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호수 물빛 역사
파주에서 두 시간을 달려 호수의 세월 앞에 섰다
칼 빼어 들고 산하(山河)를 피물들이던 한 사내를 보느니
청동 빛 말탄 입상(立像)이 천년 역사로 굳었네
전장(戰場)을 누비던 맹주의 시야에 산그늘이 서리고
험준한 암석의 산골 높이에 다래넝쿨 엉켜서
치켜 든 말발굽에는 허허 창공이 휘졌긴다.
핏빛 하늘 아래 살육 된 목숨들은 물결로 출렁이고
천하를 다 삼키려던 제왕의 허공은 저리도 파란가
패장의 흙 묻은 칼날에 뜬구름이 짤린네
창끝에 높이 걸린 황금빛 권세도
초근목피 찰흙 묻힌 민초의 괭이자루도
목숨 빛 창연(蒼然)한 생이 이렇게도 공(空)하냐
마지막 목이 찔리던 피비린내 현장에서
제 목숨 하나 못 건진 산정호수 물은 맑은데
수하(手下)의 칼끝 피 한 점, 씻어주지 못했던가
제왕이여, 승승장구 용맹하던 장수여, 생애여-
쫓기던 하늘빛이 어떻든가, 그대에게 묻노니
천년이 사뭇 지났으니 말해보렴, 허사(虛事)여, 허사(虛史)-
궁예의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들고
귀가길, 휴전선 초병의 흙 묻은 군화를 보면서
내 피땀 뒤엉킨 길을 돌아보네, 옆자리 아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