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한 마리 나비처럼
(1) 향기나는 곳으로 『나비야 청산가자』
홍문표 시인은 『나비야 청산가자』 시집 제목에서 “나비야~”라고 부름으로써 ‘음향리듬’과 ‘청산 가자’로 인한 색채 리듬을 겻들인다. 따라서 고시조 「나비야 청산가자」에 대한 공감대 형성의 시 낭송법과 일치한다.
이에 대한 연계성의 유추로 나비가 나폴나폴 춤추며 꽃과 숲, 숲과 숲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리듬이 있듯이 동천의 『나비야 청산가자』 시집에는 리듬이 있다. 나비인 시인이 이 세상을 향하여 나폴나폴 날며 이로움인 사랑을 전하려 날아다닌다. 구체적으로 홍문표에게서는 그 목표지점이 에덴이다.
약 2만종이나 되는 나비들의 이름들 중 ‘산 제비 나비 · 작은 멋쟁이 나비 · 수노랑나비 · 스기타니 은점 선표범나비 · 긴 지부전나비 · 이른 봄 애호랑 나비 · 황 모시나비 · 환경 흰점 팔랑 나비’ 등을 나열해 보아도 나비들이 사람에게 이로움을 주는 전제가 가능한 나비야 청산가자는 청유형이다. 나비는 시인들처럼 ‘이른 봄 애호랑나비’의 경우 진달래꽃을 너무 좋아해 진달래꽃이 필 때 나타나 진달래꽃이 지면 사라진다. 나비들이 좋아하는 선택 리듬을 가지듯이 시인도 그의 시집 제목을 『나비야 청산 가자』함으로써 시인이 좋아하는 음향 리듬과 색채리듬을 선택한다.
나비의 경우 ‘삼팔선을 경계로 남한에만 있는 ’남방부전나비‘, 북한에만 있는 ’큰 주홍 부전나비‘의 예는 한국인의 남북한 분리의 비운적 삶 문제를 제시해 주는 묘한 선택리듬의 매력까지 가지고 있다. 남방부전나비의 색상은 파랗고, 큰 주홍 부전나비의 색상이 붉은 것을 보면 시인이 마치 나비가 되어 그의 좋아함을 선택함과 같다. 이러한 나비와 시와의 연관성은 석가모니조차도 ‘나비여, 나는 브라민의 경전에서 배운 것 보다, 나비, 너에게서 배운 게 더 많다’라고 한 구절을 음미해 볼 만 하다.
나비는 한 달을 기점으로 완전 탈바꿈한다. 이 점은 한국의 전통시조가 한 달을 기준으로 한 시조임과 연계된다. 따라서 『나비야 청산가자』는 시조가 갖고 있는 3구분의 음향리듬과 색채리듬으로 구부날 수 있음을 가정한다. 이 말은 이 ‘나비야 청산가자’가 시조의 리듬으로 되어 있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사실 나비의 온몸은 비늘가루로 덮여 있어서, 현미경을 통해 보면 마치 천연의 물감을 뿌려놓은 듯 아름답기가 거의 환상적이다. 이 환상성은 홍 시인이 『나비야 청산가자』 시집을 통하여 환상적인 그의 삶을 전개함과 동일시 할 수 있다. 아름다운 삶의 색채 보유는 바로 시인이 시를 통해 그의 심상을 화려하게 수놓음과 동일시되는 색채리듬과, 사람들에게 청산가자고 청유하는 음향리듬이 있다고 가설 할 수 있다. 청산가자, 푸른 곳으로 가자함은, 의로운 길을 향하여 가자고 하는 것이고, 그 이유는 지친 이웃을 향한 위로가 있음에 의의가 있다. 그 청산을 향하여 멀리, 그리고 빨리 서둘러서 가자고 하게 되는 이 의로움의 길은 소박하고 좋은 소식을 시인 혼자만이 갖기에는 청유의 소명의식을 갖게 하는 절대자가 지키는 명령이 더 강하기 때문에 청산 가자는 점으로 탐색하게 한다.
이 청유의 음향리듬은 나비 류의 뱀 눈 나비과, 네발 나비과, 공작나비과와 네 발 나비ㅏ과의 눈 무늬가 적이 공격해 올 때 적을 순간적으로 뱀의 눈으로 착각, 멈칫하는 사이에 도망하고, 공작 나비류는 오히려 자신의 화려한 눈 무늬를 활짝 펴서 적이 그 문의만 쪼개 놔둠으로써 신체의 다른 부분을 보호, 생명을 보전하려는 본능의 의미들과 연계시켜 보면, 생명을 보전하여야 할 고차원적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인한 청유의 의의연쇠망을 가지는 음향리듬이다.
따라서 청산을 향하여 가는 이들의 입는 산 푸름의 색채리듬은 올바른 삶의 공유성을 지켜가기 위한 색채리듬임을 유추하게 된다. 이러한 나비의 은유적 상징은 ‘유리창 나비, 신선처럼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사는 신선나비, 눈물이 흐를 듯 애처러운 눈동자로 묘한 매력을 지니는 뱀 눈 나비, 날개가 크고 색상이 화려한 왕 오색 나비’ 들의 향연이 된다. 특히 나비류로서의 드문 ‘부처 사촌나비, ’봄 처녀 나비, 굴뚝 주변에 사는 ‘굴뚝 나비’, 사향 냄새를 풍기는 ‘사향제비나비, 학명이 이리스(무지개의 여신)인 ’번개오색나비‘ 등도 있지만 그 보다는 홍시인이 지향하는 나비는 푸른 청산을 향하여 가는 푸른 ’신선 나비‘에 해당될 것이라고 유추한다.
(2). 나비와 시인
장자의 제물론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은 도화, 물화, 화생(道化, 物化, 化生)이라 하여 나비와 사람은 분명이 구별되지만 그러나 다른 개체는 아니어서 하나님 물(物)이 다양하게 변한 것의 비유로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적 이해의 관점에서 보는 나비와 시인의 동일시는 그 ‘하나’의 물화로 나뉘어 진 하나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동일성의 접근은 난 종류에서도 호접란(胡蝶蘭)이 있어 긴 대궁 끝에[ 달려 있는 난 꽃은 마치 한 마리의 나비가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러한 연쇄망의 유추에서 보아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신령하고,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가득하고, 만물에는 하나를 얻은 인간의 삶이 있다.
나비의 꿈을 가진 시인의 진지한 삶을 구가하는 데는 시인이 만물을 다스리는 절대자의 진실성을 흠모하는 아름다움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진실성의 탐색에는 『나비야 청산가자』시집에서 나비와 같이 갈 삶을 청유함으로써 나비를 다스리는 시인이 된다. 나비를 다스림은 시적 은유를 통해 일사의 삶으로 도입하여 사람을 다스리는 진인(眞人)성을 제시한다. 이것은 나 혼자만의 소리가 아닌 공유하고자 하는 음향리듬이다.
(3) 보는 눈
음향리듬과 색채리듬을 같이 공유하는 시인의 의지는 조화에 있다. 이 관점은 바로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는 진리에 연계시킬 수 있다. 이 의미확대는 사물을 바라보는 나와 대상과의 거리를 좁힌 행복의 눈을 말한다. 지금 행복하지 않더라도 행복을 가진 자는 행복을 꿈꿀 수 있다. 이 행복을 가진 자는 어린아이와 같음에 비유된다. 이러한 원성실성(圓誠實性)의 실상을 보는 자는 어린아이와 같은 눈에 비치기만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른인 시인이 어린아이의 심상이 됨에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행진할 때 광야지면에 흰서리가 땅을 덮듯 가는 사라기 같은 것이 있었던 이야기에 접근해 볼 수 있다. 먹을만큼 만 거두어 들여야 하는 마음은 바로 낮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않는은 삶의 일상성을 알리는 음향리듬과 가질 것 만 가지는 자에 해당한다.
『나비야 청산가자』에서는 ‘정상’시어가 최다빈도 현상을 보이는 바 그 예는 다음과 같댜.
경망, 공룡, 공평, 능청, 동강, 동공, 방황, 분홍, 정(2), 땅(4), 동방, 명동(2), 몽불랑, 몽정, 양(2), 영롱, 영상(2), 청청(2), 정상(14), 중 량, 성황당, 생명(5), 싱싱(6), 왕성, 영봉(4), 장군봉, 청동, 청사초롱, 청승(2), 청청, 풍성, 영산홍
『나비야 청산가자』에서는 ㅇ음가의 받침이 나란히 나열된 시어가 다빈도 현상을 보이는데 그 중에서 ‘정상’이 14회로 가장 많다. 이러한 정상 지수는 홍문표의 기족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홍문표는 홍총장으로 불리운다. ‘홍총장’ 또한 o 음가의 3회 연속이고 부인 이름 ‘용호’와 자녀들 분 이름 ‘미랑’ ‘예랑’ ‘성혁’ ‘성민’ 모두 o 발음 이다.
이 정상리듬에 대한 탐색은 ㅇ음이 둥근 원형을 상징하는 것으로 태극이 된다. 훈민정음에서 지시한 바와 같이 ㅇ음은 이에 상대하여 버금가는 글자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기에 이 ‘정상’시어의 ㅇ 종성 음은 태극이고 태극이 동하여 하나의 극이 생겨서 ㅇ이 된, 이러한 두 개의 음절이 합하여 지고 더구나 그 시어가 ‘정상’이라는 의미가 가장 으뜸의 의미소에 접근됨으로써 가장 으뜸음에 대한 강한 시인심상의 투사이다.
실제 정상은 꿈의 세계이다. 꿈을 꾸는 사람(dreamer)은 꿈을 이루는 자가 된다. 이 정상의 꿈은 완전성인 절대자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홍시인도 이 세계에 강렬한 지시소로 지향한다.
정상은 천하를 주름잡는 절대자의 의식이거나 거만한데서 오는 ‘정상’이 아니다.
정상은 지금도
두려온 독재가 지배한다.
남산 팔각정부근이나
뒷동산 등성이쯤이야
위아래도 없는 돗대기 시장이지만
북한산이나
삼각산만 되어도
수목들은 정상의 저만큼에서
고개를 숙여야 한다.
백두산 천지나
한라산 꼭대기에 이르면
수목들은 아예
발밑에 엎드린 노예가 된다.
하늘의 천기가 내리는
영험한 지역에
부정한 잡목들이 범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목을 낮추고
중턱에 이르면 수목들은 일제히 발목까지 거두는 겸손으로 하여
산은 지금도
정상의 지존을 지킨다.
그처럼 무성한 수목들의 육질이며
풍성한 잎새들의 무지가 되고
정상은 차라리
불모의 고독으로 하여
살진 계곡을 다스린다
- 「정상은 지금도」
『나비야 청산가자』시집의 「정상은 지금도」에서는 “중턱에 허리를 낮추고/ 정상에 이르면 수목들은 일제히 발목까지 거두는 겸손으로 하여”야 정상이 된다. 나비와 청산을 향하여 있는 수목들이 고개를 숙여야 하는 리듬이다. 이 색채리듬은 혼자가 아니고 같이 가자고 하기 위해서 홍문표는 인도자로서 낮고 낮은 외침의 청유적 음향리듬을 수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