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30 신문에 실린 시조
하지감자
김소해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가 여기 있네
어매의 어매로부터 그늘이 물든 소리
내딛는 걸음걸음이
그냥 그대로 화음이던
문자보다 음표보다 먼저 태어난 노래여서
아리랑 굽이굽이 일렁이는 마음이던
완창도 절창도 아닌
시작도 끝도 따로 없던
감자밭 감자두둑 알이 굵은 까닭이사
밭고랑 호미질에 노래가 얹힌 때문
가시고
한참 후에도
알은 여직 굵어 있네
-서너 백년 기다릴게- 황금알 2023-
김소해 시인은 시조를 위해 태어난 분이다. 일평생 시조 하나만 붙들어 안고 뜨거운 쟁투를 벌이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때로 멀리서 바라보면서 감동하곤 한다. 한 생애를 애오라지 시조 쓰기에 바친다는 것은 그만큼 긍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진 건실한 내면이 있다는 뜻이다. 내면의 곳간에 쌓아놓은 애환 거리가 풍족하다는 것이다. 거기로부터 실타래처럼 풀려나오는 이야기들을 언어로 직조하면 된다. 그 일을 굉장히 즐거워하고 있어서 그에게 시조 쓰기는 행복감 충족의 시간이다.
‘하지감자’는 노래 부른다. 감자밭 둔덕에 앉아 악보에 담지 못한 노래가 여기 있네, 라고 읊조린다. 어매의 어매로부터 그늘이 물든 소리요 내딛는 걸음걸음이 그냥 그대로 화음이던, 이라는 대목에서 즐겁게 농사일을 하던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것은 문자보다 음표보다 먼저 태어난 노래여서 아리랑 굽이굽이 일렁이는 마음이었고, 완창도 절창도 아닌 시작도 끝도 따로 없던 작업이었다. 그러면서 감자밭 감자두둑 알이 굵은 까닭이사 밭고랑 호미질에 노래가 얹힌 때문이라고 농요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호미질에 노래가 얹힌다는 것은 작업의 능률을 높이는 일이므로 그 노래를 들은 감자도 알이 튼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호미를 생각하다가 다른 이가 쓴 단시조 한 편이 떠올라서 소개한다. ‘호미’다. 몸을 낮추어야 속살 파헤쳐지는 것을 저렇듯 긴 이랑 땀방울로 적시기까지 쪼그려 앉은 그대로 뻗어나가야 하는 것을. 보다 시피 호미 자체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호미를 손에 쥔 한 농부의 작업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몸을 낮추고 쪼그려 앉아야 제대로 일할 수 있는 것이다.
김소해 시인은 ‘길의 순장’에서 아래와 같이 노래한다. 그 노인 뙈기밭 길과 한 몸이던 거기 기다리던 발소리 산으로 가셨으니 적막에 귀 열어놓고 길도 따라 길을 버린. 안타까이 우거지는 쇠뜨기며 패랭이며 조문이듯 위로이듯 순장을 덮어준다. 풍장도 마다않아서 산이 되는 비탈길. 이처럼 그의 시편은 절절하다. 다 말못할 슬픔과 아픔이 곡진히 배어 있다. 벼락처럼 피었다 벼락처럼 요란했다. 벼락꽃 이름 얻어 뫼 기슭 지킨 나무. 네 얼굴 소스라치게 핀다, 이 바닷가 이 언덕. 끝으로 그의 단시조 ‘배롱 꽃’을 읽으며, 어느새 잎이 무성해진 창밖 배롱나무를 바라본다.
이정환(시조 시인)
출처 : 대구일보(https://www.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