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백년 기다린 완창과 절창
-김소해 시조집 『서너 백년 기다릴게』
글 정희경 문학도시 편집장
“시조는 고리타분하다” “시조는 음풍농월이다” “시조는 창으로 불린다” “시조는 조선시대 문학이다” 등 아직도 현대시조에 대해 이런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시조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심한 국민이다. 1년간 발간되는 개인 시조집과 전문 잡지가 몇백 권이고 영어, 중국어, 일본어로 번역되는 시조도 꾸준히 늘고 있다. 문학진흥법에 시조가 독립 장르가 된 지도 몇 년이 흘렀다. 그동안 시조시인들은 투사와 같은 마음으로 시조를 알리고 주옥같은 작품을 창작해 왔다. 시조시인들은 애국심, 혹은 단순히 우리 것이라는 것을 내세워 시조를 국민문학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시조가 우리의 사상과 감정 그리고 문화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기 때문에 국민문학이다.
참 오랜 시간 완창과 절창의 시조를 기다리며 삶 자체가 시조인 김소해 시인의 여섯 번째 시조집 『서너 백년 기다릴게』를 만나면 시조에 대한 그간의 편견은 사라질 것이다. 치열하게 시조에 천착하고 퇴고에 퇴고를 거듭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새끼 잃은 어미 소 그 울음을 들은 적 있다/들어 올린 북채가 화음을 치는 순간/가슴팍 소 한 마리가/길을 잃고 헤맨다//둥근 방점 쿵쿵 찍는 오케스트라 큰북 한 채/악기란 악기 소리 품어 안는 우렛소리/저음의 깊은 울림은, 텅/저 소의 빈 가슴이다 -「큰북」 전문
한 편의 시조에서 북소리가 끝도 없이 울린다. 그것도 가슴을 치면서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오케스트라 큰북”은 곧 “새끼 잃은 어미 소”의 울음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에서 저음으로 울리는 큰북의 소리를 “새끼 잃은” “소의 빈 가슴”이라는 글자로 표현하는 능력이 범상치 않다. “어미 소” “소 한 마리” “저 소” 등 소의 지칭을 다양화하고 “울음” “화음” “우렛소리” “울림”이 “빈 가슴”으로 집중되어 반복과 지루함을 피하고 있는 점도 퇴고를 거듭한 결과이리라. 이 시조를 읽으면 큰 눈망울을 가진 소 한 마리가 너른 들판에서 노을을 배경으로 우는 모습과 오케스트라 속의 큰 북의 울림이 오버랩 된다. 독자는 소와 함께 속울음을 울게 될 것이다. 거기에는 소의 희생 또한 한자리를 잡고 있다.
그 노인 뙈기밭 길과 한 몸이던 거기/기다리던 발소리 산으로 가셨으니/적막에 귀 열어놓고 길도 따라 길을 버린//안타까이 우거지는 쇠뜨기며 패랭이며/조문이듯 위로이듯 순장을 덮어준다/풍장도 마다않아서 산이 되는 비탈길 -「길의 순장」 전문
“순장”이라는 시어로 작품을 쓴다면 과거로의 소급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시조는 “순장”이라는 시어의 가치를 가장 현대적으로 끌어올린 작품이다. “뙈기밭”을 일구기 위해 수없이 오르내린 길, 그 길이 기억하는 “그 노인”의 “발소리”, 그러나 그가 없는 길, 그 길도 그를 따라 순장한 것이다. “쇠뜨기며 패랭이”도 조문하듯 길을 덮고 결국 비탈길은 “산이 되”었다. 이 작품에서 굳이 농촌의 인구감소라는 이성적인 논지를 얘기하고 싶지 않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길, 노인을 따라 순장한 그 길, 그 아름다움 하나로도 이 작품은 시조로서의 품격을 지킨 작품이다.
밭고랑 호미질에 꼬리 자르고 도망가던//도망은 가더라도 제 살을 자르다니//얼마나 다급했으면 아픈 줄도 몰랐을까//구조조정 찬바람은 바닥에 먼저 불어//명함은 없더라도 꽃잎같이 내걸었던//사랑네 분식점 간판 그 덕으로 그나마//그나마 그 덕으로 네 식구 따스한 둥지//이마저 시샘하는 역병, 금줄을 둘렀다//도마뱀 꼬리 자르듯 간판을 내린다 -「도마뱀 꼬리를 자르고」 전문
『서너 백년 기다릴게』의 또 다른 미덕은 김 시조시인의 주위에 존재하는 작고 여린 것들에 따듯한 시선이 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현대시조가 안고 있는 시절가조의 역할에 충실한 결과이다,
“밭고랑 호미질에 꼬리 자르고 도망가던” 도마뱀에 비유된 “사랑네 분식점”의 모습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이다. “구조조정”에서 “역병”으로 간판을 내려야 하는 우리 소상공인의 아픔이 “네 식구 따스한 둥지”마저 위협하는 실정이 되었다. 시조시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재개발에 희생된 “장미주택 동백연립”(「우리 동네」), “재건축이 밀다 놓친” 「달빛공장 완월동」, “잔치는 푸짐해도 초대받지 못한 원주민”(「죄」) 등 재개발에 밀려난 그늘진 곳을 감싸준다. 그리고 그 절정은 “부산항 지게 노동자들 항의 시위”를 “쓰러진 풀 아직 운다”라고 표현한 「풀을 다시 읽다」에 있다. 주위를 살뜰히 살피는 작가만이 이런 소재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사라져가는 것들을 시조로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가 여기 있네/어매의 어매로부터 그늘이 물든 소리/내딛는 걸음걸음이/그냥 그대로 화음이던//문자보다 음표보다 먼저 태어난 노래여서/아리랑 굽이굽이 일렁이는 마음이던/완창도 절창도 아닌/시작도 끝도 따로 없던//감자밭 감자두둑 알이 굵은 까닭이사/밭고랑 호미질에 노래가 얹힌 때문/가시고 한참 후에도/알은 여직 굵어 있네 -「하지감자」 전문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는 어머니의 노래다. “완창도 절창도 아닌/시작도 끝도 따로 없던” 우리 어머니의 노동이요, 삶이다. “하지감자”를 심고 가꾸고 거두는 과정에서의 어머니의 노고가 전통적인 여성의 삶으로 확대된다. “문자보다 음표보다 먼저 태어난 노래”는 전통적인 어머니의 삶을 견인하며 “감자두둑 알이 굵은 까닭”이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헌사이다. 가장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어머니를 그리면서 구황작물인 “하지감자”라는 독특한 소재를 선택하여 “알은 여직 굵어 있네”라고 전통을 현재에까지 끌고 오는 힘을 발휘한다. 또한 여운을 짙게 남겨, 김소해 시조시인만의 개성이 여지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김소해 시인에게 있어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는 시조라는 생각이 든다. “완창도 절창도” 아직 아니라며 “시작도 끝도 없”는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시조시인, “늦도록 늦은 밤 나는 아직 길에 있네”라며 “바람도 잠들지 못한 길” “서너 백년 기다”(「찔레꽃 명당」)린다는 김소해 시조시인, 그의 시조는 절창과 완창을 서너 백년 기다린 독자에게 이미 단비 같은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