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오감도의 신화적 상징Ⅰ. 상징성오감도는 초월과 현실과 회복을 상징한다. 이러한 대 전제의 문제제기 오감도의 전체 상징도는 다음과 같다. 반복 관계 분리 통일상징 1호 ↔ 5호 9호 10호 11호 12호 13호 14호 15호 2호 ↔ 6호 3호 ↔ 7호 4호 ↔ 8호오감도의 상징은 시조의 원리와 같다. 바로 시조의 원리와 같은데 초장 1구와 중장 1구, 초장 2구와 중장 2구, 초장 3구와 중장 3구, 초장 4구와 중장 4구의 관계는 오감도의 1 · 2 · 3 · 4호 가 오감도의 5 · 5 · 7 · 8호 와 대립적 상징, 확대와 수축은 1 → 5/ 상승과 하향은 2 → 6/ 성과 속 3 → 7/ 피안과 일상 4 → 8과 초월과 일상의 관계와 같다. 시조의 종장 초구 원리와 같이 이상 시도 앞의 원칙을 합하면서 회복으로 나아가며 감탄 9호가 된다. 감탄 9/ 균형적 결합은 10 → 11 ← 12/ 불균형적 결합은 13 → ← 14/ 회복적 결합을 15호로 한다. 1. 초월적 상징시문학 연구라는 자연의 이치나 인간이 지켜야 할 도덕적 규법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정서적 등가물을 확인하는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오감도 시를 연구하는 것은 오감도 시제목의 구체적 표현을 통해 추상적 관념을 알아보는 것이어야 한다. 시에 있어서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시어이다. 오감도 내에서 시의 각 호마다 지니는 시어는 많다. 그러나 가장 구체적인시어는 명사시어가 되며 한 호안에 가장 단일한 시어로 되어 있는 것은 1호의 "아해", 2호의 “아버지”, 3호의 “사람”, 4호의 “환자가 있다. 이들은 시가 궁극적으로 문제 삼은 인간계시어가 많은 빈도수를 보인다는 것은 오감도의 상징 체제가 인간과 깊은 관련성으로 되어 있다는 보편성을 지닌다. 인간계시어의 빈도수는 그 특징이 오감도의 호별에서 골고루 분배되었다고까지 할 수 있다. 가장 많은 빈도수를 보이는 것은 “나”의시어 오세영, (op. cit., p. 135)도 이상의 시적 관심이 인간에게 있다 하였다. 여서 오감도는 “나”에 관한 상징적 내용들임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오감도 15편을 신화적 상징체계로 분류해보면 1호에서 4호까지는 초월적 상징성을 지니는 내용이고 5호에서 8호까지는 일상적 상징이며 그리고 9호에서 15호까지는 회복적 상징임을 알 수 있다. 우선 그 시어들을 나열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시어 회수 호 시어 회수 호 아해 26 1 상지(上肢) 4 8 아버지 18 2 나 4 9 사람 9 3 내 6 11 환자 100 4 내 6 13 나 3 5 내 11 14 너 5 6 나 30 15 나, 너 2 7
시인은 언제나 예언자와 같이 그리고 현실성을 뛰어 넘어서 피안의 세계에 숨겨진 본질을 투시하는 자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표현은 정상성에서가 아니라 일상성을 벗어난 것이다. 이것을 랭보는 모아이앙이라는 말로 썼다. 실세계의 물체들의 배후 그리고 그것들 너머에 존재하는 이상세계에 대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상징주의 시나 상징시에서 발견되어지는 일 홍문표, op. cit., 193 참조. 이다. 인간은 누구나 일회적이 아닌 반복적 상징성에서 참여하려는 의지를 지닌다. 시인은 이러한 보편성 곧 일상성이 아닌 세계에 대한 동경을 시에서 이루려는 표현을 한다. 따라서 시에서는 절대성을 지닌 초월적 상징이 있게 된다고 본다. 따라서 시에서는 절대성을 지닌 초월적 상징이 있게 된다고 본다. 때문에 1호에서 4호까지의 오감도에 나타난 중심시어인 "아해" “아버지” “싸움아니하는사람” 책임의사가 어떻게 나를 초월하는가를 신화비평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일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은 신화이다. 바로 하나님인 신이 그의 모습을 이 지상에 남겨두고 사라이 사역하면서 그의 일,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이 지상에서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하여 사람은 때로는 즐겁고 때로 슬픔을 감당하면서 그의 의지적이 신화를 써 나간다. 여기에 신화 비평적 관점이 이상시를 통해서 드러난다. (1). 아해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은 우선 “무서워하는아해”에서 “무서운아해”로 변신하여야 한다. 인간은 극도의 무서움이 되는 막다른 골목에서는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극도의 슬픔 속에서 다시 용기를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실제 1호에서는 분열 의식을 가진 “무서워하는아해”의 심리가 퇴행되는 상징성이 나타난다.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무섭다고그리오”의 “무서워하는아해”는 분열의식을 가진 아해라 할 수 있다. 이 위축심리를 가진 아해는 위축 심리의 반복 과정을 통해 위축 심리가 퇴행해 버리고 완전히 소멸되어 간다. “2나” 다음에 “1”로 퇴행하고 있는 숫자의 표시는 “1” 다음에 “0”의 차례가 오게 되어 있는 보편적 순서를 가진다. 이에 비하여 “무서운아해”는 “1”에서 “2”로 확대된다. 따라서 “무서워하는” 심리는 수동적이고 “무서운”의 개념은 능동적인 심리의 보편성을 원리로 하는 것이다. 1호의 “무서운아해”와 같이 인간의 존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도 그의 위대한 정신력으로 해결하는 특별한 존재다. 문덕수, op. cit., p. 20. 인간은 생각하는 머리를 가지고 있고 현대에 와서는 이를 주로 자아 James Hillman, The Myth of Anclysis (New York: Harper Ca Lophon Books, 1975)., p. 153. 라는 말로 표시한다. 가. 무서움을 퇴행시킨 아해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은 우선 “무서워하는아해”에서 “무서운아해”로 변신하여야 한다. 인간은 극도의 무서움이 되는 막다른 골목에서는 무서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는 인간이 극도의 슬픔 속에서 다시 용기를 갖게 되는 것과 같다. 실제 1호에서는 분열 의식을 가진 “무서워하는아해”의 심리가 퇴행되는 상징성이 나타난다.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무섭다고그리오”의 “무서워하는아해”는 분열의식을 가진 아해라 할 수 있다. 이 위축심리를 가진 아해는 위축 심리의 반복 과정을 통해 위축 심리가 퇴행해 버리고 완전히 소멸되어 간다. “2나” 다음에 “1”로 퇴행하고 있는 숫자의 표시는 “1 ” 다음에 “0”의 차례가 오게 되어 있는 보편적 순서를 가진다. 이에 비하여 “무서운아해”는 “1”에서 “2”로 확대된다. 따라서 “무서워하는” 심리는 수동적이고 “무서운”의 개념은 능동적인 심리의 보편성을 원리로 하는 것이다. 1호의 “무서운아해”와 같이 인간의 존재는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하여도 그의 위대한 정신력으로 해결하는 특별한 존재다. 문덕수, op. cit., p. 20. 인간은 생각하는 머리를 가지고 있고 현대에 와서는 이를 주로 자아 James Hillman, The Myth of Anclysis (New York: Harper Ca Lophon Books, 1975)., p. 153. 라는 말로 표시한다. 나. 통과의례의 아해① 길 떠남 "아해"가 어려움에 처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서워하는 심리를 퇴행시켜 버리고 정신을 집중시켜 무서운 아해 徐廷柱는 『현대의 현대시』 (서울: 일지사, 1973)., p. 211에서 “무서운아해”를 金九나 안重根같은 위대한 인물에 비교한다. 가 되는데 그 가치가 있다. 시의 첫 행은 그 시의 출발이요 시작이라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길 떠남을 상징한다.1호에서의 첫 행은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의 표현으로 출발하고 있어서 “질주”는 시작을 상징한다. 이러한 구조적 시의 특성은 이들 인간과 유기적인 관점에서 파악하려 할 때 통과 의례적 길 떠남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1호의 “무서워하는아해”의 "아해"는 허약한 체질을 상징하고 있음으로써 처음 길을 떠나는 "아해"가 신체 단련이나 생명 지속 내지는 혈연 지속성을 목적으로 한 것임을 암시한다. 우선 허약한 이미지가 되는 “무서워하는아해”의 길 떠남은 일차적으로 신체 단련을 위하여 “질주”라는 것을 상징한다. “무서움”으로만 일관되고 있는 길 떠날 때의 상황은 “1의아해”나 “2의아해”나 모두 똑 같은 두려움을 가진 "아해"이다. 또한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는 것은 혈연 지속 즉 생명체의 보존을 위한 길 떠남도 상징한다. 숫자의 지속성과 결합하면서 기필코 혈연 지속이 되어야 할 것을 암시한다. 시에서의 통과의례는 소설처럼 산문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대신 그 상징성으로서만 전체성이 역설될 수 있다. 1호의 첫 행과 괄호로 묶여진 1행은 똑같은 시적 구조가 시의 중간과 끝에서 동일상징으로 발견된다. 어려움을 통과하고 마침내 목적 달성에 이른 李光豊, 『현대小說의 원형적 연구』 (서울: 집문당, 1973)., 127~142. 다. ② 전이 1호에서 통일 구조를 보이고 있으면서 중간에 놓여 있는 것은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가그렇게뿐이모였오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오”의 표현이다. 이제까지는 표현되지 않던 “무서운아해”의의 출연은 길을 떠날 때의 무서워하는“ 약한 ”아해“와는 다른 전이(transition)의 상징이다. 회화적 추상성도 함께 결합되고 있는 전이상징의 주인공 ”아해“는 처음의 길 떠날 때의 어떤 속성도 지니지 않을뿐더러 어떤 새로운 상태도 예측할 수 없는 아주 큰 존재이다. ③ 목적 달성 1호의 끝연이 되는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의 표현은 처음의 길 떠날 때의 허약한 무서워하는아해“와는 다른 시련의 긴 여정을 무사히 통과 “무서워하는아해”에서 완전히 탈피한 “무서운아해”는 “막힌골목”이거나 “뚫린골목이라도적당”한 상황을 초월한다. “골목이라도”의 “도”는 또 다른 상항도 초월할 수 있음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아해"가 도로로 질주할 필요성이 없는 상징은 가장 기본적인 1호의 시적 구조에서도 유추된다. 1호에서 첫머리 하나의 긴 시행과 괄호는 먼 위치 긴 시행에 서로 상반되게 놓여 완전히 달라진 뒤바뀜의 구조가 처음과는 전연 다른 완전한 전이를 상징한다. 이것은 중간에의 긴 시행과 괄호가 목적 달성의 상징에 도움이 되는 중간의 통과 절차로서 놓인 시적 구조로서도 확인된다. 다. 집단의 무서운 힘 1호에서 표현되고 있는 “그중의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의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는 시적 긴장 관계가 되었다. 특히 “무섭다고그리오”와 “무서워하는”의 시적 외연으로 말미암아 공포의 분위기 이승훈, op. cit., p. 61. 로 이해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적 외연이 1호의 원관념이 될 수 없음은 “그중의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에서 암시된다. 공포의 분위기는 어느 한 사람이 해소할 수 없는 보편성을 지닌다. “2인의무서워하는아해”와 “1인의무서운아해”의 긴장관계는 곧 공포의 분위기를 벗어나는 시적 방법의 길이 됨을 상징한다. 그것은 “무서운아해”의 수가 집단적으로 늘어나서 “무서워하는” 공포의 분위기가 없어지는 관계에 있는 시적 암시성에서 확인된다. 이영지, “이상의 시 「오감도」의 연구” 『明知어문학』(서울: 明知대학교, 1984)., pp. 138~139의 도해참조. “무서워하는아해”의 수가 없어지는 반면에 “무서운아해”의 수가 무한으로 암시되면서 공포의 분위기는 해소되고 있는 것을 1호는 시적 압축으로 한다. 1호가 숫자의 순열을 절대화하는 것은 곧 숫자의 무한성이 영원성이나 초월을 상징한다.이는 문장구조의 조직과 연결되면서 공포의 분위기를 완전히 없앨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상징된다. 인간과 인간의 정신적 결합은 한 두 사람의 결합뿐만 아니라 두 대립된 세계가 하나로 통합되는 것까지 연쇄적으로 상징한다. 혈연체가 아닌 정신적 혈연체인 공동체의 결속이 과시할 수 있는 힘은 그야말로 “무서운”이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공포감 박철석, 『현대현대시인론』 (서울: 학문사, 1983)., p. 122. 을 없애주는 “무서운 힘”을 상징한다. 남을 해치는 정신은 뭉쳐질 수 없는 보편성을 지닌다. 잘못 생각하면 1호의 “무서운아해”는 시의 모호성으로 인하여 남을 해치는 “무서운” 힘을 가진 "아해"로 이해하기 쉽다. 이러한 해체의 특성은 어떠한 논리로도 1호의 상징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반면에 한 사람이 가지는 절망을 극복하고, 13인의 인간 또는 인류 집단의 수적 상징, 문덕수, op. cit., p. 261. 에서 비롯되는 많은 인원의 결속은 선의의 정신력으로 뭉쳐질 수 있다. 따라서 이는 정신적 혈연체의 혈맹을 상징한다. “무서워하는” 수동적인 두려움의 심리를 벗어나 오히려 무서움을 보이는 능동적인 무서움에의 도전은 무서워함의 절망을 벗어나는 신화적 구원의 방식이다. 이것은 프로이드류의 모든 대상을 환자의 심리와 연결시키는 관점과는 정반대이다. 오히려 1호의 집단적 정신력의 상징은 융의 논리인 풍부하게 하는 심상과 접맥된다고 할 수 있다. 우주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일 수도 있고 굴속일 수도 있다. 또는 별들이 무서운 속 도로 질주하는 공간 김우종, “이상론” (현대문학, 1957, 5)., p. 231 일수도 있다. 이는 "아해", 곧 인간과 그 대상물과의 관계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모든 조건에 대한 관계는 1호에서 “의”의 은유적 표현에 의하여 인간이 모든 타 조건들을 초월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 “의”는 "아해"가 원관념이다. 브록스의 말대로 은유는 시적 진리를 발견하고 계시하는 통찰력의 중심 기능이 집중되는 것이어서 1호의 “의”의 기능이 마치 만해의 “님의 침묵” “눈물의 구슬” “명상의 작은 배”와 같은 “의”의 기능이 초월적 상징과 관련되는 것과 같다. 라. 뚫린 골목을 만드는 아해 1호에서 표현되고 있는 “막다른골목” “뚫린골목”은 “아해가질주”하는 통로로 우주공간에 상징될 수 있다. 우주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일 수도 있고 굴속일 수도 있다. 또는 별들들이 무서운 속 도로 질주하는 공간 김우종, “이상론” (현대문학, 1957, 5)., p. 231 일수도 있다. 이는 "아해", 곧 인간과 그 대상물과의 관계이다. 인간과 인간과의 모든 조건에 대한 관계는 1호에서 “의”의 은유적 표현에 의하여 인간이 모든 타 조건들을 초월할 수 있음을 상징한다. 이 “의”는 "아해"가 원관념이다. 브록스의 말대로 은유는 시적 진리를 발견하고 계시하는 통찰력의 중심 기능이 집중되는 것이어서 1호의 “의”의 기능이 마치 만해의 “님의 침묵” “눈물의 구슬” “명상의 작은 배”와 같은 “의”의 기능이 초월적 상징과 관련되는 것과 같다. “제1의아해”의 “의”의 긴장성은 “막다른골목의아해” “뚫린골목의아해”와도 연관된다. 이은 곧 인간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진 “막다른골목”이라 도 인간에 의해서 “뚫린골목”을 만들 수 있고 또한 “뚫린골목”의 광활한 상황 앞에서도 인간은 그들의 영역을 지켜 감을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이 자연이나 환경 그리고 상황을 초월할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인 점을 상징한다. 특히 1호에서의 "아해"는 일생주기에 있어서 가장 어릴 때 “어린”과 “젊은”과 “적은”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甁歌와 1059, 源國원 532, 源佛 525, 請六 737, 源圭 582, 해樂 568, 源1 552 참조. 가 되고 있고 이는 4계 신화와 관련하여 “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숫자의 무한성과 결합하여 영원한 봄을 상징한다. (2). 아버지 가. 영원한 삶에 대한 자각의식 2호의 복합상징은 우선 “아버지가조을적에” “아버지가”되는데 있다. 이 “된다”의 의미개념은 “되지 않는다”를 반대 개념으로 하는 확실한 확립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내가 ..된다”고 하는 것은 자아의 확립이다. 2호에서 표현되고 있는 “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이어지는 연결성의 특징은 또 하나의 2호적 상징성이다. 또한 “아버지가조을적에” “아버지노릇”을 하는 것은 孝적인 상징성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범박한 상징성은 정신존재의 칭호에 있다. 이러한 복합상징은 각각 자아의 확립과 연결, 애, 신이라고 하는 전연 다른 관계로 놓이면서 동일성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아버지”의 2호적 상징성은 무한한 삶의 자각의식, 삶의 무한한 연결, 시대를 초월한 인간애, 신적 존재에 대한 것으로 구분된다. 2호에서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된다고 하는 것은 “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걱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된다”고 하는 것과는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 없다. 이의 생략으로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와 같은 입체적 문구가 되어 있은 것이 2호의 특징이다. 이들의 무한한 입체 조형으로 압축된 2호는 보편적 개념에서 야기되는 권위의식, 자아성취, 책임자의 뜻과 부합되면서 상승 구조적 시의 특성으로 인한 초월적 상징이다. 일차적으로 논의될 수 있는 “나의아버지가되고”는 “아버지가조을적에” 아버지가 되는 상징성이기 때문에 “아버지가조을지않을적에” 겪는 대립적 갈등이나 아버지자리를 빼앗는 심리 정귀영(중. op. cit., pp. 259~260)은 2호를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에 대한 질투가 始原에까지 확대되는 현상으로 보아서 시발점에서부터 제거하려 한다 하였다. 와는 다르다. 흔히 2호는 아버지와의 갈등이라고 논의되는데 갈등은 똑같은 등가적 관계에서 팽팽히 맞서는 긴장이라고 본다. 그러나 2호에서는 의미적 갈등이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조을적에나는”, 자연히 “아버지”이다. 이것은 변환자로서의 자기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변환자의 원형은 영웅 신화에서도 찾아지게 되는데 영웅 신화의 주기를 전개한 라딘 박사에 의하면 미성숙한 단계에서 특별한 계기를 겪음으로써 구원자로서의 자질을 갖는 특징을 지닌다고 한다. 이것은 이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으면서 가장 오래된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 영웅상이다. ①Maud oakes, " Where The Two Come To There Fathere," A Nauaho War Caremonial (Bollingen: New York, 1943) ② 죠센 헨더슨, “고대신화와 현대인”,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서울: 집문당, 1983)., p. 118 참조. 나는 “아버지”는 아니지만 “아버지”가 졸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담당할 수 없을 때 “나”는 “아버지”를 대신하여야 하는 나이다 아니면서도 동시에 변환자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버지”의 탄생이며 동시에 “나”의 발견이며 성숙이다. “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인데” 나의 “아버지”가 되는 “아버지”는 냉혹한 수학적 메카니즘으로 세계가 지배된다는 소위 기계론적 자연관을 생리적으로 거부한 金容雲은, “이상문학에 있어서의 數學” 『신동아』 (1973. 2)., p. 286. 또 하나의 새로운 “아버지“를 상징한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리로 오르는 것을 물리학적인 시간과는 달리 실존의 의식 깊은 곳에서 긴밀하게 통일된 존재구조를 발견한다.“아버지가조을적에” 나는 깨어 있어야 하는 점을 환기할 수 있는 것은 이상 시의 대립구조적 보편성의 성격에도 부합된다. “조을”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상징성이 되며 그 반대편에 생명이 있다. 이것은 망각의 극단에서 존재경험에 대한 체현體現을 의미한다.“조을적”에와 “깨어있을적”의 엄청난 차이는 곧 “나는나의아버지가되”는 원관념에 대한 보조 관념이다. 하나의시어는 그 개방적 의미의 노출 때문에 조심스럽게 의미를 절약하기보다는 의미의 충실을 기한다. 간접적인 언급, 그리고 문자 그대로의 뜻보다는 훨씬 넓고 보편적인 의미를 환기시킬 수 있는 의미와 충만을 가져온다. 비로소 시의 긴장언어가 되살아나는 것을 환기하게 되는 죽음과 삶의 상징성 “아버지가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는”표현은 한 사람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연적으로 삶의 자리를 획득하는다.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아버지”로 인하여 자연적인 생성의 자리가 되는 “아버지”의 자리는 삶의 의식이 있는 곳이다 .생명에 대한 자각은 삶의 논리나 목적의식을 초월한 오직 삶 그 자체를 깨달은 의지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자기 방어가 되는 김종은, “이상의 정신세계” 『문학비평의 방법과 실제』 이선영 편저 (서울: 동천사, 1980)., p. 345. 역동적 상상력이 된다. 일회적 인간의 견지에서 이것은 영원성을 띄는다. 삶의 세계를 배재한 무의미성이 아니라 유의미의 자각이다. 2호는 초현실주의 시 기법의 하나인 띄어쓰기가 아니 되어 있는 것과 시어의 결합으로 영원한 삶에의 상승의식이 작용된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의 한 자리와 “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의 또 한자리씩 뛰어오르는 자리는 아버지의 아버지가 죽어 있는 상황과는 다른 삶으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한다. 나. 삶의 무한한 연결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자각이 왜 과거로만 치닫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은 죽음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을 역설하는 것이 되며 이는 과거에로 소급하여 올라갔다가 다시 “살아야만” 하는 현재로 환원하는 데에 중요한 뜻이 있다. 2호에서는 시간이라는 추상성이 “아버지”라는 구체적 대상을 통해 무한히 연결되면서 살아있는 시간이 되어 가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는 우선 “아버지”의 보편적 개념에서 본다면 “아버지의아버지가” 되는 일은 아주 긴밀한 혈연관계의 연속이 된다. 이와 같은 표현의 무의식적 심상 세계는 평소 이상이 우리 삼남매는 모조리 아버지 공경할 줄 모르는 자식들임을 깨달은 이상, “妹像” 이상전집(3)., p. 136. 것과 연관된다. 혈연관계, 그것도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가 아니라 아버지만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결국은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연결되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가장 가까운 연결이 되면서 그 시간은 무한으로 한다. 일반적으로 강열한 혈통 의식과 그 혈통 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연대 의식의 부재라는 끈질긴 연관성을 2호는 표현하고 있는 것 문덕수, op. cit., p. 262. 로 인식된다. 결국은 혈연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역설적 시의 표현 방법으로 이해할 수 있는 2호는 인간의 조그만 거부의 사고와는 관계없이 혈연관계의 긴 역사가 오늘의 한 인간을 있게 하여준 것을 깨닫는 엄숙한 순간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존재의 전제가 되는 “아버지”의 자리로 소급하여 올라갈 수 있는 인간의 생물학적 연결이 단절되지 않음 송민호 외 『絶望은 技巧를 낳고』 (서울: 교학사, 1968)., p. 129. 을 강조한다. 생명체의 연결 상징은 2호에서 인간이 태어나고 또 다시 태어나는 연속적 보편성을 무시하고 한 인간이 계속 살아 있다는데 가장 이상 특유의 시적 표현이다. 한 사람인 “나”의 가장 중요한 인간의 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어서 강대해진 인간을 상징한다. 혈육관계의 끈질긴 지속은 영원의 끊어질 수 없는 살아 있는 것이어서 이러한 보편성을 2호는 “살아야”하는 현재형으로 나타내고 있다. 유독 한 시인만이 느끼는 이것은 심리적 시간으로 볼 때 특히 수직적 시간이다. 한 인간 “나”가 참여함으로써 찾아지는 시간은 또한 “나”의 원조를 되찾는 시간 정덕준, op. cit., pp. 90~91. 이어서 “아버지노릇”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하는 영원한 현재의 시간이다. 이는 한 인간이 시간의 통일성을 탐색해낸 혈연관계가 생생한 지속을 상징한다. 결국 “아버지”와 “나” 사이는 시간적으로 “아버지”가 더 많이 산 것이어서 “내”가 그 시간만큼 또 “나”와 “아버지의아버지”의 사이에 시간 길이만큼 살고 그리고 또 “나”와 “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만큼의 무한한 시간간격을 삶으로 채울 수 있는 시적 구체성과 추상적 관념 사이는 영원한 현재 속에 과거의 무한한 시간이 수용된 시간이다. 2호는 장난 같은 말의 남용 고은, 『현대시와 작품의 실제』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79)., p. 23. 인 듯싶은 “아버지” 되풀이로써 시간의 길이를 무한으로 확대하며 통시적으로 살아있는 “나”를 상징한다. 1호에서 신체적으로 삼단계의 통과 의례를 거쳐 강건해진 인간의 상징성은 2호에서 무한으로 힘이 강대해진 인간의 상징으로 구현된다. 도대체가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무한히 살아 있는 2호의 “나”는 초월적 상징의 존재라 할 수 있다. 다. 시대를 초월한 인간애 무한히 이 지상에서 살아 있게 된 인간의 상징성은 무한히 살아있는 삶의 정신이다. 이 삶의 정신은 당초에는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로 되는 시의 상징성이지만 차츰 소박한 개념에서 정신적 위대한 힘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을 환기한다. “살아야”하는 시의 표현처럼 몇 세대를 뛰어 오르도록 산 현재와 관련되는 산 정신은 역설적으로 원초적 인간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살아 있는 불변의 가치를 지닌다. “나”와 “아버지”와의 사이에 있는 산 정신은 갈등이나 분열이 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원형적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이 의미 개념이 “효”라면 한 단계 더 높은 것으로 원형적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시대를 초월한 인간애는 시대와는 관련 없이 “나”와 연결되며 “살아야”하는 가치이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여야 하는 동서고금의 순수한 인류애를 상징한다. 구체적으로 동양의 인간애적인 것이 인仁의 근본사상에 있다면 서양의 휴머니즘적 민주주의로 시대를 초월한 인류애라 할 수 있다. 2호는 가장 감각적인 느낌의 관계인 “나”와 “아버지” 사이를 삶과 연관시키는 구체적 표현을 통해 추상적 정신의 의미를 초월적인 상징으로 드러내고 있다. 2호의 “나”와 “아버지”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확대의 상징성으로 되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원관념을 지닌다. 천하의 모든 물건은 내 몸집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준 것이다. 만일에 남에게서 재물을 받았다고 하면 재물의 많고 적은 것이나 그 재물의 소중하고 하잘것없는 것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도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나에게 이 몸을 주셨으니 천하에 있는 모든 물건을 다 준다하여도 이 몸과 바꿀 수 없는 것이다. 天下之物 莫貴於吾身 而吾身 乃父母之소遺也 今有遺인以財物자 則隋基物多少輕重 而感之의爲票之栗淺焉 父母遺아(我)以身 而與天下之物 無以易此身矣 父母之恩 爲如何哉 豊敢자有身 以불盡孝 於父母乎 인能恒存此心 卽자有向親之誠 矣(擊蒙要訣, 事親장 <栗谷>). 라. 신적 존재 나의 존재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다. 나에게 이 몸이 소중한 만큼 남의 몸도 소중한 것의 산 정신은 어디에서도 보편적인 것이다. 또한 2호에서도 시적 구조에 의해 무한으로 확대된다. 2호의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을 분리하는 힘이 아니라 무섭게 하나로 뭉치는 힘은 1호의 다.의 힘의 상징성과 관련된다. 2호에서 “내”가 “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 된다고 하는 것은 궁극에 가서는 영원한 아버지, 무한한 아버지, 원초적인 아버지 또는 초월적인 아버지로서의 결국은 신적 존재가 되는 일과 같다. 이 수직적 형상의 현존해 있는 상징적 신의 이미지는 지고존재자 또는 창조자, 전능자의 영역이다. 아버지와 나와의 관계는 자연의 질서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2호에서와 같이 절대자리로까지 뛰어 오르는 것은 자연을 초월하는 상징성이다. 주어진 자연의 환경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것이다. 이 지배적인 자연을 떠나서 신이 되는 것은 존재의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우주관으로까지 확대하여 최고의 위치인 하늘에 오르는 4차원의 세계이다. 아버지는 자연의 흐름에 따라 소멸될 수밖에 없는 유한적 현존체인데 이를 2호에서와 같이 변화시켜 하늘의 상징성은 진정한 나를 찾아 사는 철인 김준섭, “존재론에 관한 연구” 『논문집』 제 21집 (서울: 학술원, 1982)., p. 24. 에 비유된다. (3). 싸움하지 않는 사람 가. 싸움에서 이긴 사람 3호에 표현된 문제의 제기는 “싸움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을하고싶거든”이다. 이것은 어떤 선입관이나 의미를 제거해버리고도 싸움에서 이기지 못한 경쟁 혹은 싸움의 의식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상징적 기능성은 “싸움하지아니하던, 아니하는, ..아니하는것”으로 연관되는 시저 표현에서 강조되고 있는 외면상의 행동을 연상한다. 이러한 두 가지의 상징성은 어떤 행동적인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싸움하지아니...던, 는, 는것”의 경우 추상적인 개념으로 상징되는 서여이나 성질로 유추되는 것은 사회성이나 종교적 의미로도 발전한다. 원만한 사람 혹은 종교적인 측면에서의 상징성은 3호의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의 표현과도 상통한다. 따라서 3호의 반복적 기능과 결합된 상징성은 싸움에서 이긴 사람, 지상에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 성스러운 세계, 가을의 신화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싸움”은 3호의 제재적 시어이다. 인간은 늘 싸움의 생활을 하고 있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길 것을 전제로 한다. 원래 삶의 정신구조는 인간이 싸움에서 이긴 것이다. 신화는 평화적인 축보다 전쟁으로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쉽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그 특징은 늘 다른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 때문이다. 생명은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다른 생물을 먹어야 하는 진리를 가진다. 다른 생물을 먹은 사람은 지상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고 있다. 참조: Joseph Campball, Myth to Live by (New York: The Viking Press, 1972)., p. 174. It is for obvious reason; For not only has conflict between group been norma to human experience, but there is also the cruel fact to be recognized that killing is precondition of all living whatsoever; life lives on life, eats life, and would otherwise not exist. To some This terrible necessity is fundamentally unaceptable, and such people have, at times, brought forth mythologies of a way to perpetual peace. 지상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경쟁, 살생을 거쳐 온 사람이다. 그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첫 조건부터 생존 경쟁에서 이긴 자가 되며 그런 다음에 인간의 정을 순화시켜 마음의 평정을 이룬다. 馬友蘭, 『중국철학사』, op. cit., p. 154. 영웅 신화에서 이야기되는 “싸움”은 주인공이 적보다는 항상 뛰어나서 늘 싸움에 이긴다. 살생을 거쳐 주인공의 편에 있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도와주는 영웅은 좋은 일만 하는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다. 견딜 수 없는 시대를 싸움하지 않고 사는 예수님 같은 사람은 싸움하지 않는 사람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를 완성한 사람이다. 이 상징성은 가.에서와 같은 영원한 삶에 대한 자각을 가진 자와 연관성을 지을 수 있다. 현대시의 논의 대상이 되는 애매성을 지닌 3호는 “싸움하는 것과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 “현재와 과거” “긍정과 부정”의 동일성을 노래한다고 보기도 한다. 두개의 균등한 대립적 관계로 인한 동일성이라고 지적되고 있는 경우 이는 반어성을 기본으로 하여 시제에만 초점을 맞출 때 현재와 과거의 동일성을 노래하는 셈이라고 연구되었다. 그리고 이 동일성은 무의미가 된다고 하였다. 이승훈, op. cit. 사실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이 지상에 존재할 수 없다.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아무와도 부딪치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신만이 할 수 있다. 신화비평적 관점의 싸움하지 아니하는 3호시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만큼 싸움하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지를 시험하는 시이기도 하다. 나. 지상에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람 3호의 주요 맥락이 인간에 대한 시적 표현임에 비추어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현재와 과거에도 동일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3호의 사람은 시대를 초월해서 존재하는 사람 그 자체의 동일성을 상징한다. 한편의 시는 구조로서만 파악될 것이 아니라, 통사적 흐름에 유의하여야 한다. 오감도의 어느 호에서나 거의 현재 혹은 현재완료형이 시의 통사적 구조로 놓인다. 3호도 예외는 아니어서 현재→ 과거, 현재→ 과거, 과거→ 현재, 현재→ 현재, 과거→ 현재→ 현재완료의 진행을 보인다. 그리고 또한 미래시제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동일성이 되는 원칙이 싸움하지 않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는 흐름을 본다. 이는 이상 자신의 존재 영속성을 띄는 중층 묘사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인 이매 모호성의 복합 상징이다. 이것은 동일 상징이다. 상징이 입체성을 지닐 때 그것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전체저이며 시어 하나하나의 의미보다 문맥 전체를 통한 보다 깊은 의미로 확대된다. 3호의 가장 특징인 점이 바로 인간만큼이나 복잡하고 애매한 특성을 시의 애매성으로 회화한데 있다. 이러한 입체적 상징은 진부하고 철학적인 용어대신 시인의 신념에 의하여 조절되고 정의되어지며 생기를 띄는 시성으로 살아나는 시의 특성과 부합된다. 홍문표, op. cit., ., p. 132, 208 참조. 시간적 동시성과 공간적 동시성이 같이 있는 시는 다른 순간에 있어서의 현실이 동일 화면에 같이 존재는 미의 회화적 입체성과 같은 것이다. 3호의 “싸움하는사람과”과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과의 시적 긴장관계는 영속성이라는 추상적 관념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3호에서와 같이 “싸움하는사람”의 “싸움하는”것은 가장 원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Albert Mordell, 조규동·김치수 역 『문예思潮』 The Erotic Motives in Literwfule (성과 문학) (서울: 선문사, 1949)., pp. 42~43. 면 성적 관계를 행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본능을 삼의 본능인 에로스와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로 대별하고 에로스를 성의 본능과 연결시키고 있다. 문학에서의 에로틱성은 가장 인간 삶의 진실성을 드러내주는 것이며 흥미의 대상이다. 김용직, 김치수, 『문예사조』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31)., p. 262. 성이란 생명과 성스러움과 신비와의 결합을 조장하여 주는 어떤 것이다. 우리 자신이 아닌 딴 어떤 것이 우리 자신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본질은 성의 본질이자 우리 자신의 존재의 본질이다. 이러한 관전에서 보면 시와 에로티시즘의 관계는 삶의 관계요 삶의 궁극적인 확대에 속한다. 문학에서의 초현실주의적 에로티시즘은 사랑에 대한 과감한 표현 Joseph Campbell, op. cit., p. 1. 을 통해 인간의 꿈 내용을 드러내는 것이다. 3호에서의 “싸움하는사람”과 “싸움하지아니하는”듯한 금욕적인 생활만이 크로즈업 된다. 그러면서도 이 지상에 인간이 존재하는 것을 “구경하였으면그만이다”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 존재의 영속성을 상징한다. 난삽한 성의 문학일 것 같은 3호가 사실은 존재의 영속성에 대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치는 신화적인 차원으로 환원한다. 그렇다면 성과 신화적인 관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 있으면서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삶으로 이어지는 삶의 무한한 영속이 되는 것에 있다. 이것은 지극히 현실적이고도 영원성이 된다. 다. 성스러운 세계 3호에서의 “싸움하는사람은즉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싸움하는사람은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었다의 표현은 한 사람의 양면성을 상징한다. 어떤 때는 “싸움하는사람”이었다가 또 어느 때는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인 인간의 양면성은 각각 보편성의 인간이다. 그러나 문맥의 전이적 관계는 “싸움하는사람”과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과 도치현상이 되면서 3호의 사람수는 세 사람으로 바뀌어진다. “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이싸움하는구경”의 표현에서 “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 하나와 “싸움하는”의 암시적 두 사람이 합하여 세 사람이다. 또한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싸움하는구경”하는 표현도 역시 세 사람의 사람을 암시한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분맥에서는 “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과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이 “싸움하지아니하는것”(사람)을 구경하는 것으로 세 사람의 구성이다. 한 인간은 두 개의 속성을 지닌다. 그러나 3호에서 과거에 “싸움하지아니하던” “사람”은 현재에도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으로 사람이 “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는” 것은 “그만이다”의 법칙인 이것은 “싸움하지아니하는것”을 원칙으로 하여 현재에 “싸움하는사람”을 “구경”만 함으로써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들의 정신적 혈연은 “싸움하지아니하는” 유익하고 나무랄 데 없는 비평의 영역이다. 정신적으로 조화를 이룩해 놓은 싸움하지 않는 세계는 성(聖)사회라 할 수 있다. 3호의 “싸움하지아니하던사람”과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과 “싸움하지아는것”을 “그만”으로 하는 사람들의 성스러운 정신은 3호의 다. 에서와 같은 폭넓은 인간애의 상징성과 연관된다. 어느 시대나 어디에서나 “싸움하지아니하는것”과 인간애는 인간들의 최후의 목적으로 삼는 이데아이다. 라. 가을의 신화 3호와 4호가 유일하게 연결될 수 있는 조건은 3호의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 모습이 4호의 “환자의용태”와 같은 동일회화성이다. 이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의 회화성은 인간의 노쇠한 모습이다. 프라이의 4계의 원형에서도 인간의 노쇠한 “싸움하지아니하는” 형상은 가을의 신화이다. 반면에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은 인간 성숙을 상징한다. 인간의 정신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신의 분별력이다. 행동 분야에서의 분별력이야말로 정신의 본질적 표지이며 이 능력이야말로 빛을 상징한다. 필립윌타이트, op. cit., p. 123. 인간성숙의 상징은 체질적으로 가을에 해당한다. 모든 곡식이 무르익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나 인간이 분별력 있는 성숙으로 인하여 어느 일에나 함부로 뛰어들지 않고 싸움하지아니하는 상태가 되는 것은 그 인간성의 완숙도를 다하는 때이다. 인간 성숙의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은 금욕적인 강한 정신의 소유자를 상징한다. 현대 시의 시어란 근본적으로 은유적 표현이므로 종국적으로 표현의 기능보다는 진실이 더 중요하다. 훌륭한 정의는 가능하면 진실을 가리는 “싸움하는”의시어를 밀어낸다. 자기를 이기는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은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은 극기의 인간상 정명환(op. cit., 42~43)은 불교적인 극기의 과정은 이상과는 무관하다 하였다. 이 “싸움하지않는” 가장 완벽한 정신의 소유자다. 융은 물론 프라톤도 정신의 상징으로 기술하였다. 결국 3호에서의 “싸움하지아니하는사람”은 “싸움하는사람”의 생활을 거쳐 “싸움하지아니는사람” 긴 일생을 살아 노년에 이른 사람이며 정신적으로 완숙되어 있는 사람이다. (4). 책임의사 가. 책임의사의 처방 4호의 표현되고 있는 사람은 “환자와 책임의사이다. 이 둘의 상관관계는 보편성으로 보아 책임의사가 “환자를 치료한다. 또한 4호는 숫자가 지속되고 있는 관계에 있어서 어떤 단결성을 보이고 있지 않다. 4호를 보면 거꾸로 된 숫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된 숫자가 “0.1”이다. 이것은 시어 책임의사와 관련하여 그의 기능이, 잘못 된 것을 바로 잡아 주는 것과 관련된다. 또한 책임의사는 인간이면서도 의술을 가지는 특별한 존재이다. 4호 전체에서 상징되는 유기적 관계는 책임의사의 처방, 지속성, 마음의 중심을 바로 잡아주는 책임의사, 상호의 영역이 책임의사의 상징성으로 논의될 수 있다. 4호에서 유일하게 표현되고 있는 인간은 “환자와 책임의사이다. 환자로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화적인 용어로 제신의 질투를 받지 않고 이 지상에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이다. 이와 연관된 책임의사는 또한 얼마나 큰 위력으로 “환자와 책임의사를 관련성으로 보는 것은 “진단 0.1”에서 유추된다. “진단”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은 “의사”가 되며 특히 거꾸로 도니 숫자가 바로 서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책임의사가 “환자를 완전하게 고친 것을 상징하고 있다고 보겠다. 따라서 거꾸로 된 숫자는 “환자가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환자의 “환자적 상태와 건강한 상태를 나타낸 시는 “진단 0.1”로 된 또 다른 이상 시에서도 동일 상징성이다. 조선의 建築(1932. 7월호)에 기재됨. “환자가 아닌 건강한 상태를 “0:1”의 비율로 상징하며 숫자가 바로 놓여 있다. 시의 동일 상징성이 되고 있는 “0.1”이나 “0:1”의 결과는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책임의사의 기능을 상징하는 것이 되며 이러한 기능을 가진 사람을 신화로 만드는 사람(Docter) V. S. Pritchett, The Myth Makers (London: Chatto & Windus Ltd, 1979)., p. 37. 다. 4호에서의 책임의사가 지니는 기능은 “환자의 비정상적 상태를 바로 하는데 있다. “진단 0.1”의 대립은 거꾸로 된 숫자 1일것이어서 이는 “환자의용태”와 같다고 할 것이다. 4호에서는 “진단 0.1"로 “환자의용태”가 건강하게 된 상태를 “진단 0.1”로 상징한다. 또한 좌우의 숫자도 “환자와 “환자가 아닌 상태를 상징하여 전후좌우모두 “환자의 용태”와 건강한 상태의 관계이다. 따라서 “진단 0.1”은 “환자의 건강한 상태를 상징한다. “환자의용태 1.0”과 책임의사의 “진단 0.1”의 관계는 좌우를 보면 거꾸로 된 숫자와 바로 된 수 0.1의 진단관계에서 책임의사의 절대적 상징에 대한 이해는 “의사”의 원형을 찾아보아야 한다. 의사의 원형은 그리이스 정신 아스크레피우스에서 찾아진다. 그는 황금빛 건강을 가져다주는 자여서 마법의 신비로움을 익히고 있다 하였다. Edith Hamilton, Mythology (Boston: Little, Brown Company, 1940)., p. 280. 또 psycho-pomp 라고 불리던 영혼의 지도자 그리이스의 신 헤르메스는 교차로에 서서 삶과 죽음의 사이를 중개하며 삶으로 이끌어 갔다고 한다. 특히 현대의 프랑스에서는 카드에 로마의 그리이스 의신 아스크레피우스의 상징인 뱀과 지팡이가 그려져 있고 이는 의사의 차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한다. 조셉 헨더슨 “고대신화와 현대인”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op. cit., p. 158. 이로 미루어 본다면 4호의 중간의 까만 점은 의사의 지팡이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한 인간의 병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그 병을 이기고 완치되는 것은 책임의사의 자신일수도 있다. 인간이 자기를 이기고 확인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상황에서 삶으로 바꾸는 초월자가 되는 순간이다. 이 사람은 이상자身 金鍾雲은 “이상과 이상과 異常” 『문학사상』(1973. 7., p. 249)에서 4호를 이상자신의 환자적 용태, 金丘庸은 “레몬에 도달한 길” 『한국문학』에서 이상자신의 자화상, 金龍雲(op. cit., p. 294)에서 이상자신이 최후의 판단을 내리는 자로 아무런 답이 나올 수 없다 하였다. 이며 책임의사는 인간으로 그 자신에 해당한다. 결국 삶과 죽음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이긴 “이상” 책임의사는 3호의 가.에서 싸움에서 이긴 사람의 상징성과 연관된다. 거꾸로 된 숫자의 4호를 거울에 비친 숫자라고 하는 것 金宇鐘, “Tabu 이상론'” 조선일보 (1957. 4. 29). 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4호를 거울에 비친 숫자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숫자가 대칭적 구조로 되어 있고 시어에서 <환자·책임의사>가 대립적 기능을 더한다. 만일 거울에 비친 숫자라면 “환자 및 책임의사와 그 밖에 “진단 0“1”도 거꾸로 나타나야 할 것이다. 이상 시에서 거울이 등장하는 예는 「거울」, 「명경」, 「오감도」 8, 10, 15호 등 몇편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상 시와 거울을 지나치게 연관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 거울에 대하여는 그 때 그 때 논의될 예정이다. 이런 점을 감안 한다면 4호는 회화성으로서의 둥근 형태의 거울을 상징하며 책임의사와 연결되면서 영원성을 상징한다. 병이 나은 상태의 영원한 인간은 일찍부터 현대인이 영원성의 표상으로 둥근 보름달을 보고 상상하던 것과 연결된다. 또한 거꾸로 된 숫자는 사람을 상징할 때만 거울에 발려 있는 “수은”과 연관되며 이에 대한 이해는 8호에서 작자가 의도적으로 “수은”과 “평면경”을 연관시켜 가고 있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나. 지속성 4호의 “환자의용태”가 회전의 법칙에 의하면 “0”의 상태가 되는 것을 오감도의 구조에서 살핀바 있다. 그런데도 “진단 0.1”이다. 이 “0.1”과 “진단 0.1”사이에는 이론상 모순과 괴리가 생긴다. 따라서 “0”과 “0.1”의 시적 혼란은 “진단 0.1”이 “0”으로 되어 있지 않고 “0.1”로 되어 있는 긴장관계가 문제점으로 제기된다. ““0”과 “0.1”에 대한 은유적 긴장 관계는 이상 시 4호가 과 같은 순환의 법칙에 있으면서도 수평적 ..의 수평적 지속성을 암시한다. 이것은 인간존재의 영원성에 대하여는 죽음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이상의 의도적 의지가 상징되고 있다. 숫자의 중층 묘사가 보여주는 수많은 회전성의 반복은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이며 이에 함께 결합하는 일회적 존재도 영원성으로 역설되어 인간의 지속성을 “0.1”로 표현한 결과에 이른다. 숫자 하나하나를 “환자로 생각할 수 있는 4호 원명수, “이상론” 『현대현대문학론』(서울: 일월서각, 1980)., p. 198. 는 숫자사으로 100명이다. 이를 다시 우리의 고유어로 고치면 모든 사람의 뜻이 되는 온(모든) 인류의 “환자의 용태”이다. 이는 온 인류의 멸망 위기가 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가장 큰 단절성에 대한 전제도 역시 4호를 신화적인 설명으로만 가능하게 한다. 온(숫자 100) 인류의 집단적인 이 “환자의용태”의 상징은 초능력적인 신비의 힘 아니고는 같은 날자에 “진단”하고 치유하며 서명 날인할 수 없는다. 이에 영웅적인 “의사”의 힘이 요청되며 이에 응하여 그는 초월적인 상징의 힘으로 삶의 힘으로 삶의 혈연들을 치유하여 간다. 그것은 4호가 늙고 병든 인간들을 신통기의 과정을 거쳐서 죽지 않게 만들어 놓는 신화구조에 해당한다. G. S. Kirk, Myth (Cambridge: The University Press, 1978)., p. 205. 인간이 병들어 있는 상태의 4호를 그 숫자 100명이기에 온 인류가 병들었다고 보는 관점에서 모든 사람을 “0.1"로 “진단”한 4호의 책임의사는 신적 존재와 같다. 이때의 “0.1”의 상징은 “진단 0.1”의 의미보다는 삶으로 만든 지속의 의미비중이 더 크다. 4호가 신체의 기관이 억망이 되어버린 경우 박철석, op. cit., p. 129. 라면 이를 치유한 책임의사의 힘은 이에 반비례한다. 온 인류의 육체가 병든, “환자의용태”를 고쳐놓은 “1”의 상징성은 생명력의 본질적인 원형을 강조한 결과이다. 바로 한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삶의 이치는 온 인류의 법칙에도 적용된다. “0”과 “0.1”의 상징적 관계는 3호의 “싸움하지아니하는” 인간들의 상징과 연관된다. “싸움하는사람”들의 행위로 인하여 인간이 이 지상에서 영원히 있는 것은 곧 4호의 “0”이 “0”으로 끝나지 않고 “1”로 이어지는 발전적 상징성과 결합한다. 이는 “zero of symbolic value”가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발전의 개념임을 뜻한다. 다.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책임의사 4호의 가장 많은 쟁점은 병든 사회나 병든 정신으로 보려한다. 숫자의 도치는 절망의 진단서 임종국, “이상의 生涯와 예술” 『이상 시집』 (서울: 정음사, 1973)., p. 169. ”이며 일체의 가치가 전도한 양상 Idem, '이상문학의 본질” 『이상전집』 (서울: 문성사, 1966)., p. 434. 이며 이상과 그 시대가 병들어 있는 것 김춘수, “이상의 죽음” 『사상계』 (1956. 7)., p. 286. 을 통시에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의 외연적 파악의 반대편에는 내포가 있는 것이 시다. 곧 바로 된 숫자가 암시하는 중심을 잡아주는 자의 상징이다. 숫자 하나가 0.1로 바로 놓여진 것과는 달리 많은 숫자의 거꾸로 된 4호의 외연적 상황은 보통 개념과는 거꾸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4호가 의미의 거부를 뜻하는 표현, 정귀영, “이상과 현대문학” 『한국문학』 (1976. 8)., p. 299. 현실적 의미의 거세를 뜻하는 것, 라종인(op. cit., p. 369). 인간의 처절한 고독을 알고 있는 이상 김현, “이상에 나타난 만남의 문제” 『자由문학』 (1962)., p. 248. 으로 상징되게 한다. 외연상으로는 4호의 숫자적 표현은 병들고 부패하고 절망한 상태를 상징한다. 그러나 바로된 숫자 “0.1”은 이와는 다른 것을 상징한다. 사실은 숫자만의 이유로 4호전체가 현대의 부조리를 상징하고 있다 최현, 『현대시 10강』 (서울: 성문각, 1968)., p. 210. 고 본다면 역시 4호의 숫자 하나하나는 합쳐서 100이 된 것은 100을 우리 고유어로 바꾼다면 “온” 세상이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나 바로 된 숫자 0.1로 하여 이를 바로 잡는 한 사람으로 상징된다. 온 세상이 거꾸로 되어 있다는 충격적 시의 비유는 이에 대한 반응으로 절대적인 치유에 대한 시가 되게 한다. 시는 structure와 texture를 가진다. 시의 구조가 진정으로 의의가 있고, 시적이 되는 것은 그 시의 진행에 따라 나타나는 구조의 복잡성과 특수성을 지나갈 때이다. 홍문표, op. cit., p. 178~183 참조. . 회전성을 보이는 4호의 숫자와 시가 지니는 기승전결의 결에 해당하는 “0.1”은 거꾸로 된 병든 정신이 바로 놓여 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책임의사에 의한 것으로 된다. 이 4호의 시적 상징은 무격의 사회적 기능이 재화의 예방과 온갖 질병의 예방과 치료로 인한 행복 선지先知적 축술성에 있다. 박성의, 『현대문학배경연구』上 (서울: 이우출판사, 1978)., p. 272. 4호의 숫자가 순전順轉만으로 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역전만으로 되어 있지 않는 것은 4호의 책임의사의 상징성과 관련하여 마음의 중심을 바로 잡는 일이 일어난다. 바로 잡는 일은 천개天開와 지벽地霹중의 인입인생人立人生이며 천지간의 인이 되며 상과 하의 가운데인 중中이 되는 것이며, 정신과 육체가운데의 기운이며, 왕과 왕 중에 왕이 된다. 구본혁(op. cit., p. 108)은 上中下 1貴(王), 天인地 上中下 連基中謂之王, 1貴3爲王이라 하였다.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여 인간의 생명과 동정의 조화를 주제한다. 결국 몸 안에 모신 하나님의 뜻을 잊지 말고, 수심정기修心正氣하여 살아야 하는 것이다. 『동양사상자료집』 1, 현대학문헌연구소편 (서울: 아세아문화사, 1979)., pp. 11~18. 잘못되고 병들어 있는 온갖 정신이나 사회를 바로 잡아주는 책임의사의 상징성은 3호의 ‘다’에서와 같은 “싸움하지아니하는” 정신력의 소유자가 구현하는 성聖사회 상징성과 연관된다. 라. 의술의 영역 4호는 숫자적 4각형이다. 이 객관적 상관물로 놓이는 4각형은 인간을 지칭하는 환자나 책임의사와는 냉정한 눈으로 바라볼 때 어떠한 유기적 유추도 불가능해진다. 특히 인간이 자연세계에서 발견해 내는 것 중 어느 것도 4각형의 모습을 지닌 것은 없다. 인간이 시각적 공간을 초월하여 시도하여 앤 4각형의 도해는 시각 체계가 아닌 정신의 세계 곧 내면적인 사유의 세계에서 파악되어지는 4차원의 심리적 세계이다. 시각적으로 든 공간적으로 든 완전히 독립된 이 4각형은 감각적 체험에 의한 인간의 창조성이다. 이것은 회화시의 특징이다. Arnold Hauser,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근세편 상, 백낙청』·박성환 공역(서울: 창작과 비평사, 1983)., p. 17 참조. 자연주의적인 형태를 완전히 재창조하고 새로이 고양된 이미지로서의 회화성을 지닌 4호는 “환자와 책임의사의 시적 언어의 상징성과 결합하여 인간이 자연적인 삶에 도전하는 암시성으로 전환된다. 의술의 힘은 인간의 생명을 연장해 주는 마력이다. 4호의 “환자의용태”처럼 자연적으로 오는 자연의 모습, 그것도 거의 부동적 상징이 되고 있는 상태를 의술은 이에 도전하려 한다. 4호에서의 책임의사는 실제 병원에서 인간이 회복되어 가는 경우와는 다른 훨씬 높은 초월적 기능이 발휘된 것으로 지금까지 논술한 바 있다. 이것은 인간의 힘과는 다른 꿈의 세계와 연관된다. 네 가지의 기능적 회화의 네 개의 기점을 상징하는 4면체라고도 할 수 있는 4호의 숫자적 4각형은 기독교에서 논의되는 4위인 성부. 성子, 성신, 성모와 같은 가장 원형적인 상징성과도 부합된다. 마리 루지제 폰프란츠, “자기의 사회적 측면”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op. cit. ,p. 234. 4면체는 꿈 내용의 배열에서 찾아지는 것이어서 가장 완전한 것의 상징성이다. 기하학적 공간의 수학화라고 할 수 있는 4호의 4면체는 부분과 전체의 모순성이 없는 질서에 의하여 총체성을 상징한다. “환자가 된 것은 자의적일 없는 관계에서 의사적 기능의 특별한 의미에 의하여 결합하면서 극도로 발달한 인간의 능력인 초절성이 상징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된 내용에 대한 타당성 여부는 상징주의적 시론의 경우 초월적 상징시가 있다. 이 경우의 구체적 이미지는 시인 개인의 내면에 있는 특수한 이념이나 감각의 상징(개인적인 상징)이 아니라 광대한 보편적 이상주의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현실세계를 뛰어 넘어서 피안세계에 숨겨진 본질을 투시하는 자는 시의 화자이다. 현대시는 대부분이 처음의 시작에 가장 높은 세계, 혹은 바람직한 상징성으로 채워지고 있다. 이 근본적인 보편성에 맞게 이상 시는 처음이 초월을 나타내는바 인간의 꿈과 관련된다. 인간이 바라는 꿈의 세계는 늘 푸르고 늘 멋있고 그리고 늘 자유스럽다. 이 꿈꾸기는 인류를 행복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몫이기도 하다. 2. 일상적 상징(1). 낙상한 아我 현대시의 주된 경향이 일상적인 언어를 통하여 일상적인 삶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때 그것은 낭만주의적 사고가 아니라 리얼리즘의 사과의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강한 현실적인 일이다. 일상은 초월적인 것이거나 구원적인 것이 아니라 동물적이고 파괴적이고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방황하여야 하는 비극이다. 그러나 허무와 좌절 속에서 상실된 자아를 인식하고 세속의 욕망에서 번민하고 갈등하는 일상이야말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일 수 있다. 이러한 현대인의 특성이 5 · 5 · 7 · 8호 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네 호들이 상오 간에 연결되는 특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들은 <일지, 일년, 일봉가신 → 일축철필, 일장백지, 익일>이다. 1회성을 암시하는 이들 시어는 일회적 인간의 상징과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5 · 5 · 7 · 8호 의 특성은 일회적 상징으로 유추된다. 또한 일상적 상징 내지 일회적 상징은 회전성을 보이지 않는 점에서도 유추된다. 그리고 이러한 일상적 상징이 5호에서는 “아我”, 6호에서는 “앵무”, 7호에서는 “현화”, 8호는 “시험담임인”으로 대표된다. 5호에서 표현되고 있는 유일한 구체적 시어는 “낙상”과 “흔적”과 “4각형”과 “거꾸로 된 화살표”로 구분 이들은 “반외소형畔矮小形의신”과 관계를 가진다. “아전낙상”은 “아我”의 시어가 있음으로써 자아의 상실이다. “흔적”은 인간존재를 그 회화성으로 숨을 곳을 찾는다. 화살표로 밝은 빛을 거부한 “아我”로 “신의안전에낙상”, 흔적을 위한 노력, 아我가 숨는 곳, 순환성을 거부하는 아(我)의 상징으로 구분한다. 가. 신의 눈앞에 낙상 오감도는 호와 호끼리 긴밀한 연관이 되어 있는데 4호의 숫자적 대비구조가 5호에서는 시어 “아我”와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으로 나타난다. 5호에서의 “아我”는 그 대응적 시언 “여”가 표현되어 있지 않고 또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이 그 대립적 시어인 ‘..대형의신’이 아니라 “아아我”와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과 대칭을 이룬다. 가장 현대인다운 상징성은 지적인 것이다. 신적인 대상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에 비하면 자아를 상실한 인간이다. 5호의 “아我”는 자아를 상실한 인간은 소멸될 존재이다. 5호에 표현된 “전후좌우”의 시어가 동서남북을 차지한 존재라면 “전후좌우를제하는” 시어휘는 존재의 소멸이미지이기 때문이다. 이 소멸될 존재는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인 “신”인 상징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자아의 상실이 야기된다. 이 자아 상실 정도는 “아我”의 대상인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의안전”에 “낙상한”것으로 극대화된다. 이는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과는 반대가 된 회화적 형상이다. 보편적으로 “낙상”은 넘어지고 상처가 나는 여성이미지에 해당한다. 그런데도 시에서 남성을 지칭한다. 또 4각형이 새로로 놓인 것과 반대로 가로로 놓인 시의 “아전낙상”한 이미지와 동일상징성이다. 따라서 자아 상실이란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어지지 않고 거꾸로 된 것임을 5호는 원관념으로 한다. 이러한 “아전낙상"의 모습은 마치 “침수된축사”에 비유되고, 인간의 오장육부와 “구별될수있을는가”와 같은 것에 비유된다. 이러한 구체적 표현은 장부 즉 “장부”로 된 것은 인간의 특징인 사고를 배재해버린 가장 동물적인 인간을 상징한다. 가장 동물적인 인간이라면 마치 어느 경우에도 순화될 수 없는 오물 투성이가 된 인간 문덕수, op. cit., p. 265. 이다. 오감도의 기저 구조는 대립적으로 균등한 의미에서 출발하는 것이 특징인데 5호 역시 “아아我”와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과 대등할 수 있는, 즉 신적일수 있는 가능성에서 다시 가장 동물적인 모습으로 변모해가는 비극을 상징 노드럽 프라이는 인간의 타락상을 시작의 신화라하였다. : “문학과 신화” 『문학과 신화』 김병욱 편역 (서울: 대람, 1981)., 23 참조. 한다. 신일수도 있는 인간의 위대성은 “목대불서” “목대불도”의 인용구에서 나타나고 있으나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을 수 없고 큰 눈을 가지고도 볼 수가 없는 아주 작은 “아(我)”로 표현된다. 신적 체구에서 신적이 아닌 상태가 되는 것은 큰 꿈과 높은 안목이 중단된 상태에 있는 극도의 자아 상실자이다. 또한 “낙상한고사”의 원관념은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의 대상인 “아아我”가 됨으로써 대상을 위한 지극한 희생을 상징한다. 나. 흔적을 위하여 노력하는 나 아我 5호의 표현된 “전후좌우”의 흔적이미지와 “흔적을제하고”의 “흔적” 소멸이미지와 “유일의흔적”으로 표현된 “흔적”을 남기는 이미지의 관계는 “흔적”의 삼중적 입체묘사 방위개념과 생명과의 연관성이 되어 있는 이상 시는 「벽에관한각서六」이 있다. 이다. “전후좌우”와 “흔적을제하는”의 대립적 구조는 결국 “유일의흔적”의 통사적 어휘와 결합되면서 5호의 시적 내포가 “전후좌우”를 제외한 흔적 남기기의 “흔적”임을 암시한다. “흔적”이 존재의 표시라고 할 때 본문을 통하여 표현되는 존재는 “아(我)”와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이다.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의 대응적 대상으로 5호에서 구체화된다. “반외소형胖矮小形의신”은 살찐 쪼그만 신이라는 함의와 시어 “침수된축사”가 결합하여 물의 여신이미지다. 여신은 일반적으로 물이 원형 상징에서 여성을 뜻함 Edith Hamilton, op. cit., p. 38~39, 과 같다. “흔적”의 삼중적 묘사는 또다시 존재의 흔적이 드러나고 소멸되고 다시 드러나는 통사 구조적 순서에 따라 차츰 어떤 행위 뒤의 “흔적”임을 환기시켜 준다. 전연 상반된 두개의 이질성적 상태의 개념이 합쳐져서 된 “흔적”이라면 창조주가 그의 창조물을 영원히 지상에 남겨두기 위한 행동 윤재홍, 『현대문학의 해석학적 연구』 (서울: 일지사, 1976)., p. 37. 을 한 어떤 “흔적”이다. 존재의 “흔적”을 위한 호의 주제와 관련하여 역설적 사유를 한다. 리챠즈는 내포하는 시만이 훌륭한 시이며 거기에 아이러니가 존재한다고 말한 바와 같이 5호의 외연적 인용구는 인간의 “흔적”을 위한 행위에 대한 불가항력적 주제에 맞추어지는 시적 내포를 역설한 참고; 오세영, “역설의 시어” 『논문집』제1권 제1호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74)., p. 78~79. 다. 물이 없는 곳에서 최초의 남자는 그가 감추어 둔 물을 만들고 그 후 그 남성은 그 늪이 많은 곳에서 그의 잠자리를 취하는 가장 원형적 인간 Raymond Vanove, Sun songs (New York: A Mntor Book, 1980)., p. 128 참조. 이다. 신적 남성 날개는 4각형 속으로 들어가 눈이 커도 잘 보이지 않는 회화성 “목대불도”로 이어진다. “흔적”의 상대는 “아(我)”가 마치 “침수된축사와구별”이 되지 않는 곳에 머문다. “흔적”은 4호의 ‘나’에서 “0.1”이 나타내는 인간의 상징과 연관 지을 수 있고 또 4호의 “전후좌우를제하고”도 유일하게 남는 까만점이 되는 시의 외연과도 연관된다. 다. 내我가 숨는 곳 절대의 피신처를 찾아 인간은 그의 몸을 보전하고 해를 멀리하기 위하여 굴속으로 숨는다. 폐쇄된 밀실에서도 인간은 흔적을 남기기 위해 숨을 쉬며 빛을 찾아 움직인다. 특히 어둠의 밀실에서는 탈출을 기도한다. 5호의 4각형은 모서리들이 모두 떨어져 있다. 4각형 속에서 인간이 그의 몸을 지켜나가면서 숨 쉬고 있다. 사면의 벽에 부딪히는 폐쇄된 시대성 오세영, 『한국현대시의 두 세계』 op. cit ., p. 356. 속에서도 빛을 찾아 절대의 안정 장소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비록 내부로만 향하는 4각형과 같은 구속 속에 유폐된 것과 다름없는 절망을 가진 인간 구연부, 『현대시의 考理學적 연구』 (서울: 시문학사, 1979)., p. 24~25. 이라 할지라도 장자의 산목(山木))편의 본래 뜻처럼 해를 멀리하는 처세법으로서의 절대 장소는 4각형이어야 한다. 4각형의 화살표 두개는 각각 분리된 상태를 상징한다. 인간만이 가지는 이상을 숨긴 채 밑으로 밑으로만 숨는 하향성은 비극적인 현대인의 상징이 되기에 충족하다. 피로하여 지친 상태로 숨어서 참고 지내야 하는 곳은 잃어버린 천국의 의미가 될 수도 있다. 이럴 때 시인의 언어는 기호화하는 것 이기라, 『한국 현대 시의식연구』 (서울: 고대민족문화연구고, 1984)., p. 58 이다. 그러나 인간 몸속에 있는 “장부”는 인간 스스로 침잠하여 휴식하고 있는 심리 상태지만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며 살아간다. 4각형의 화살표는 4각형 속에 있기에 일상성에서 잘 노출되지 않는 은폐의 곳을 지시한다. 절대의 휴식처는 오래 참고 기다리는 피 지배자의 은신처이다. 이러한 장소는 적응의 의미가 되기도 하는 곳으로 이상은 적응의 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패자는 생존권을 잃고 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패자는 패자로서의 생존과정을 형성해가고 있는 중이다. ..전이, 변형 ..말하자면 어느 민족이 滅失, 滅小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것들은 적응의 원리에 의해 변형. 전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상, “생물의 스포트” 『문학사상』 (1976. 4)., p. 258; 문학사상연구室이 새로 찾은 아포리즘 13편 중에서. 생물의 적응원리는 외부적으로 보기에는 멸망이나 소멸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상태에 적응하면서 지내고 있다. 인간의 정신력은 4호의 ‘다’에서와 같이 커다란 정신력으로 죽음과 같은 긴 휴식의 장소에 머물러야 한다. 5호와 4호의 연관성은 정신적 힘의 벨런스를 의미하는 상반된 관계가 되고 또 이것은 초월 상징과 일상의 상징에서 후자의 장소가 비록 불안과 인간의 고독과 소외의 상태지만 견디어 낸다. 이 장소는 장자의 이마를 스치고 밤나무 숲 속으로 날아간 산목편의 이야기와 관련지을 수 있다. 장자가 말 하였던 “나는 주릉에서 내 몸을 잃었으며 까치가 내 이마를 스치므로 밤나무 동산으로 들어가니 내 천성을 잊었으며 밤나무 동산의 산지기는 밤도둑이라고 나를 욕하였던 까닭으로 그 일을 뉘우치고 오랫동안 뜰에 나오지 않았던 장소 장주는 역호주릉지걸하여 도일이작하니 자남방래자라 익광칠척에 목대운촌이라. 감주지류이집어율림이라..금에 오유어주릉이망오신이라 이작은 감오류하고 유어율림이망진하고 율림처인은 이오위작라니 오소이불정야라.(장자의 산목편). 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이러한 장자의 산목편 이야기는 일명 여자의 유혹에 빠진 이야기로도 비유되기도 하고 삶의 한 방편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다른 곳에 눈 돌렸을 때 벌어지는 삶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우리의 삶에서 살아가는 일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다. 라. 순환성을 거부하는 나 아我 5호에서 “장부라는것은침수된축사”의 표현은 남성 이미지와 여성이미지가 입체적으로 반복되어 중층묘사가 되었다. 물은 여성이미지인데도 “장부”의 이미지 속에 복합되어 있고 “장부”는 남성의미인데도 “침수된축사”의 여성이미지와의 결합성이다. 이 둘의 통합성은 담겨진 물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구현한다. 동시에 4각형의 도해와 함께 어두운 곳의 추상적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일반적으로 어두움은 여성 상징이고 밝음은 남성의 상징이어서 5호는 밝음 속에 어둠이 든 것이 아니라 밝음이 어둠에 흡수되어 가고 있는 밤과 같은 이미지에 속한다. 이 거꾸로 하향하는 빛은 “흔적을제하고” 또 “제”하는 것을 상징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삶의 원리는 적용된다. 장자에 의하면 무와 유의 관계는 무가 조채독존超在獨存하는 것은 아니고 일절만재一切萬在와 함께 실존하여 그 활동변화의 그 원리는 늘 움직이는 것이다. 장자는 무위에 다시 무무 무무무無無, 無無無라는 사고를 보였다. 이는 무라는 본체론에 일보 전진하려고 한 상징성을띈다. 존재가 드러나는 바탕은 “전후좌우를제하는”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보면 제하고 있는 시의 함의는 존재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다. 밝음을 거부하는 듯한 화살표 두개의 시적 상징은 빛과 그림자의 관계에 있어서 미궁이나 미로가 아닌 방향이 제시되는 “그림자의 인식”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op. cit., pp. 173~ 183. 의지적 표현이다. 결국 밝은 아침을 가져올 밤의 순환성을 기다리며 숫자가 거꾸로 되더라도 살아남는 일을 모색한다. 4호의 겨울 상징은 5호에서 또 다시 겨울 상징인 것으로 이어진다. 외부의 빛이 해체되면서 두 갈래로 갈라져서 어둠 속으로 잠기면서도 결코 절망할 수 없는 인간의 고뇌를 보인다. 5호는 시의 구조에서 순환적 반복성이 암시되지 않는 일회적인 점에 일회적인 인간 자신을 상징한다. 4호가 겨울 상징인데 또 다시 5호가 겨울 상징이 된 5호는 인간 일회성에 대한 거부이다. 그 간접적 암시가 두 번의 경로를 겹쳐서 자연을 거부하면서 봄을 기다린다. 이상 시의 시계시간이 멈추어져 있는 것도 이와 동일한 상징성이다. 이상 시의 「운동」이나 작품 「제 1번」등에서 “시계를내동댕이쳐버리고말았다”, “시계는서있다”와 같은 거부의 이미지는 바로 인간이어야 하는 점을 거부로 상징한다. 이러한 시적 표현으로 인하여 많은 논의의 쟁점이 결국 이상을 자연 및 신을 거부하는 시인으로 결정짓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어서 역전을 시도하는 인간, 사고하는 인간의 상징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어 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나름의 자유를 허락하시었다. 말하자면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방향을 허락하시었다. 그래서 절대자유라는 말이 주어질 만큼 제 마음대로의 인생을 살아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그것이 얼마만큼 허무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하면 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일이다. 이를 성경을 연구하는 나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돌리기만 하면 되는 아주 쉬운 일 곧 히브리어로는 수부 발음이다. 아주 쉽다의 우리말 고어 수비가 된다. 그리고는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된다. 더다시 말하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마음을 신이라는 절대자에게 맡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말이다. 이상은 이러한 마음의 세계를 시를 통해 강한 자아 뒤에 숨어있는 신에게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음을 역설하고 있다. (2) 앵무 가. 아알지 못하는 관계 6호의 표현된 “앵무”는 “2필”이면서도 분리구조에서 살핀바와 같이 분리되어 가는 갈등을 가진 인간성이 상징된다. 이의 구체적 시어의 표현은 “아알지못하는” “추방” “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느니라” “체읍涕泣하였느니라”에서 인간과 인간의 사이가 멀어져가는 것을 상징한다. 인간의 사이가 소원해지는 것을 서로 알지 못하는 고립 관계이다. 또 “추방”당하고 “추방”하는 인간과의 관계는 6호의 “2필”개념이 같은 공간에 거하는 뜻과는 상반된 것을 상징한다고 본다. 또한 “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느니라”의 시적 표현은 보편성으로 보아 “2필” 사이가 서로 맞지 않음을 상징한다. “2필” 사이는 서로 부끄러워서 얼굴이 붉어질 수 없는 것을 보편성으로 한다. 나흘안이붓흐리샤든(양주동, 『고가연구』 서울: 박문관, 1963., p. 223) 시구(시句)도 남·녀의 친한 관계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관계로 표현한다. 그리고 “체읍涕泣”의 시적 표현이나 “중축을혹실”하는의 시어는 중심을 잃거나 노쇠하거나 가을의 쓸쓸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6호는 “아알지못하는” 관계, 거꾸로 된 추방대상, “부끄러워하는” 사이, 역전의 가을 이미지로 각각 다의적 복합상징이 되고 있다. 6호의 “앵무2필”과 “2필”의 비교에 의한 관련성으로 공통점을 찾는다면 실제 “앵무2필”은 동물로서의 한 쌍이고 “2필”은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내포성을 띈 한 쌍의 의미다. “앵무2필”과 “2필” 사이에 모호해지려는 2필의 추상성이 있다. 극적으로 “그러나과연그럴른지그것조차그럴른지”에서 긴장이 신앙적 차원을 가진 인간 “2필”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것을 본다. “2필”의 추상적 5호의 표현은 <이상, 이상부인> <신사, 이상부인> <나, 너> 등으로 구체화 된다. 이들은 모두 “2필”의 원관념을 설명해주는 보조관념이다. 시의 외연은 모두 “그러나”라고 하는 역설적 부사어와 긴장관계에 있다. 6호에서 나열되고 있는 이들 쌍들은 “앵무2필”과도 같은 한 쌍의 동물적인 특징과 연결된다. 그러면서도 관계가 끊어질 수 없음을 “2필”로서 묶고 있다. 2필이라고 라는 한 쌍의 추상적 개념은 6호에서 우선 “앵무2필”로 구체적 표현을 통사적 문맥에서 드러낸다. “앵무”는 인간의 말을 의미도 모르고 따라하는 새이다. 따라서 긴장언어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는 6호의 “앵무2필”은 남의 말을 의미도 모르고 따라하는 인간에 비유된다. ① 김우종, op. cit., p. 239. ② 구연부(op. cit., p. 25)는 이상이 여자와의 관계를 무의식적으로 폭로할 우려가 있다는 형식을 앵무새에게 비유하고 있다 하였다. 또한 벙어리의 속어를 가진 “앵무”는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서로 전달하지 못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러한 관계는 분리, 분열, 파괴의 요인이다. 한편 서로 알지 못하는 관계는 동물이 “앵무2필”과 인간 “2필”일 때이다. 동물과 인간은 어느 집에서라도 알지 못하는 사이를 상징한다. 특히 “내가2필을아아는것은내가2필을아알지못하는것이니라”와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와 같은 표현에서 인간만이 그 대상을 알기를 “희망”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서로아알지못하면서” “아알기”를 희망함으로써 큰 비극을 상징한다. 시어로서만 가능한 “아알지못하는”의 표현은 아는 것과 알지못하는 것이 압축되어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또한 시적 애매성으로 의미까지 애매하게 하는 의도적 기법이다. 알기를 “희망”함으로써 끝없이 “아알지못하는” 관계로 인한 분열된 관계를 “나”는 극복하려고 한다. 오세영(op. cit., p. 189)은 아내의 정체를 파악하려는 힘겨운 노력이라 하였다. 나. 거꾸로 된 추방대상 6호는 남편 “나”와 아내 사이를 “앵무2필”에서 “이상”과 “이상부인”으로 점점 멀어져 간다. 결혼한 부부 “2필” 중 어느 한 쪽이 “앵무”가 되어 동물적인 “앵무”의 속성이 드러난다.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다」 「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 “이상부인” 그리고 “소저”라 하면서 사람과 앵무를 구분함과 사람돠 동일시함으로써 동물인 “앵무”가 “앵무”가 아닌 일반적인 사실과 폭력적으로 결합된다. “앵무”는 스스로 “신사이상의부인”을 거부한다. 나이가 너무 젊어 결혼하면 가정의 아이를 잘 돌보지 않는 것이 가장 특징 Shella Moon, A Magic Dwalls (Middletown, Connecticut: Wesleyan University Press, 1974)., p. 14. 이다. “이상부인”이 생활의 정식을 거부한다. “앵무” 第 四4十二 興德大王, 寶歷 二年內卽位, 未幾有人奉使於唐, 將鸚鵡一雙而以至, 不久雌死, 而孤雄哀鳴不己, 王使人부 鏡於前, 烏見鏡中影, 疑其得偶, 乃哀鳴而死. 三國遺事 鸚鵡. 의 이야기로는 앵무가 당나라에서 들여오는데 앵무 암놈이 죽자 숫앵무가 밤낮을 울기에 거울을 앞에 놓아주었더니 밤낮으로 그 앵무를 쪼아 산 앵무도 죽는다는 고사가 있다. 이 한 쌍을 이상은 포유류 아이엄마를 조건으로 한다. 그런데도 이상인 내가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이다. 2필은 반드시 같은 공간에 거하여야함에도 “추방”당하거나 “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이다. 강제로추방 되고 자퇴하는 소원한 관계이다. “앵무 2필”은 <포유류>이고 이는 다시 <이상·이상부인>의 관계에 서 다시 <신사·이상부인>의 관계와 멀어진다. 결혼 특징이 밤과 연관되는 김우종, op. cit., p. 239. 데 “앵무2필”은 낮 새이다. 다. 부끄러워하는 사이됴망을 치고보니 걸니느니 뭇새로다 백일에 걸닌 시를 낫낫치 잡지마라 그중의 앵무공작은 후일보게 챀조: 진동혁 주역 『이세보 시조집』(서울: 정음사, 1984)., p. 140. 새 그물을 치고 보니 걸리는 것이 뭇 새인데 대낮에 걸린 새 중에서 앵무는 잡지 말라는 내용에서 앵무는 낮의 새 류이다. 이와 같은 원초적 원인에서 본문을 통하여 드러나는 “이상”과 “이상부인”의 갈등은 스캔들로 확대된다. 바로 밤을 즐기지 못하는 두 부부 사이는 그 원초적 부부의 의미를 상실한 사이이다. 더구나 동물류와 같은 “이상부인”에 대한 환멸은 반사적 행동으로 “부끄러워”서 달아나는 이상과 달아나는 거리만큼 떨어지는 정신적 분리의 소원한 관계이다. 부부 사이는 그 원초성에서 아주 멋잇는 “신사”의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이상은 그의 시어를 “신사”의 형이상성과 “소저”로 한다. 부부관계에서 성립되는 용어가 아니다. 이러란 상징적 6호의 형이상성 정귀영, op. cit., p. 364 에는 둘의 마음이나 몸이 합한 어떤 시적 내포도 지니지 않는다. 부부가 멀어지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일 수 밖에 없다. 분리된 내포와 분리된 외연의 상징성이 되는, 갈등을 가진 부부의 관계는 이상의 작품, 「편지」에서도 동일 상징성을 보인다. 혼자가 아닌 부부가 된 이야기를 이상시인은 「편지」의 부부에서 다리의 길고 짧아 절룩거리는 표현을 한다. 서로 어긋나 “추방” 된 아니 “추방”된 것이 아니라 “자퇴”라고 하는 자신조차 용납할 수 없는 아주 “부끄러워”하는 사이가 되는 일은 가족 붕괴되는 사랑부재의 현장이다. “자퇴”하면서 까지 이상의 흔들리는 정서 이기반, op.cit., p. 65. 는 왼ㅉ고 오른쪽의 다리길이가 너무 달라 절룸거리는 절룸바리의 관계이다. 이 절뚝거리는 둘의 사이는 시를 통해서 본 이상과 그의 아내사이의 일이다. 이러한 사랑관계 김종철, “삼십년대의 시인들” 『시와 역사적 상상력』 (서울: 문학과 지성사, 1978)., p. 52. 는 다른 어떤 것과 비교되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결코 어떤 부와 명예와도 관련이 없다. 이는 신비한 영역이다. 또한 아주 긴밀한 연관성이 되는 사회와의 연관성이다. 부부사이가 좋은 관계가 만들어낸 사회는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회이다. 동시에 일제강제압력시대에서라는 강한 사회성과도 연관되어진다. 그러나 또 반대로 아무리 사회가 바람직하지 못할지라도 따뜻한 부부관계가 유지되면 견딜만한 신의 힘이 나오는 것이 아주 중요한 부부관계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부부관계가 좋을 지라도 사회라는 일제 강점기 당시의 현실은 한 지붕아래 살아야하는 관계를 상실할 수 있다. 강제징용이라던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한 지붕 아래 있을 수 없는 환경이 되면 한 지붕아래 같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다양한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이상과 이상부인의 관계는 비단 단순한 부부관계를 의미하지 않기도 하다. 하나님이 허락해준 에덴동산에서의 부부의 이야기는 잘못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도 같이 쫓겨난다. 그리고 둘에게 똑 같이 가죽옷을 해 입히셨다. 질긴 가죽옷을 똑 같이 얻어 입고 이 사해 같은 세상에서도 같이 살아가야할 둘의 관계가 흔들리고 있다. 라. 가을 이미지 6호에서 표현되고 있는 “이상”과 “이상부인”의 관계는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 있는데에 그 특징이 있다. 6호에서 “이상부인”이 “신사이상”을 거부하는 시적 이유는 “이상부인”이 sCandle의 주인공인데 있다. 보편적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 시의 전도는 sCandle이 있는 “이상부인인”에게 “이상”이 노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부인”이 노하는 정반 관계에 있다. 노해야 할 자는 “이상”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거꾸로 되어 있는 것은 씁쓰레한 가을 이미지에 해당한다. 스캔들의 첫글자 s는 소문자로 쓰이면서 둘째글자 C는 대문자로 강조된 것은 액센트에 대한 시적 강조로 보인다. 이의 강조는 2필의 관계를 파괴하는 변절자와 불가항력적인 바람인 것으로 초점을 맞추는다. 우선 첫째로 sCandle의 시어가 암시하듯이 6호의 “이상부인”은 바람 이미지에 비유될 수 있다. 바람의 본질은 원래 남자들뿐인 세상이었던 옛날에 남자의 등에 맨 책 속에 들어 있었다. 동물적인 성격의 남자들이 그 바람의 성격을 알고 싶어서 그들 중 어느 남자가 바람이 든 백을 잘랐더니 바람은 영영 달아나서 잡을 수가 없었다. Raymond Vnover, op. cit., pp. 87~88. "orign of the wind. 달아나기를 좋아하고 소속되기를 싫어하면서 금지된 사랑을 즐겨 찾는 사람은 바람이미지에 해당한다. 언제든지 이 바람은 일체의 동요성을 내재하고 있으며 어느 곳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동적 에너지로 변절자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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