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심층탐구/ 홍문표 문학 연구 3
에덴시인 홍문표
– 홍문표 에덴의 시학 3
이 영 지
1. 에덴시인의 명제
평생을 에덴시학으로 일관해온 홍문표 교수는 시에 있어서도 평생 에덴에 관한 시를 쓴다. 이러한 의미에서 홍문표 교수는 에덴시인이라는 명제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에덴시인은 시집 『십자가 십자가』시집를 통하여 십자가와 사랑을 등가성으로 사랑의 십자가를 알리려 함으로써 에덴시인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한다. 십자가의 선입관념적인 어렵고 괴로운 십자가의 삶을 오히려 역동적인 십자가의 삶으로 하는 행복한 춤추기의 시적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데에 이 논문의 의미가 있다.
2. 모더니즘적 서정의 에덴시인
삶과 시를 동일시한 에덴시인은 『십자가 십자가』시집에서 시 제목으로「배반의 십자가」「오판의 십자가」「죄인의 십자가」「어린양의 십자가」「영광의 십자가」「네거리의 십자가」로 십자가를 6회 반복한다. 바로 예수의 제자적 삶을 살려는 의지적인 시 덩어리로 하여 모더니즘적 에덴시인임을 천명한다. 더 나아가 에덴시인이 결정적 모더니즘적 서정 시인이 되게 하는 이유는 ‘십자가’와 ‘사랑한다는 것’을 등가성으로 하는데 있다. 기독교 시인에게는 십자가가 있어야 하고 이 십자가는 사랑한다는 것이어야 함을 들어내는『십자가 십자가』시집은 제 1부 제목조차 ‘십자가 십자가’로 십자가를 2회 리듬으로 하면서 성경이 지닌 황금비율 2회리듬에 합류한다. 시가 지니는 리듬이다.
여기에 이 시집의 대표적인 부분일 만큼 부제목으로도 여전히 십자가를 ‘십자가 일곱 마디’를 7회 반복리듬으로 하여 이 세계의 황금비율이자 신성수가 되는 가상칠언을 들어 사랑의 기독교로 하는 서정적 모더니즘 에덴시인이다. 일곱 마디의 마디마디 하나하나를 이어지게 하여 서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의 순서서열과 시어로 연결한다.
그 첫번째는「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일곱 마디 하나」이다.
믿었던 제자는
은 삼십에 스승을 팔고
수제자는 세 번이나 스승을 모른다 하고
백성들은 메시아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한다
비웃고
욕하고
채찍질하고
머리엔 가시관
생살엔 무쇠 대못
꽝꽝 내리친다
창으로는 옆구리를 찔러
생피를 뽑는다
그런데도 당신의 간절한 목소리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원수를 사하시고
십자가로 우리 목숨 살리시는 당신
당신은 정말 사람의 아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까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십자가 일곱 마디 하나」
일곱 마디 하나에서 주제시어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 시어는 십자가 일곱 마디 둘에로 이어진다. 그런데 예수님과 에덴시인의 차이는 예수님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하신다. 에덴시인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라 한다. 이 정반리듬은 “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시지만/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로 다시 정반리듬으로 그 의미가 확대되면서 십자가를 지신분과 에덴시인의 엄격한 차이를 사랑의 절대성으로 2회 리듬 화 한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예수님의 아버지를 향한 간곡한 절대 거절 할 수 없는 말씀과 인간 에덴시인의 현실 감각 “난 그리하지 못합니다”로 3회 정반리듬으로 한다.
그러기에 에덴시인은 인간본성으로 겸허히 엎드리며 원수를 사랑하시고 십자가로 우리 목숨 살리시는 당신에게 절절한 예수님 바라기 에덴시인이 된다. 예수님 바라기의 에덴시인은 십자가상에서의 죄인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라는 믿음을 향하여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예수님 말씀에 예수님 바라기 일곱째 마디 둘의 시를 탄생시킨다.
십자가는 저주의 길
죽음의 길이지만
회개하는 자에겐 영생의 길
당신과 함께라면
죄인도 낙원으로 가는 길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죄 값은 이마에 인을 치는 것
가슴에 빨간 주홍 글씨 매어 다는 것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문신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죽어서 낙원이 확실하다면
모진 십자가도 영광이겠지만
그러나 당신 없이는 갈 수 없는 길
죽어 가는 자가 죽어 가는 자를 살리는
당신의 놀라운 역설
당신의 거룩한 자비가
오늘도 태양처럼 눈이 부시네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십자가 일곱 마디 둘」
에덴시인은 일곱 마디 하나에서 둘로 서열 이어짐으로 하여 연작적 십자가 시어를 반복한다. 이 반복리듬은 십자가로 하여 그 분과 더불어 나도 낙원에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반복한다. 예수님 바라기의 에덴시인은 이 때문에 에덴 시를 쓰는 축복의 에덴시인이 되어 에덴시인의 시적 삶이 단연 예수님과 더불어 낙원에 들어가기까지 하는 기쁨의 무기가 된다. 십자가는 죽음의 십자가가 아니라 낙원에 들어가는 길이다. 감히 외람되게 하나님의 아들에게 다가가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 하소서” 하는 마음의 간절함을 호소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으며 비록 “가슴에 빨간 주홍 글씨 매어 다는 삶”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 한마디에 에덴 시인은 “당신의 거룩한 자비가 오늘도 태양처럼 눈이 부시네요” 에덴시로 한다. 태양리에 태어난 에덴시인의 시적인 삶이 우러나오는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내 이야기로 일관하는 에덴시인의 시는 엄마와 아들을 통한 시적 뛰어넘기이다. 에덴시인은「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십자가 일곱 마디 셋」으로 한다.
엄마
바다
엄마의 바다
그런데 엄마는 여자다
그러기에 당신의 엄마는 늘
여자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아들의 애절한 절규를 들으며
그 피 흘림의 발목을 잡고
할딱거리는 마지막 숨결을 지켜보는
엄마
바다
여자
성모 마리아
하늘도 울고
땅도 울고
바다도 울고
엄마도 울고
여자도 울고
아들도 울고
엄마
바다
엄마의 바다
그런데 엄마는 여자다
그러기에 당신의 엄마는
늘 여자다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 십자가 일곱 마디 셋
에덴시인은 ‘어머니’를 시에서 ‘어머니’도 아니고 ‘어머님’도 아닌 ‘엄마’로 한다. 에덴시인은 예수님과 예수님 엄마를 시적 동일시로 한다. 에덴시인은 “엄마”를 부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이 농축된 장면 서로 울며 바라보았을 울음의 장면을 시의 특징 은유로 한다. 울음이 노출되지 않으면서도 시의 특징 울음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와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시적 긴장이 에덴시인에게 다가와 사람인 에덴시인도 이러한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보편성의 처절한 몸부림을 시의 은유 등가성으로 한다. 이 아픔 나누기는 오히려 가벼운 날개를 달고 에덴시인을 향해 아픔을 나눌수록 가벼워지는 황금진리의 날개로 난다.
바로 사람 예수님의 울음「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십자가 일곱 마디 넷」이다.
육시에서 구시까지
하늘은 빛을 잃고
대지는 흑암의 발밑에서 떨었습니다
배신과 비웃음의 무지가
메시아를 못 박고
피도 눈물도 모두 삼켜버린
십자가의 모진 언덕
피도 마르고
눈물도 마르고
목숨도 마르고
죽음에서 주검으로 넘어가는
당신의 절망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애절한 외마디가
골고다 하늘을 갈가리 찢고
아버지의 가슴을 후벼대지만
아버지는 끝내 하늘에 계실 뿐
한번 뿐인 목숨은
아들에게도 하늘같은 것
그러나 아들이 죽어야 우리가 살고
아들이 죽어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
천길 벼랑으로 떨어지는
아들의 목숨이여
외마디여
측은함이여
저 아득한 외로움이여
-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 십자가 일곱 마디 넷」
물리적으로 이 지상에서 사람이 사라진다 해도 그리하여 내가 죽는다 해도 이 지상 자연의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에덴시인이 보아지는 육시에서 구시까지 하늘은 빛을 잃고 대지가 어두워진다. 이 자연현상을 에덴시인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와 동일리듬으로 한다. 이 2회 황금비율 사슬 리듬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이어진다. 에덴시인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우리가 살고 아들이 죽어야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처절하고 냉혹한 현실성을 에덴시인의 시로 한다. 시의 외연이다.
현실 수용이기도 한 시의 이 외연은 “내가 목마르다”이다. 지극히 인간 모습 그대로 에덴 시인이 절감하는 시의 리듬은 “목마르다니요”의 시어화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그 고난의 십자가를 비낄 수도 있는데
목마르다니요
죽은 자도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도 행하셨는데
목마르다니요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잔잔케 하셨는데
한 줄기 시원한 소낙비쯤
내리실 수도 있는데
목마르다니요
겨우 한 길 높이
마음만 먹으면 내려오실 수도 있는데
목마르다니요
피를 쏟고
물을 쏟고
남은 것은 마지막 죽음의 문턱
물 한 모금 축일 수 없는 땡 볕의 허공에서
사막처럼 타고 있는 육신의 외마디
“내가 목마르다”
내장까지 타버린 당신의 목쉰 절규가
지금도 내 골수를 후비고 있습니다
-「내가 목마르다
- 십자가 일곱 마디 다섯」
기독교 신앙 가운데서도 가장 우리 인간을 아껴주시는 분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로는 사람의 자아선택 부분이 있다. 에덴시인은 그대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그 고난의 십자가를 비낄 수도 있었다면서 그분이 하신 말씀 “목마르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