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배 꽃 날리는 계절
병원 외곽, 인천의 변두리 마을 야산엔 배꽃이 바람을 타고 파도처럼 일렁이고 나비처럼 날아오르다 안개비처럼 내려앉는다. 환희의 계절이다.
천혜의 날씨, 꽃잎의 오색 날개는 각양각색의 묘기로 사방을 달콤한 시간 속에 젖게 한다.
아이가 보고 싶다는 장진태의 호출에 서둘러 퇴근을 한 김은실은 아이를 들춰 업고 날리는 꽃비 속을 헤치고 병원으로 향한다.
꽃 이파리 하나가 김은실의 펑퍼짐한 콧등 위에서 명당자리에라도 앉은 듯 동행한다.
아이를 등에 업고 친정어머니가 쑤어주신 잣죽 한 통과 반찬을 담은 가방을 어깨에 멘 김은실의 발걸음은 남편에게 줄 잣죽이기에 식지 않게 아기 포대기 한 자락 속에다 밀어 넣고 병원 밥 나오기 전까지 가려고 걸음을 재촉한다.
걸어서 십여 분, 택시를 타고 가기에는 가까운 거리다.
아이를 놔두고 올 수도 없고 하루 종일 민원인에게 시달려 피로한 기색이 역력한 김은실은 선하품을 하며 병원 문턱을 들어선다.
김은실은 동사무소 직원인 공무원이다.
아직 저녁 밥 나올 시간은 아니었다.
알코올 냄새의 밀도로 가득 찬 병원은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밀실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며 김은실의 가슴을 옥죄었다.
김은실은 아이를 안은 어깨 끈을 느슨하게 풀어 매며 8층 엘리베이터 스윗치를 눌렀다.
김은실을 보자마자 장진태는 두 팔을 벌려 손바닥을 두어 번 치며 아이를 등에서 내려 가슴에 앉는다.
-몇 년 만의 만남인 것 같네요.
옆 자리 환자의 보호자인 아주머니가 두 부자의 상봉이 남다르다는 듯 거든다.
-이 사람 눈에는 저는 안 보이는가 봐요. 여보, 저도 왔어요ㅎㅎ..
김은실은 잣죽이 식을세라 남편 앞에 뚜껑을 열어 놓는다.
장진태는 아이 먼저 한 수저 떠먹이며 본격적인 수저를 든다.
-여보, 오늘도 엉덩이 주사 맞았어요?
-그럼, 항생제 주사는 필히 맞아야 한 대. 거 주사 은근 아프던데. 뻐근하고.
-어른이 뭐 얼마나 아프다고 그렇게 말을 해요.
-허어,,그럼 당신이 맞아 보실래요?
커튼 안의 저녁시간은 잣죽의 고소한 냄새와 세 식구의 소소한 이야기 거리로 행복한 만찬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 달 여일을 병원신세를 질 거라는 간호사의 말에 회사에 연락 해 병가를 내고 어수선한 마음을 추스른 장진태.
그는 아내가 피곤할까 싶어 내일은 오지 않아도 된다는 당부와 함께 어두워지기 전 집으로 돌려보낸다.
시내 외곽에 있는 병원은 장진태의 집에서 걸어서도 가까운 거리이다.
이제 초봄을 지나 산비탈 마다 복숭아, 배, 사과 꽃이 흐드러지게 핀 계절은 골짜기 마다 꽃구름 언덕을 연상케 하며 바람이 불 때마다 한 뭉치의 깃털처럼 이동하는 꽃송이들이 운무인양 실루엣을 연출하고 있었다.
제법 길어진 사월의 해거름을 바라보며 남편이 그만하기를 다행이라며 병원을 나오는데 저 만치서 뭔가를 잔뜩 실은 트럭 한 대가 뒤뚱거리며 다가오고 있다.
김은실은 트럭을 피하려 옆으로 비켜섰다.
웬 트럭이 병원으로 들어오나 싶어 가득 실은 짐을 보는 순간 김은실은 아연실색 놀라 다리가 후둘 거렸다.
트럭에 가득 실린 짐은 다름 아닌 관이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철커덩 내려앉은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저 관과 나와는 상관없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저 많은 관 속에 들어갈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고 그 관에 들어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수반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니 삶의 희로애락이 과연 세상 무엇의 산물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트럭은 천천히 장례식장 쪽으로 이동해 보이지 않고 김은실은 몇 년 전 작은 아버지가 수술을 하셨을 때 작은어머니랑 보호자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화장실 근처에 놓여있던 작은 관들이 떠올랐다.
밤에 화장실 가다가 본 빈 관이었지만 얼마나 선득 했는지 화장실에서 한참을 나오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관은 어른의 관이 아니고 아이들의 관이었던 것 같았다.
저승을 향해 누울 때 고작해야 한 평 남짓한 궤짝에 실려 어디론가 가야할 것을, 살아 있을 땐 싸고 지고 바리바리 끌어안고 울고 웃고 하는 인생을 어찌 다 설명해야 할까.
비우고 버리면 가벼워진다는 이치를 모를 이 없건만 사람의 마음 한 편엔 욕심이 뱀처럼 똬리 틀고 있어 선악을 겸비한 중생으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리라.
오늘 하루는 하루치의 양식만 있으면 되고 내일은 내일 치의 양식만 있으면 되는 것을 인간은 백년도 살지 못하면서도 천년의 걱정을 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개탄스런 일이 분명하다.
-장진태 환자님, 오늘 저녁은 엉덩이 주사 없습니다. ㅎㅎ...
-낮에는 안보이시더니만,, 삼교대라 그러셨군요.
-네에...낼 아침까지 에요. 무릎 통증은 줄어드셨는지요?
-네에...많이 줄어들었습니다. 가끔가다 욱신거리기는 하지만요.
-성함이 이화~~라고 하신다죠? 우리 집사람이 얘기해 주더군요.
참 아름다운 이름이시네요. 그런데 왜 배꽃이 연상될까요?
-그러세요?..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씀이십니다. 저는 배꽃하고는 전혀 연관이 없는데요. 장진태 환자님의 아기는 너무 귀엽게 생겼어요. 환자분 닮아서 아기도 곱슬머리던데요..ㅎㅎ...저는 집이 전주라 어린 조카가 보고 싶어도 자주 못 내려가요.
처음 만났어도 한 달 이상 만남사람처럼 유화적인 제스처와 언변이 일등인 장진태. 그에 못지않은 간호사 이화의 맞장구도 보통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선 서슴없는 그들 특유의 언변술이 빛나고 있었다.
이화는 여러 해 동안 많은 환자들을 돌본 수준급의 간호사였고 환자들 간엔 상냥하기로 입소문 난 베테랑 간호사다.
환자들이 퇴원 할 때 병원 의사와 간호사를 평가하는 익명의 엽서가 있다. 이화는 엽서 일 순위를 차지할 정도로 실력 있는 간호사이고 환자들의 선물공세도 넘쳐나 다른 간호사들의 부러움을 한 눈에 살 정도이다.
병실 밖, 늦은 봄의 풍경은 서서히 일손을 시작한 사람들의 모습과 과수원마다 분홍의 물결이 팝콘을 튀겨놓은 듯 향긋한 설렘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장진태는 이 눈부신 계절에 병실 안에서 하루 세 끼 주는 식사를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보낸다는 건 사람이 아니라 짐승처럼 사육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생각하니 은근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장진태는 핸드폰을 꺼낸다. 피곤하니 자주 오지 말라던 아내에게 아이가 보고 싶으니 퇴근 하는 대로 아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다 아니, 내일 꼭 데리고 오라고 전화를 하고 옆 침대 환자에게 병원 밥은 먹을만한지, 퇴원은 언제 하는지를 물어보며 특유의 매너 있는 너스레를 떤다.
경상의 교통사고 환자들이 많은 정형외과 병실.
소위 나이롱환자들이라고 자처하며 자기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는지 중증의 장진태에게는 속 깊은 말을 하지 않고 몸조리나 잘하고 재활이 중요하다며 며칠 먼저 입원한 선배로서 가르침을 베푼다.
동료 간 유순한 성품에다 일 처리 깔끔하기로 소문난 김은실 팀장과 직장에서 감초격인 장진태의 인기는 오후면 면회 오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병실은 항상 초만원을 이룰 지경이었다.
위로와 쾌차를 기원하는 현금봉투를 내미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과일바구니를 사들고 오는 사람도 종종 있어 병실 안은 늘 먹을거리 나눔의 장소로 바뀌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인기척 없는 무료한 시간은 망상이 엄습하는 시간이다.
그 때 장진태의 눈에 화려하게 포장된 과일바구니가 눈앞에 들어왔다.
단내 풍기는 갖가지 모양의 예쁜 과일을 보자 갑자기 간호사 이화를 떠올린 장진태는 자기도 모르게 침대 위 호출 벨을 누른다.
-여기 501호실인데요, 장진태 입니다. 간호사 이화 씨 부탁합니다.
선물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요. 드릴려구요.
과일바구니는 이 전부터 이화의 것이라는 확신에 찬 들 뜬 음성으로 호출 버튼을 누른 것이다.
-아닙니다. 환자 분, 집으로 가져 가셔야지요.
간호사 이화는 장진태가 내미는 과일바구니를 몇 번 사양하다가 가지고 나가며 감사의 인사와 함께 종종 걸음으로 병실을 나간다.
사실 간호사 실은 환자들이 주고 가는 먹을거리로 넘쳐나고 있다.
한편, 병을 얻은 사람의 약한 마음은 어디에라도 기대고 싶고 위로받고 싶어 허전할 때가 많다.
그럴 때에 따뜻한 말이나 정스런 눈 길 한 번 주고 가는 의사나 간호사에게는 무엇이라도 건네주고 싶어지고 소리 없는 호출로 외로운 심령을 치유 받고 싶어지는 게 모든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장진태는 김은실이 보내준 아들 은진의 동영상을 연거푸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닫지 않고 소변을 보는지 지린내가 확 풍겨왔다. 사실 장진태의 병실 침대는 화장실과 근거리로 마주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욱신거리는 통증에 잠을 설치다 잠들만 하면 화장실 문 여닫는 소리에 잠을 깨곤 해 신경이 곤두서 있던 참이었다.
장진태는 커튼을 확 제 치고 소리를 질렀다.
-거, 화장실 문 좀 닫고 볼 일 좀 보면 안 될까요? 지린내가 진동을 해서리..
소변을 보다말고 화장실 문을 쾅! 닫은 남자가 바지도 다 추기지도 않은 채 장진태 앞으로 오더니 삿대질을 해대며 뭔 냄새가 그리 고약하게 났느냐며 소리를 지른다.
장진태는 본인이 휠체어를 탄 신세만 아니면 멱살잡이라도 하면서 뒤집어 놓을 텐데...하며 애매한 휠체어를 한 쪽 발로 걷어찬다.
큰 소리에 놀란 간호사가 뛰어오더니 서로가 참고 이해하라고 하면서 남자 환자를 자리로 안내해 주고 나간다.
사실 병실은 좁은 6인실에다 장진태 침대 코앞이 화장실이어서 식사 배식이 나오면 커튼을 치고 식사를 해야 했다.
식사 중에는 될 수 있으면 그 앞에 있는 사람을 배려해 식사가 끝난 뒤 화장실을 가는 게 매너겠지만 그런 고급스런 매너의 질서는 501호 환자들 간에는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지난 번 휠체어를 타고 간신히 화장실 갔을 때 누군가 대변을 보고 내리지 않았어도 조용히 지나갔었는데 오늘 괜히 지린내 하나 때문에 병실이 소란해졌다고 생각하며 장진태는 참을성 없는 자신을 자책한다.
TV 전원이 꺼지고 병실과 복도도 큰 등은 소등되고 소란했던 하루를 마감하는 침묵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제기랄! 병실 자리도 창가 쪽 명당자리로 차지해야 하는데!’
환자 한 명이 퇴원하면 결단코 그 쪽으로 옮기리라 작정하는 장진태.
그는 핸드폰을 열어 아이 사진을 들여다보며 마음을 진정시킨다.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갑자기 지난 번 김은실에 콧등에 얹혀왔던 하얀 배 꽃잎이 생각난 장진태의 뇌리에 간호사 이화의 이름이 떠오르며 커다란 구름 떼의 꽃잎이 눈송이처럼 가슴에 내려앉는다.
가끔, 간호사가 병실 점검을 하는지 조용하고 희미한 발자국 소리가 그림자처럼 지나간다.
이화, 이화,...배 꽃. 희디 흰 얼굴에 맑고 까만 눈동자.
장진태의 엉덩이를 탁! 탁! 치며 몇 번의 화인을 찍은 여자.
간호사가 주사 놓기 전 환자들의 엉덩이를 보는 것은 다반사이겠지만 장진태는 간호사 이화 앞에 본인의 엉덩이는 다른 사람들과는 개별적으로 다를 것이라는 공상 아닌 망상을 해가며 밤을 보내고 있다.
불면의 긴 밤은 쉽게 지나가지 않는다.
착각이 꼬리를 물고 망상의 날개를 펼치며 새벽녘에서야 눈을 붙인 장진태는 이튿날 아침밥 배식을 식탁 위에 놓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장진태 환자분, 식사 하셔야죠.
아침 퇴근 전 들린 간호사 이화가 장진태를 흔들어 깨운다.
잠이 들 깬 장진태는 멋쩍은 듯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이화를 바라보자 살가운 그녀는 반찬 그릇의 뚜껑을 열어주며 식기 전에 식사 할 것을 권유하고 나간다.
옆 환자의 보호자인 아주머니가 식은 국을 렌지에 데워다 주며 인정을 베푼다.
아무튼 병실 안 분위기도 옥신각신 날리는 꽃잎의 유영처럼 흐르며 하루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