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오감에 감지된 것들이 다 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한 떨기 꽃이나 한 마리 곤충을 노래할 수도 있고, 거산의 장대함이나 광야의 광활함을 읊을 수도 있다.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뿐만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가공적인 상황도 시적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현실보다는 상상력에 더 의존하는 시인도 없지 않다.
나는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인의 시각을 지상적 시각, 천상적 시각, 그리고 수평적 시각으로 구분한 바 있다. 지상적 시각이란 현실적 가치관을 중요시한 리얼이즘의 시점, 천상적 시각이란 이상이나 내세적 가치관을 중요시한 비현실적인 시점, 수평적 시각이란 사물 자체의 순수한 존재를 중요시한 객관적 시점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의 원근(遠近)과 광협(廣狹)에 따라 시정의 깊이와 넓이를 구분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농사에도 몇 뙈기의 농토를 일구며 살아가는 소농인도 있고, 수만 평의 광활한 농장을 운영하는 대농장주도 있다. 상업 행위도 길가에 좌판을 깔고 하는 영세 상인도 있고, 바다에 상선을 띄우고 무역을 하는 거상도 있다. 물리학도 미세한 세계를 다루는 원자나 전자 물리학이 있는가 하면, 광활한 우주공간을 대상으로 한 천체물리학도 있지 않던가.
시업(詩業)도 세상의 업종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몇 평의 조그만 시밭을 가꾼 시인도 있고, 거상처럼 국제적인 활동을 하는 발넓은 시인도 있지 않던가. 또한 세상의 사소한 문제들에 매달려 고뇌하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호방한 세계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초탈한 시인도 없지 않다. 어떤 시세계가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지만, 아무래도 좁은 세상보다는 넓은 세상― 근시안적인 시야보다는 원시안적인 시야로 바라다보는 세계가 한결 시원해 보이고 호감이 간다.
호방한 시정을 지닌 몇 편의 작품을 함께 읽어 보고자 한다. 우선 세상에 잘 알려져 있는 이백(李白, 701~762)의 「오로봉시(五老峯詩)」를 보기로 하자
五老峯爲筆(오로봉위필) : 오로봉으로 붓을 삼고
靑天一丈紙(청천일장지) : 푸른 하늘 한 장 종이 삼아
三湘作硯池(삼상작연지) : 삼상의 물로 먹을 갈아
寫我腹中詩(사아복중시) : 내 뱃속에 담긴 시를 토하리
거대한 천지자연을 필기도구로 삼아 마음속의 시상을 펼쳐보겠다는 호탕한 시다. 이와 흡사한 시상을 지닌 남이((南怡, 1441~1468) 장군의 작품도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白頭山石磨刀盡(백두산석마도진) : 백두산의 돌 칼 가는데 다 쓰고
頭滿江水飮馬無(두만강수음마무) : 두만강의 물 말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남아이십미평국) : 사내 20세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후세수층대장부)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
이 시로 말미암아 역모의 누명을 쓰고 안타깝게 요절하게 되었다는 씁쓸한 일화를 남기고는 있지만 장부의 기개와 호연지기가 담긴 통쾌한 작품이다.
다음은 김소해(1947~ )의 시조 「기별이 닿는가」이다.
네 별에 여직 못 닿은 부음의 기별 있어
광년(光年)을 헤아리며 자박자박 가고 있다
저 혼자/ 걷는 길이라/ 목선처럼 더디다
화석으로 남은 편지 또 그리 긴 문장이다
문장에 인(燐) 불을 밝혀 낱낱이 읽을 동안
별똥별/ 아 그제서야/ 그 기별이 닿는가
사람이 죽으면 하늘에 올라 별이 된다고 한다. 혹은 하늘에 자기 별이 있어 죽으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하여튼 우리 조상들은 천상의 별들이 지상의 인간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이 시조의 내용은 육신을 떠난 지상의 영혼이 자신의 별을 찾아가는 얘기다. 별들이 얼마나 멀리 있는가?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금성까지가 5000만km, 북극성까지는 430광년(빛의 속도로 달려가도 430년이 소요됨), 어떤 별들은 수억 광년, 아니, 어떤 별에서 출발한 빛은 아직도 지상에 도달하지 않은 것도 있다고 하니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하고 별들이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아스라하기만 하다. 그러니 자신의 별이 멀리 있다면 그 별에까지 닿기 위해 빛의 속도로 달려간다 해도 목선처럼 느리고 느리게 느껴지리라.
지구의 나이도 만만찮다. 지질학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45억 년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37억 년 전에 생성된 화석을 발견하기도 한 모양이다. 그러니 지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도 또한 아스라하기만 하다.
위의 시는 무한한 우주공간과 유구한 지구의 역사를 대비시키면서 지상의 영혼이 천상의 별에 도달하는 신호가 별똥별일지 모른다고 적고 있다. 전통적인 시조의 정서를 벗어나서 통큰 스케일의 시상을 펼치고 있다.
다음은 졸시 「적요의 밤」이다.
적요의 밤/ 내 등이 가렵다/ 히말라야의 어느 설산에/ 눈사태가 나는가 보다//
적요의 밤/ 귀가 가렵다/ 남태평양의 어느 무인도에/ 거센 파도가 이는가 보다//
적요의 밤/ 잠이 오지 않는다/ 내 은하계의 어느 행성에/
오색의 운석들이 떨어지고 있나 보다//
적요의 밤/ 어디선가 밀려오는 향훈…/ 내가 떠나왔던 아득한 전생의 종루에서/
누군가 지금 종을 울리고 있나 보다
우주적 감각으로 써 본 작품이다. 우리 생명체는 전 우주적 요소들이 결집되어 이루어진 유기체다. 그래서 소우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작은 것은 큰 것의 축약이라고 보는 수지침(手指鍼)이나 이침(耳針)의 이론을 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원자와 태양계의 구조가 다르지 않음이 우연이 아니다. 생명체, 우리의 몸은 세계와 밀접한 상응의 기능을 지닌 존재다. 예민한 시인이라면 자신의 몸을 통해 지상의 사태는 물론이고 우주적 아니, 전세의 영역에까지도 스며드는 초월적인 감각을 지닐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우주적 시관을 앞의 작품들에서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고도 몇 구절에 담아 간결하게 드러내는 시인도 있다. 이성선의 「미시령 노을」을 보자.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았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생명은 참 신비로운 존재다. 우리의 몸이 담고 있는 DNA는 놀랍기만 하다. 우리의 몸은 시간적으로는 전 인류 조상들의 피가 응집되어 만들어졌고, 공간적으로는 수많은 요소들이 협동하여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몸은 전 우주적 요소를 품고 있다. 생명체는 곧 우주의 축약― 소우주라고 할 수 있다. 인간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다 그렇다.
이성선 시인은 하나의 나뭇잎에서 ‘우주성’을 감지한 것이다. 하나의 나뭇잎이 얼마나 먼길을 걸어서 여기까지 왔는가? 그 근원을 따지면 정말 아스라하기만 하다. 인간의 생명과 겨루어도 난형난제가 아닌가? 지금은 비록 생명을 다해 마른 잎으로 떨어져내릴지라도…. 이성선은 한 잎의 낙엽이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미시령 노을’을 배경으로 설정했다.
무엇을 쓸 것인가?
모든 작품을 초월적인 감각으로 쓸 수는 없지만 가끔은 우주적 시상으로 세속적인 때를 씻어내는 것도 괜찮지 않겠는가? 시의 호방성은 시인의 시야를 얼마나 넓고 멀리 갖느냐에 달린 것 같다. 시인의 통(桶)이 작고 좁은 것보다는 크고 넓은 것이 시원코 호탕해서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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