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아 사랑아 37
화해와 용서 - 악수 창 33:1-11
(20140209) 李英芝
1
하나님의 손에 의해 겨우 눈 안에 든 야곱은 보이소하며 하나님이 주신 눈으로, 하나님이 주신 머리로 앞을 바라보았다. 하나님이 보이게 하여 주심에 감동하여 보이네하였다.
앞을 바라보니 늘 눈으로 거절하는 에서 즉 늘 아서라고 말하는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오는게 보아지는지라 야곱은 가슴에 든 물질과 얼라들을 두 여종과 레아와 라헬에게 맡기게된다. 맡기되 나누어 맡긴다. 이 때 여종이나 레아와 라헬의 의미는 여종은 휴식의미와 레아는 내가 숨 쉬는 뜻과 라헬은 머리가 지붕안에 있기 위한 존재로 모두 필요한 존재이다.
2절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순서는제일 뒤에 요셉을 놓는다. 이유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 중심을 잡는 입이어서 그러하다. 라헬은 암양의미로 에브랏이 지닌 열매와 결실과 실과를 뜻한다. 둘째 딸 라헬을 피에릭크(Ada. Feyerick)는 고대 상형문자와 관련된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 목걸이와 관련하여 왕비 이미지로 해석된다. 궁켈은 라헬과 베들레헴과의 연관성으로 라헬의 임신한 곳 에브랏(창 35: 16)과 관련하여 출산 의미를 지닌다 하였다.
유브라데 강(창 2: 14)과 연계되는 과실 ・ 열매의 개념인 이스라엘의 분깃과 연결된다. 하나님의 집안인 벧 엘은 하늘로부터 온 떡집 곧 말씀이라는 뜻이다. 입술의미여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관계는 입 · 그 입으로 말씀을 전한다. 물동이는 여성, 즉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이기에 요셉과 같이 둔다.
3절
화해와 용서의 몸짓으로 야곱은 나아가되 눈으로 마음을 표시하며, 몸을 굽히며 엎드린다. 이때의 히브리어는 하나님 손에 잡히어 꼼짝없이 하는 즉 죽으라면 죽겠나이다이다. 신학적으로는 십자가를 지겠나이다. 십자가를 안고 있겠나이다이다. 엎드릴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모양을 제시하는데 가만히 있지 않고 나아가서 이다. 한국말 그대로 나아가서이다. 이미 나아 갔었다이다. 히브리 발음 기스트이다. 몸을 아주 엎드려 죽는 시늉의 몸 모양으로 야곱은 기어가서 에서에게 다가갔다. 화해의 몸짓은 옛날 왕 앞에 나아가던 신하의 모습이다.
4절
이러자 에서의 그림 모양은 아우를 맞아서 안고, 입맞추고라 되어 있다. 에서는 아우 야곱의 신체접촉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거나 엎드리지는 않는다. 그림대로라면 에서는 가만히 서서 동생 야곱을 맞는다. 히브리어로 가라 · 이거라도이다. ‘가라’는 명령을 받은 형태이고, 이거라도는 다소 마지못해 하는 표현이다. 하나님 뜻에 따라 에서는 마지못해 움직여진다. 이 때 두 사람 이름이 비교되는데 에서는 한국말 그대로라면 에서여서 빼앗는다는 말이 되고 또한 ‘아서라’의 그렇게 하지 말아라이다. 야곱 ב(야아코브,Ίακώβ)은 대상을 명령하는 ‘야!’로 부를 때 한국어 그대로이다. 그리고 ‘곱’ 하게 된다. 야 곱 해라는 더 하라는 명령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평생 그 이름으로 불려지게 됨으로 이름대로 그대로 되는 운명을 지닌다. 아브라함은 ‘아비라 함’으로 평생 아버지 역할에 맞는 일생을 살고 믿음의 조상 ‘아비라 함’이다.
화해는 어느 한 쪽이 적극적으로 엎드리고 나아가는데서 이루어진다. 야곱이 한 걸음씩 닥아가고 에서는 그 자리에 서 있고, 화해는 야곱이 모든 것을 내려 놓고 닥아간데서 이루어 졌다. 둘은 안고 입맞추었다. 이 때 안고와 입맞추기의 관계는 안고는 히브리어로 하아바흐·바으하브헤후이어서 글자풀이로 본다면 하나님 지붕 아래 들어가는 일이다. 히브리어로 입맞추는 일은 ‘나아솨, 바이솨흐후’로 나아가서, 앞으로 가서, 만나는 일, 입을 맞추는 일이다. 곧 헤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법상 해후란 지금도 계속되는 진행형으로 아주 작아져서 작은 바늘귀로 계속 들어가고 있는 일이다. 어려운 일을 잘 치러내는 몸짓은 입을 맞추는 일이다. 이 몸과 몸의 부분인 입이 만나는 연결은 하나님의 손으로 두사람이 몸의 의미가 부서지도록 하여 바늘귀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히브리어로 보면 예뻐지는 모습이다. 뜻을 맞추는 일이다. 뜻을 맞추는 일은 말을 맞추는 일이다. 한국인들은 입 맞추었다는 말을 한다. 이 뜻은 서로 생각을 맞추었다는 말이다. 성적 의미가 아니라 헬라어로 예삐이다. 화해는 예뻐지는 일이다. 서로 만나 내가 작아지고 낮아져서 없어지는 듯 할 때 화해가 일어난다.
5절
에서가 야곱에게 주위의 사람들을 보고 누구냐고 물을 때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의 종에게 주신 자식들이라고 말한다. 이 때 야곱은 철저히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고 그리고 형에 대하여서도 주의 종에게라고 한다.
6-7절
화해를 하는 야곱의 모습은 혼자만이 아닌 온 식구들이 같이 큰 절을 하게 함으로써 철저히 야 곱, 즉 더하여 같이 에서를 향해 경의를 표하였다.
8절
에서는 많은 가족들과 식솔들이 모두 업드려 절하자, 에서는 이 떼가 뭐냐는 것이다. 이 떼의 번역말은 히브리어 발음그대로는 한국말로 ‘많네’이다. 히브리어로도 ‘많네’이다. 그러자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라고 말한다.
9절
은혜를 입는다는 모자를 쓴다는 일이다. 모자를 쓰는 일은 한국풍속에서는 벼슬을 의미한다. 은혜를 입는다의 입는다는 히브리어로 모자이다.
10절
한국말에 ‘나’는 나이다. 말하는 자신을 가리켜 ‘나’라고 한다. 히브리어로 뜻은 청컨데이다. 에서에게 선물을 주며 간절히 바라건데 하고 말을 하면서 형이 나로 하여금 모자, 곧 벼슬을 주었으니 예물을 받아 달라고 하였다. 이 때 히브리어 예물은 믿나이다이다. 마음이 그만큼 담겨져 있다이다. 그리고 받아달라고 할 때의 이 받으소서는 블라카흐타 곧 한국말로 볼라고한다는 것이다. 아주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가까이서 볼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선물을 드릴때의 마음은 늘 가까이서 볼 것을 믿는다이다. 이러한 간절한 야곱의 마음은 형 에서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화해의 몸짓은 상대방을 대할 때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듯이 할 때에만 화해가 이루어진다.
11절
형 에서가 선물을 받지 않으려고 할 때 다시 한 번 야곱은 강권하는데 에서가 예물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33장 11절은 엘로힘과 예수와 하나님 발음이 모두 나타나는 아주 중요한 장이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 발음 그대로예쉬 שׁ와 한글발음의 하나님י(한난니)와 엘로힘 םי이 있다. 이들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3위의 관계를 한글 바름 그대로 예수 이콜 하나님으로 하고 있다. 이 성삼위는 서로 연결 ‘-’로 이어진다. 야곱은 이 성삼위의 은혜를 입었기에 모든 것이 족하다고 하고 있다. 이에 에서는 야곱의 예물을 받게 된다. 화해가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