을 통해서 이러한 일단의 경향이 소개된 바가 있다. 그뒤로는 우리 문학계의 관심에서 멀어진 듯하나 영상 시대 오늘의 시점에서 다시 한 번 그 누보로망의 발단과 전말을 되새겨보는 것도 여러 면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간 부단한 연구와 논쟁을 통해서 그정의가 보다 명백해졌으며, 누보로망이 단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문학정신의 면면한 흐름으로 오늘날 우리 시대 문화에 깊이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랑 로브그리에는 영화가 세부와 외부적 표면을 잘 다룬다는 점에 착안해 자신의 소설에서는 표면 즉, 외양만을 제시하고 정신에 대해 쓸 때는 이미지가 현실과 비현실사이를 떠돌아다니는 경계선의 상태만을 기록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인간의 동기․의도․반응 등 심리적인 면을 불신하면서 대상 즉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이 유효하다고 여겼다. 자신의 언어에서 정서를 추방하려고 애쓰며, 소설을 일련의 카메라-숏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지난해 마디앙바드에서’와 같은 영화를 실제로 제작한 영화 작가이기도 하다.
이같은 그의 작가적 태도는 영상 시대의 영상적 이미지가 지배하는 문화 조류에 조응하는 능동적인 지각 방식이다. 이리하여 소설은 끊임없이 영화 기법을 차용하여 영화가 지니는 속도․기계성․외향성 등이 구성하는 형식으로 외연을 확대해 왔고, 영화의 기법을 서사 목적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소설의 차원을 한층 확장시키는 데 주저하지않았다.
따라서 소설과 영화는 도구적, 심리적 표현원리를 공유하며 보다 많은 대중에 보다 많이 접근하기 위해서 경쟁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소설가들은 보는 행위와 본 것의 영상성을 문학적으로 재현해 소설의 전체적인 형태와 구조를 공공연히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이제는 이른바 ‘영화 소설’이라는 하위 문학 장르까지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기법은 카메라의 작동과 병치를 통해 화면을 구성하는 몽타지 기법이다. 몽타지는 모든 가치있는 영화들에 힘을 불어넣는 생명의 원칙이며 예술이 그것의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는 상태인 논리 이전의 상상적 사고 세계로 들어가는 전주곡 역할을 하고 있다. 언어 체계에서 몽타지는 일상적인 통어 상태에서 일탈해 가장 강렬한 시적 효과를 발산한다.
이기법은 문학의 가장 큰영향을 끼친 영화의 특징이지만, 어떤 점에서는 이미저리와 연상적인 논리를 토대로 하는 시로부터 영화의 본질 그리고 그상상력적 원천과 배경을 추적해 볼 수 있다. 베이첼 린지Lindsay가 “우리는 ‘푸른 온타리오 해변에서By Blue Ontario's Shore’에 기초한 휘트먼Whitman식의 시나리오가 필요하다(Lindsay 39)”고 말하는 데서 암시하듯 서구 현대시의 출발점인 19세기 휘트먼은 현대시뿐만이 아니라 현대 영화의 형식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시는 의미가 문장에 기초한 안정되고 일관된 구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이질적인 것의 병치를 통해 이루어져 있다. 그는 영화의 숏과 같은 다양한 시의 행을 단위로 사용함으로써 서구시의 전통인 균형적이고 질서 있는 고정된 틀에서 일탈해 세부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다음의 시 ‘나 자신의 노래 The Song of myself 15’는 논리의 기법을 이미지의 병치로 대신해 추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오브제의 구체적인 세부를 전체적인 인상을 위해 카메라의 눈으로 하나씩 찍어내듯 그리어 나간다. 따라서 각양 각색의 단편적인 생활상을 제시해 전체적인 미국의 문화 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콘트랄토의 가수가 올갠 놓인 단상에서 노래한다.
목수는 제목을 손질하고, 그의 대팻날이 사납게 밀어올리는 마찰음을 울린다.
기혼의 또는 미혼의 자녀들이 감사절 만찬에 참석하려고 마차로 귀향한다.
키잡이가 키바퀴를 잡고서 힘센 팔로 배를 한쪽으로 기울인다.
운전사는 포경선에 긴장해 서서 창과 작살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사냥꾼은 발자국소리 안나게 조심껏 몸을 뻗치고 걷는다.
집사는 제단앞에서 십자를 그으며 임명을 받고 있다.
실뽑는 여공은 큰물레바퀴소리에 맞추어 일진 일퇴한다.
농부는 일요일 산보 때 목책옆에 서서 연맥과 호맥의 작황을 바라본다.
광인은 증세가 확인되어 드디어 수용소로 운반된다…….
또한 ‘강을 건너는 기병대Cavalry Crossing a Ford ’는 단 하나의 이미지 그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물에 대한 그의 강렬한 시각적 통찰력이 돋보이는 미장센mise-en-scene으로서의 언어적 영상이다.
초록색 섬사이를 누비며 가는 기나긴 한 대열
뱀과 같이 꾸불꾸불한 코스를 따라 무기가 햇볕을 따라서
번쩍인다.- 들어라, 음악적인 견고한 울림소리
보라, 은과 같은 물줄기, 그 가운데서 물을 밟으며
걸어가는 말이 걸음을 멈추고 서서 목을 축인다.
보라, 햇볕에 탄 병사들, 어느 물이나 어느 사람이나 그림속의
인물, 방심한 듯 안장위에서 쉬기도 하고
어떤 병사는 저 쪽 기슭의 뚝위에 있고 어떤 병사는
지금 강물속에 들어선다. 한편
진홍과 청색과 순백색의
3각깃발은 밝고 선명하게 바람에 나부낀다.
더욱 흥미 있는 사실은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가 미친 영향이다. 그리피스 이후 영화를 현재의 형태로 발전시킨 영화 문법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에이젠슈타인은 하이쿠의 연구에서 몽타지의 개념을 보다 확고하게 정립시켜 놓았다. 서로 다른 개념 또는 견인 요소가 결합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한자에서 영화가 실현하는 역동성의 기본 요소를 발견하고, 그와 같은 방법으로 견인 요소의 변화가 본질적 변형 대신 완전히 다른 의미를 창조해내는 하이쿠에서, 그는 일련의 감성적 인식을 짧게 표현함으로써 섬세한 심리적 충격이 일어나고 있음을 바라보았다. 아이젠슈타인은 다음과 같은 하이쿠를 한 예로 제시한다(Andrew, 52.).
석양의 가을
잎도 없는 가지위에
고독한 까마귀 한 마리
이로써 에이젠슈타인은 회화적 방향성의 충돌을 비롯한 규모․질량․부피․깊이․어둠과 밝기 등 영화 제작자가 응용할 수 있는 견인 요소들 사이의 상호 충돌의 종류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충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일반적인 효과들의 종류에 대해서도 제시했다. 그는 견인 요소의 충돌은 운율적으로, 음조 상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감각 기능이 각 숏의 견인 요소를 이해하게 되고 또한 내면의 정신의 각각의 견인 요소들이 지닌 유사함이나 대조를 통해 보다 고차원적인 결합이나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인 요소로서의 숏은 특별한 변증법적 상호 작용에 의해 비로소 의미가 창출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는 몽타지란 영화의 생명적 원칙이라고 주장한다. 60년대 미장센론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Andrej Tarkowskij도 영상 시스팀의 틀을 제시하면서 예술가들은 형상을 통해 이세계의 전모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하고, 그 전형을 역시 바쇼의 하이쿠에서 찾았다.
고요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 퐁당
또는,
게으름이여
흔들어서 잠이 깬
나른한 봄비
얼마나 간결하고 세밀한 관찰인가, 얼마나 절제된 생각이고, 얼마나 빼어난 상상력인가. 이 시구들은 영혼으로 통하는 포착된 순간들의 독특한 일회성으로 말미암아 빼어난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그관찰이 예민하면 예민할수록 그만큼 독창적이 되고 독창적이면 독창적일수록 그관찰은 그만큼 형상에 더 근접해 있는 것이다. (봉인된 시간, p.130.)
말하자면 과거 시의 형식이 세계사에 위치한 각자의 순간에서 위대한 영화 예술을 낳는데 공헌해온 셈이다. 특히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영화와 그가 쓴 글들은 그가 문학을 상상적으로 활용해왔음을 보여주며, 그의 유명한 ‘영화감각The Film Sense’은 문학적 상상력의 확장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시와 영화의 실질적인 연관은 1910년에서 1920년 사이의 이미니즘 운동에서 발생한 몇몇 쟁점에서 시작한다고 볼 수 있다. 에즈라 파운드Pound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플롯을 배격하며, 형식이란 외적으로 부가되는 것이기 보다는 내용 그자체에서 이루어지며, 주제적인 응결성이나 통일성에서 생겨나는 형태이다. 그의 ‘시편Cantos’은 개별적인 시편들에서나 전체적인 구성에서 몇 개의 크고작은 이질적인 단편들로 이루어진 작품들로 구문․논리․수사․추상 등을 배격한다.
그는 이러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시적 방법으로 이질적인 이미지 또는 단편들을 병치하는 수법, 곧 상형 문자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이방법은 한자를 구체적인 이미지들의 병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이미지로 본 페놀로사Fenollosa의 한자 이론에 의한 것으로, 이것은 상형 문자적 방법의 시적 자료들을 논리적 연결을 무시하고 병치시켜 나가는 방법이며, 또한 영화에서 몽타지 기법을 뜻하는 것이어서 파운드의 시적 기법과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지 기법이 같은 관점에서 한자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문장이라는 개념 자체에 도전을 제기한 페놀로사를 지지하여 상형 문자가 회화적으로 문자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파운드는 공간상의 배열만으로 구문이 되는 언어의 의사 소통 가능성을 설파한 페놀로사의 논문 ‘시의 매체로서의 한자The Chinese Written Character as a Medium for Poetry’를 두고 모든 미학의 기초에 관한 연구라고 일컬었다. 이로써 단어의 기능을 이용해 화상을 만들고, 전통적인 구문이 아닌 병치를 통해 단어를 연결시키는 그의 기법은 에이젠슈타인의 영화 시퀀스 사이에 분명한 유사성을 갖게 된다.
에이젠슈타인은 행의 구문을 뛰어넘어서 시행을 연결하는 ‘행걸치기(enjambment)’를 사용한 키츠Keats의 ‘엔디미온Endymion’에서도 효과적인 편집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Eisenstein, 53.).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예는 오늘날 영화의 표준이 된 동작이 끝난 후가 아니라 동작 중에 커트를 한 후 다음 쇼트로 전한되는 편집 기법을 보여준다.
이렇게 그는 끝났다. 그리고 둘은 다
아무 말없이 앉아있었다. 하녀는 대답조차도
싫었던 것이다. 숨길로 내뿜은 말이 상실되고
들리지않으며, 헛된 것이라고 느끼고, 조각된 악어를
향하여 내던진 칼처럼, 아니면 태양을 향하여
메뚜기처럼 뛰며. 그녀는 울면서
의아해하면서; 애써 구실을 꾸려;
빌어먹을! 이 가련한 약골! 이라고
꾸짖듯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1922년, 20세기 이후 현대 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제임스 조이스와 티에스(T. S.) 엘리엇Eliot의 ‘율리시스Ulisses’와 ‘황무지The Waste Land ’의 탄생이야말로 도도한 영화 시대의 전개 과정과 그배경에서 잉태된 동시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주목된다. 1980년 파리에서 조이스를 만난 에이젠슈타인은 상형 문자에서 영화 영상까지의 그림과 문자의 역사를 중시하는 맥락에서 자신을 조이스와 연관지은 바 있다.
조셉 프랭크Frank는 엘리엇의 시작 태도에서 새로운 전체를 형성할 수 있는 능력, 또는 표면적으로 상충되는 경험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통합할 수 있는 능력에서 시적 감성의 특징이 있음을 보고, 이를 현대 문학의 특질인 시간적 연속성이 해체된 병치된 행위의 공간적 형식 spacial form 을 구축한다고 하여 이를 영화 기법cinematographic이라 이름한다(Hall, 419.).
각 작품은 에피소드적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강조한 것은 이른 바 이질적인 연속체, 의식 내용의 동시성,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이며 이때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은 영화에 있어 몽타지 기법 및 시간과 공간을 혼합하는 형식을 들 수 있다. 우리는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장면 전개의 불연속성 또는 상대적이며 모순적인 시간 개념 등에서 영화의 커팅, 디졸브, 인서트 등의 기법을 연상시키는 요소들을 발견한다.
시간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의 4차원적 세계인 영화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서로 순간들의 배열 순서에 따라 그기능이 상호 교환을 토대로 연결되어 공간은 시간화 되고 동시에 시간은 공간화되는 성격을 띄게 된다. 말하자면 시간은 그연속성을 잃어버리고 사건의 진행 과정에서 공간적 질서의 원칙에 따라 배합되어 시간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또한 공간의 여러 요소들도 시간의 한 순간속에 동시적으로 모여들게 되는 것이다.
현대인의 삶의 양식은 직접적인 현재에서 동시성의 체험이라 할 수 있다. 같은 사람이 지구상의 다른 공간에서 상호 무관한 이질적이고 상이한 사실들을 동시에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사건들을 또한 동시에 경험한다는 사실, 이에 따라 하나의 창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경계가 해체된 세계 주의를 현대의 매체 기술이 끊임없이 의식시켜주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글로벌 시대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몽타지적 시간 개념의 근원으로서 현대 예술의 세계적인 언어기호의 특징적인 효과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시를 쓰는 우리의 입장에서 이러한 의식과 경험의 연대를 공유한 시와 영화가 이제 상호간의 영역과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동일한 경험을 표현․창조․전달하기 위해 서로 다른 매체와 더불어 어느 정도까지 협력할 수 있는지 등의 여러가지 문제에 당면해 있다. 미국의 비평가 피들러Fiedler는 문학이 영상과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까지 믿는 사람이다. 이때 상도되는 것 중의 하나는 일본의 오랜 전통의 하이쿠 시가 누리고 있는 세계적인 위상이다. 유래없이 짧고 대중적인 하이쿠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자국어로 창작하고 즐기고 있는 정도로까지 글로벌 문화 양식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이는 20세기 영상 문화의 전개와 그과정에 무관하지않으며 하이쿠가 지닌 시각 미학 구조가 현대인의 이미지적 시대 감성에 무엇보다 잘 조응하기 때문이라고 보여지고 있다. 생략(ellipsis)에 의한 여백과 점선의 병치로 이루어진 이미지의 연관과 한 순간의 암시성이 발산하는 하이쿠의 공간 감각이 지구촌 세계인의 보편적 정서에 울림을 주고 있는 것이다. 영상매체의 장점 중의 하나는 외양에 대한 감수성이며 묘사나 분석이 아니라 그림으로 사람과 사물을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내재된 능력이랄 수 있고 그보다 더큰장점은 이미지가 고유한 전통과 배경을 지닌 각각의 언어가 갖는 한계와 개성을 뛰어넘어 보편성의 원칙에서 시간과 공간이 해체된 모든 인간의 심미적이고 정서적인 일치를 완성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영상 시대의 이미지가 범람하는 현대의 생활 공간에서 우리가 영상 시대의 이미지를 어떻게 수행해야 할 것인가의 방향을 설정하고, 이에 따른 어떤 방법론적인 탐구의 가능성에 대한 문학 전략적 모색과 깊은 천착이 있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점 60년대의 ‘선과 공간’ 이후 일관되게 추구해온 문덕수 시인의 시세계는 가히 독보적이며 표본적이다. 그의 최근에 발간된 ‘우체부’는 오늘의 시대 문화와 정신의 내면을 꽤뚫어본 역동적인 상상력과 투시적인 안목의 소산으로 우리 문학 지평을 한층 확대해 놓았다. 요컨데 이작품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율리시스적 내러티브에 기초한 의식의 편력인 현대판 ‘황무지’ 이랄 수 있다. 그의 시작 태도는 자서를 통해 예술의 개념을 스스로 개진하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그거장들에서 나타나는 카메라의 작동․몽타지․미장센 등의 모든 영화적 요소들을 유효하고도 적절히 응용하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그의 주제 의식인 현대 사회의 폭력적 몰가치성, 정체성의 상실, 그리고 그회복 가능성에 대한 성찰을 이를테면 한 인간의 다중의 해체된, 외양상으로는 무질서하게 너즈러진 파편들을 통일된 역사 인식에 의해 유기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새로운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과학 기술 매체인 스크린 또는 액정 게시판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영상적인 이미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됨을 의미하게 되었다. 글로벌 시대의 기능 주의적인 사고가 지배하는 정보화 사회에서 시대 문화의 변천과 조류를 피할 수 없는 데에 우리 시가 당면한 문제의 기본 인식이 출발하며, 그귀결은 이른 바 영상 문화의 수용과 그포용성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 시의 과제는 이러한 보편적인 문화가 지배하는 대중 의식의 반영물을 해석해내는 능력과 관련된다.
세계인이 동질성의 문화 의식으로 공유하고 있는 공감의 소통 방식이 마련된다면 그만큼 심미적이고 정서적인 상호 수용이 용이해져서 우리 시도 세계의 장벽을 넘어 세계의 문으로, 글로벌 시대의 세계 문학의 보편성에 쉽게 진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말하자면 한국의 김소월이 아닌 세계의 김소월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세계의 문학 정전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토대로 보편적 문화 소통 방식을 지향하며 개방적으로 이동하고 있는 동시대의 세계적인 문화 향유 모드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영상 문화의 문학적 융합은 우리 시가 성장하는 작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시를 세계로 연결시키는 수단을 확보하는 행위이다. 이미지 시대의 문화와 그 의식의 수용을 의미하는 영상 언어의 창조적 행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영화가 문학의 한 분파로써 문학 연구의 적법한 대상으로 간주하는 풍토를 옹호한다. 외국에서는 이미 대학 국문학과 교과 과정에서 영화의 강좌가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왜냐하면 특정한 종류의 영화들이 특정한 문학 작품 또는 문학 장르와 유사하거나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허버트 리드Herbert Read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좋은 글의 특징을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한마디로 말할 수 있다. 시각적인 것, 문학을 기본적인 요소로 축소시키게 되면 마침내는 한 가지 목적, 즉 말로써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에 귀결된다. 단지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 마음으로 보게 하는 것, 뇌 속에 있는 스크린에 움직이는 사물과 사건을 투사하는 것, 그것이 호메로스와 쉑스피어로부터 제임스 조이스와 헤밍웨이에 이르기 까지 적용되는 훌륭한 문학의 정의, 위대한 모든 시인의 업적이다. 이것은 또한 영화의 이상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시를 원작으로 한 앨트먼Altman의 ‘숏컷’ 같은 영화도 등장하게 되었고, 얼마 전 보도에 의하면 이창동 영화 감독이 ‘시’라는 영화를 크랭크인 했다고도 하여 그 결과물이 크게 기대되기도 하는 바 앞으로는 ‘영화 소설’이 그렇듯 세계적인 보편성의 영상적 언어 기호로 세계대중을 사로잡기 위한 문학 전략의 일환으로 또 하나의 하위 장르로서의 이른바 ‘영화시’의 화려한 전개가 예견되기도 한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가들은 이미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작품이 대중과 맺게 되는 접촉은 언제나 쾌락을 창조해야 한다는 로브그리에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므로 누보로망 운동은 부단히 진행 중이며 동시에 늘 새로운 시를 쓰고자하는 우리의 정신도 그러하다. 그럼으로 신시 즉 누보포에지Nouveu Poesie정신은 인간과 세계와의 새로운 관계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의 형식을 찾아서 ‘여기, 지금’이라는 시간과 공간의 축에 의한 시인 자신의 파악에 관련된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항상 누보포에지 운동의 중심에 서있는 사람들일 이유를 가지며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개화기 최남선이 신시를 썻듯 아이티(IT)정 보시대 오늘의 신시를 쓰겠다”고 그의 시선집 ‘초록징검다리’의 서문에서 다짐하고 있는 김규화 시인의 각오에 공감한다.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은 우리의 삶의 새로운 인식에 도달해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문학경과의 반성으로부터, 이미 행사해온 모든 글에서 빈틈을 느끼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의 달성은 끊임없이 추구하는 새로운 쾌락을 위하여 그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노력으로부터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는 ‘오늘의 시’를 써야한다고 믿으며, 결국 ‘오늘의 시’란 곧 보다 많은 대중의 시각적 욕구와 마주치는 영상 시대 영상 언어의 기능과 역할의 수용 의지와 그 자세에 의존한다고 여기고 있다.
한자(漢字)는 그 자체로서 문장이 된다.
親 나무위에 올라가 본다, 에즈라 파운드가 발견, 시와 몽타쥬 와는 이렇게 관계가 있다.
靜 과 動 의 삶의 병치
시가 영화에 준 기법은 무궁하다. 영화가 19세기 휘트먼식 시에 있었다. 휘트먼의 시 병치수법이 영화에 끼친 영향, 문학의 힘은 대단하다.
소설가들이 영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다. 독자 상대가 아니라 영화감독을 상대하여 수입을 올리려는 소설가정신이 요즈음 나오고 있다. 영화 타이타닉호는 원래 있던 소설 타이타닉호—소설을 가지고 시나리오를 썼다. 실제침몰사건이후 영화화한 것이다. 소설이 있는 줄 몰랐다가 영화방영이후 소설이 많이 팔렸다. 엘리엇의 시 <황무지>는 로마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이는 영화 <달콤한 인생>과 비슷하다. 영화소설이 나왔듯이 혹시 영화 시 장르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최만산 교수의 주제발표가 끝나고 이솔 시인과 신주원 시인의 시낭송이 있었다.
7월의 까치가 그리는 소리의 각은 / 이솔 시인
7월, 비개인 아침까치는
사람들을 신선하게 눈 뜨게 한다
유리구슬 부딪듯 차가운
그 소리는
유리구슬이 떨어지며 그리는
잣나무 가지끝 쯤에서 떨어뜨리는 꺾인 각을
소리를 좇아 눈 맞추면
깍깍 두 번 끊어 울고는
날개를 끝까지 펼쳐 보이는
흰색과 검은 색의 주름
언제나 검은 스커트에 깃이 동그란 흰블라우스의
담임선생님의 옥구슬 목소리로
또각또각 꺾이는 구두소리로
시원스레 눈뜨게 한다
잣나무 위에서 뚝 떨어지는 꺾인 울음과
스커트의 가지런한 주름으로 떨어지는
보도블럭의 무늬를 또각또각 끊어 딛는 아침 구두소리
예각과 예각이 소리로 빛으로 각을 만드는
비 개인 아침
잣나무 잎 끝에서 물방울 떨어지려 떨어지려 한다
빗장속 햇살 / 신주원
황혼바다 저편
누천빛깔 햇살
빗장속 햇살
반달별이 깃을 단다
단 한번 뿐인
동트는 순간
나는 빗장속을 열고 나온다
토론
* 토론자 1. 신현득 아동문학가
시적 재료에서 박목월의 나그네를 보기로 들었는데 역사를 말할 때 삽화 → 그림책 → 사진으로 설명이 된다.
윤석중 사진 시, 방정환 사진소설이 이미 있었다.
우리문학의 역사를 설명할 때, 아동문학도 좀 끼워 주어야 한다.
* 토론자 2. 심상운 시인
1.이상옥 교수에게 질문은 첫째 포토포엠과 디카 시 와의 구분 모호,
둘째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 은 디카 시, 셋째 디카 시는 시인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영상에 종속된 시가 아닌가?
2. 최만산 교수에게 질문
하이퍼 텍스트 소설의 영상성이 시나 소설의 창작기법과 소설의 영상화 어떻게 다른가?
하이퍼 독자와 작가가 함께 만나는 기법, 하이퍼 독자와 작가가 함께 만나는 기법, 작가가 공동으로 즐기는 소통의 문제라고 답변하다.
* 토론자 3. 박두순 아동문학가
* 이상옥 교수에게 질문
결론부분에서 시가 언어미학을 넘어설 수 없이 진화해 왔기 때문에 시는 여전히 언어예술의 본질이고 디카 시는 김영남의 시에서 그림을 제거하면 시가 안 된다. 디카 시는 두 개가 공존해야 시가 되는 것이 아닌가? 포토포엠은 사진을 제거하면 시가 남지만 디카 시는 사진을 제거하면 시가 아니 된다.
* 이상옥 교수 답변
포토포엠은 문자 시, 디카 시는 순간포착으로 영혼과 육체가 하나의 인간을 이루듯이 디카 시도 둘이 합하여야 완전한 시가 되는 것이다. 포토포엠은 시가 사진에 종속되는 것이다.
디카 시는 시의 바다에서 한 어족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시인이면 서정시도 쓰고 자연시도 쓰고 디카 시도 쓸 수 있어야 한다.
* 신규호 좌장의 총정리 말씀
영화 시가 새로운 장르로 떠오르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시를 읽으면서 영상으로 상상력을 동원하여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면 될 것이다.
월간 《시문학 2008년 11, 12월호》에 전재한 470행의 장시, 문덕수의 <우체부>는 21세기의 황무지 기법이다. 완벽한 영화기법이다.
이어서 전체사진 촬영으로 2009 가을 세미나는 막을 내리고 만찬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