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김 성 열
무덥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11층 아파트의 눈높이로 마주 대하는 앞산의 풍경이
가을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다. 가을은 어느 날 갑자기 성큼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오는 일로 보인다. 조석으로 내다보는 공원의 풍경은 어느 날 성큼
변화하는 것도 아니고 저돌적으로 좌충우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하루 천천히 느리게
변하고 있다. 사람들은 실제의 시간보다 몇 십 배는 더 빠르게 가을이 오는 모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인생의 가을 길에 들어선 나이는 귀가 멍멍하고 눈이 침침하여 쇼파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공원의 수목을 내려다보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여름에서 가을로 변하는 계절의 이동은 두부모 짜르듯 경계가 분명하게 오는 것이
아니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은근 슬쩍 오는 것이다. 입추가 지나고 나면 바람결이 살랑살랑
슬그머니 시원한 느낌을 주는데 바뿐 일상에 쫒기는 사람은 미처 알지도 못하게 은근한
변화를 보인다는 것이다.
가을이 걸어오는 모습을 슬로비디오 보듯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백태만상이다. 우선
하늘부터 다르다. 파란 하늘은 너무도 맑아 드높이 떠오르고, 아침 이슬로 씻은 듯 뽀얗게
떠다니는 구름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온 하늘의 넓은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하면서 몸짓과
표정과 눈빛 살빛으로 시 때 없이 변신을 계속하면서 유유자적 평화롭다, 가을의 구름
덩이는 덩치도 크고 펼쳐진 면적도 넓고 길다. 풀비로 찌익 그어 놓은 듯 점점으로
길다랗게 자국을 내어 놓기도 하고, 얇은 명주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아슬아슬 요원하게
하느적 거린 듯 보이기도 한다. 하늘 한 쪽에서는 또 다른 구름이 유별난 몸짓으로 자기
존재를 과시하면서 주목을 끈다. 해괴망칙한 괴물 형상을 짓다가 낮도깨비로 일그러진
표정에 뿔 달린 머리통을 내어 밀다가 졸지에 선녀로 변신하여 훨훨 하늘 저쪽으로
날아가기도 하며, 또 한 쪽에서 백발 삼천 척의 신선이 흰 도포자락을 너울거리며 날쌔게
날아가는 모습을 짓다가 신선과 천사가 다시 마주보고 천년 동안 때 묻지 않는 함박웃음을
껄껄 웃기도 하는 것이다. 맑고, 파랗고, 드높은 가을 하늘의 뜬 구름은 가늘고, 얇고,
섬세하여 멀리 보이기 때문에 고고하고, 애잔하고, 쓸쓸하고, 고독하다. 선뜻 다가갈 수
없어 그저 바라만 보는 가을 하늘의 구름 띠는 소슬한 가을바람을 솔솔 지상으로 내려
보낸다.
가을 하늘의 뜬 구름은 / 제멋대로 피었다가 이즈러진 것이 아니네 / 여러 마리의
백사 떼로 하늘에 찰싹 붙어 / 느린 몸짓으로 기어 다니네 / 가을 하늘의 파란 기운에
이끌려 / 높이 높이 붙어서 따라 다니네 / 여름의 교만을 뉘우친 가을 구름은 / 가늘게
휘어진 몸매로 / 아득하게 멀리 보이네 / 멀고, 파란 속뜻을 이제는 깨달은 듯 / 지엄한
해탈의 몸매로 하늘에 엎드려 있네 / 용서하소서! 용서하소서! / 참회의 눈물을 적시며
드멀리 보이는 / 가을 하늘의 높은 구름 / 감을감을 아슬한 슬픈 매력(졸작< 가을시편6>)
인생의 노년 같은 가을은 왜 쓸쓸하게 안겨오는 것일까.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이 자연의 생명력이 약동하는 봄을 지나 울울청청 신록이 넘실대는 여름을 지나 소슬한 바람결에
풀잎이 시들고 나뭇잎이 울긋불긋 각각의 색깔로 단풍이 물들어 가는 가을은 어찌하여
외로움을 더 타게 하는 것일까. 죽음을 예비한 절대한 고독감일까. 하늘이 너무 높고
파랗기 때문에 막막해서 그럴까. 바람이 으스스 소름끼치게 하는 을씨년스런 감각적
느낌 때문일까. 가을의 가을다운 여건은 고요하면서 서서히 감각적 느낌으로 오지만 하늘과
구름과 바람과 산천초목이 만들어 낸 고독감을 심화 시키는 역동성이 우리를 둘러싸기 때문
이리라.
하루가 다르게 변색되어가는 가을 산을 주의 깊게 찬찬이 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도
따라서 변한다. 노년의 신체 구석구석도 자연의 섭리인 양 갖가지 변화가 오고 변화를
감지하는 당사자는 쓸쓸하여 외로움을 많이 타게 된다. 머리카락이 세고 콧털이나 턱수염이
세고 겨드랑이나 은밀한 곳에도 가을의 단풍처럼 털이 센다. 자신의 몸이 단풍들어 급기야
서리까지 내려 맞으면 만추의 인생 가을을 실감하게 된다.
오곡백과가 탱탱하게 영글어가는 들판에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숙연한 느낌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한 알의 밀알이 삭아서 새 생명을 낳는 성경의 진리성이나
거역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육감으로 느끼기 때문일까. 곡식의 생육과정을 보살펴 온
농부의 순수 애정 같은 것일까. 대를 이어나가도록 점지한 신의 절대적 명령에 순송하는
것일까.내일을 예약하며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려한 고독감일까. 가을을 가을답게
받아드리는 것이 노년의 삶을 더욱 값지게 할 것이다. 가을에 대한 이런 저런 생각을
굴리면서 나의 “가을시편”은 창작 되었다. 언제나처럼 가을이 오면 나의 시를 읽으면서
가을 정취에 흠뿍 빠져보는 일이 즐겁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 눈높이로 마주 대하는 앞산의 나무들이 / 사분사분 가을 햇살을
모아 담고 있다 / 가을이 깊어 갈수록 나무들은 / 가을 맛을 더 심오하게 풍기면서 /
여러 색깔로 멋을 더하고 있다 / 자기산화(自己散化)의 몸짓으로 / 하늘나라에 몰입하는/
거룩한 모습이다 / 파란 소나무 잎은 가을의 방관자 / 아카시아, 싸리, 도토리 나무는
노란 색에 빠지고 / 기러기 발바닥 같은 단풍나무 잎은 / 비릿한 피 냄새로 뚝뚝 떨어져
고이고 / 온 산은 자유경쟁의 색깔 멋시장이 된다 / 더 가만히 보고 있으면 / 여러
색깔의 / 단풍 빛이 큰 소리로 일렁인다 / 세월, 세월 / 유수 같은 세월- / 잡히지 않는
이상한 그림자가 / 단풍 색깔의 가을바람에 실려 / 운명처럼 / 휙 휙 스쳐가고 있다.
(졸작“가을 시편11”)
나는 오늘 벼알이 영글어가는 들판의 농노를 걸었다. 드넓은 문발 들녘은 허허롭게
고요하고 숙연했다. 고개를 빳빳 처든 벼이삭도 고개를 숙인 조숙한 벼포기도 함께
석여서 가을 햇살을 충분히 받아드리고 있었다. 가을이 제 모습을 숙성시키는 신의
섭리를 보면서 들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논 가운데 허수아비로 세워 놓고 깊어가는
가을을 음미하였다. 계절의 가을도, 인생의 가을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함께 영글어가는
가을을 보았다.
나도 아내도 지금 한창 무르익은 가을 길에 들어서서 누구에게 떠밀린 듯 허허롭게
걸어가고 있음을 알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