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이랑으로 어울어진 천국의 시학 – 이영지 시인의 『사랑이랑행복이랑』
홍 문 표*
(문학박사 · 신학박사 · 시인 · 평론가)
이영지 시인이 『사랑이랑 행복이랑』이란 제목의 시집을 상재한다. 사랑과 행복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소망스런 마음의 세계다. 사랑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거기에 행복까지 겻들인다면 그 보다 더 좋은 경지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에서는 바람직한 신앙의 원칙을 믿음 · 소망 · 사랑의 세가지로 지적하면서도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복음 13:34) 그래서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랑은 기독교만의 진리가 아니라 모든 종교가 모두 사랑을 주문하고 있고, 종교뿐만 아니라 문학에서도 최대의 주제는 사랑이다. 문학뿐인가 세상 사람들도 사랑을 최대의 덕목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사랑은 누구에게나 요구되는 보편적인 감정이고, 그러기에 사랑, 진리가 되고, 하나님의 계명이 된다.
이영지 시인은 이처럼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감정,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이 되는 사랑을 이번 시집의 화두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랑이란 이 언어는 너무나 넓고 깊고 그 종류가 다양해서 사랑이 행복을 보장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슬픔과 불행이 될 수도 있다. 그러기에 정말 참된 사랑은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 행복이란 기쁨이 있어야 하고, 만족감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흐믓하고 충만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성적인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온 몸으로 느끼는 감동(feeling)의 세계다.
이영지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먼저 사랑을 화두로 하고 있지만 그 사랑은 슬픔이나 고통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행복도 있는 사랑, 그래서 이 시인은 『사랑이랑행복이랑』이란 제목을 잡았다. 그런데 시인은 사랑과 행복 이렇게 하지 않고 ‘사랑이랑행복이랑’이라고 하였다. 사랑과 행복에 이랑이란 접속사를 붙인 것이다. 원래 ‘이랑’은 갈아 놓은 밭의 한 두둑과 한 고랑을 합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명사에 붙여 쓸 때는 자음으로 끝나는 체언에 붙어 둘이상의 단어를 동등한 자격으로 연결해주는 접속조사가 된다. 그렇다면 접속조사 ‘이랑’이 갖는 문법적 의미는 그 문자의 한계를 넘어 시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메타포가 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교리는 인간이 득죄하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분리 된 것이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공존 관계가 와해되고, 그로 인해 인간은 유한한 지상의 저주받은 존재가 된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의 구원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랑인간이랑’의 관계가 되어야하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분리를 소외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소외란 주체와 타자의 괴리이다. 사실 문명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은 모든 사물들의 관계를 분리시키는 것이다. 각자의 변별성을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에서는 그 어느 사물도 고립되고 소외되는 것이다. 그것이 외로움이고 절망이다.
시의 본질이 메타포다. 메타포는 분리시켜 소외를 조성하고 절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을 통합으로, 대립을 화해로 융합하는 것이다. 그것은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고, 그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고 행복이다. 따라서 이영지 시인의 ‘사랑이랑행복이랑’은 사랑과 행복이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가 공존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열이 아니라 통합이고 화합이다. ‘이랑’은 바로 그 통합의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뿐만 아니라 ‘이랑’은 사랑과 행복이 대등한 통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다른 사물과의 통합으로 이어지고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영지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의 최대 관심은 사랑과 행복의 통합이지만 ‘이랑’이 주는 시학적 메시지는 무한히 계속되는 통합, 그리하여 하늘과 세상과 인간과 사물이 모두 통합되는 세상, 바로 에덴이고, 낙원이고, 천국이다. 모든 사물들이 ‘이랑’이란 대등한 연결을 통해 하나가 되는 세상, 그리하여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번 시집 『사랑이랑행복이랑』은 제목만이 ‘이랑’으로 통합되는 관계가 아니라 모든 작품들이 모두 이랑으로 연결되는 이랑의 천국이 된다.
제1부 ‘눈이랑행복이랑’은 혼자가 아닌 어울어짐의 이랑을 소원한다. 사람에게 있어서 눈은 「눈이랑행복이랑」 시에서와 같이 맞잡고 춤을 추면, 드리는 마음 하나가 하늘에서 내려온다. 시적화자의 하나님에게 향한 호소는 손짓을 받아달라는 것이다. 이 시집은 눈을 맞추는 일이 많다. 어울려 눈이 만들어내는 이랑은 눈이랑이다. 보는 눈의 절대성을 제시한다.
이 이랑에서 시인이 꿈꾸는 이랑은 그대와 같이 있고자 함이다. 때문에 이랑이 된다. 그대와 같이 있을 때 그곳은 꿈이랑이고 물이랑이다. 이 물이랑은 그냥 물이랑이 아니라 말씀 이랑이다. 지상에서의 이랑, 그것은 이른 봄 농촌에 가면 부부가 함께 밭이랑에서 일을 한다. 그 곳에는 풀이랑이 있고 새순이랑이 있다. 이 시인에게 있어서 이랑은 파아란 이랑이다. 그래서 시적 화자의 마음 여울은 꿈이 들어 있다. 파아란 물이랑 여울에 꿈이 들면 꿈소리를 낸다. 도굴도굴 돌 따라 흘러가고 입술로 뿅긋뿅긋 물고기 사랑하라며 물고기가 꼬리따라 잇는다. 더 나아가 물고기를 시어로 하여 시의 은유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로 하였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백성이 많아질 때의 사랑이랑행복이랑이다.
함께 어울림에게 내리는 것은 햇빛이다. 이 햇빛은 물이랑 재잘재잘 하면서 넘나든다. 이때의 물은 말씀이다. 말씀으로 넘쳐나는 물은 철버떡 한 번 더 물 차 오르느라 줄줄이 선다. 말씀을 가진 물이 줄줄이 선다. 이 때 아이가 등장하는데 아이들은 어른의 마음을 읽는 요술쟁이다. 가장 좋아해주는 사람을 따르며 마주해 웃어주면 그 때 생기는 이랑은 천국이랑이다. 그러기에 봄들에서 젖가슴을 풀어 헤칠 수 있는 시인은 아이의 가슴이 되어 봄길따라 커지며 마음으로 이 세상의 낙원을 본다. 에덴낙원이다. 산에 들에 꽃들이 가슴 열어젖히기에 시인도 따라할 뿐인데 에덴낙원을 보게 된다. 이 마음 세계는 하늘만큼의 즐거움이 있는 시인이랑이다.
시인이랑에서는 언제나 아이들이 그 순위를 앞에 차지한다. 「아이들이랑」시에서는 아이들이 타고가는 차 바퀴가 고장나지만 아이들 눈에 고장난 차가 움직이는 시가 된다. 이 때 아이들과 님은 「님이랑」이 되는데 이 때 님은 절대자이다. 님과 아이들의 어울림은 비단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인 시인의 눈으로 가득 채워지는 시야의 그 깊이다.
님과 시적 화자와의 사이에는 알이 있다. 이 알은 제단에 드려지는 번제로서의 알을 말하면서 양의 깊이와 넓이와 나날의 삶이 투영된다. 번제들여지는 시적 화자인 나는 잡아먹힘, 곧 번제드려지며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길을 걷는다. 에덴동산에서의 절대자의 깊은 성찰은 죽는 자의 부활이 암시 되는데 있다. 그러기에 시적 화자는 빛이랑 살고싶어 하늘 가까이 있으려 한다. 하늘만 섬기는 마음의 부자에게는 사랑이 아롱아롱 두드리어 아롱아롱한 꽃동네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산다.
이러한 이랑에서 시적 화자는 하나님 「아침이랑」을 맞는다.
별 웃음
따라다닌 아침이
아침이랑
길가 숲 동구나무 앞 정자 구름다리
내 이름 일컫는 자만 웃음 나는 봄 가슴
- 「아침이랑」
이 때의 시적 화자 “내 이름 일컫는 자”는 절대자이다. 그러므로 웃음나는 봄가슴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기에 내 이름 일컫는 자가 「산이랑」 시에서 돌과 나무와 어울어지는 신비의 꿈 장소, 산이 늘 안아 주는 따스함을 느낀다. 곧 잎 이불로 늘 덮혀 있어서이다. 그곳에는 맑은 공기와 푸른 바람과 밤의 별들이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피아노이랑」에 들어 있다. 하나님이 허락한 자율성에 의한 시인의 손으로 하나님의 세계 닮기를 옮기는 피아노이랑에 꽃잎이 떨어진다. 아름다운 꽃잎이 떨어지는 아름다운 절망 앞에서 그 손을 끌어 올려주시는 절대자의 손길 따라 노래가 나온다.
꽃잎이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사이
눈부신 안음 노래
바람의 날개이랑
꽃잎에 물오름이랑
몽울몽울 꽃송이
나온다.
- 「피아노이랑」
시인이 ‘사랑이랑행복이랑’에 서는 것은 꽃임이 떨어지는 절망 앞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심 안음노래를 불러주는 절대자가 있어서이다. 떨어짐에서 올려지는 노래를 타고 시적 화자는 바람 날개이랑에 든다. 기독교적 성령의 이랑에 선 시적 화자는 성령의 물오른 꽃송이가 된다. 성경의 절대적 힘은 일어나기이다. 아래로 내려가기가 아닌 위로 오르며 일어나는 일은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성경 전부의 예들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일하러 나갔다. 이 하나님의 약속이행을 시적 화자는 「그대음성이랑」에서 듣는다.
그럼으로 시적 화자는 길가기를 멈추지 않고 「다리이랑」을 건너면서 물을 줍는다.
건널 때 그 때마다
조심히 물을 줍다
왼발을 조심하고
오른발 내디디며
하늘을 쳐다보면서
다리이랑 건넌다
- 「다리이랑」
물을 줍는 시의 외연은 곧 내포로서 말씀을 들고 건너는 일이다. 모세는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다.
제2부 ‘님이랑’이 제시하는 어울어짐의 세계는 「님이랑」 사는 날이다. 님이랑 사는 날이 날의 날 하도 많아 파아란 꿈이랑이 된다. 그런데 ‘나는 늘 말 못하다가’이다. 할 말이 있어도 말을 못하는 이유는 행복함을 주신 님이랑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일반적인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넘어선다. 곧 절대자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 「사랑이랑」시에서 시적 화자는 사람사이의 사랑을 포기한다. 왜 인간의 사랑과 당신이라는 절대자와의 사랑이 공존할 수 없는가?. 그 답을 얻기 위해 답답해 엎드리는 날에사 “하늘 닮기로 사랑이랑 들어요” 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꿈과 인간의 꿈이 구별되는데 인간의 한계성과 하나님의 절대성 차이이다. 하나님의 이랑에 들기로 한 날부터 「꿈이랑」시에는 물길로 풀 푸른 꿈이 있다. 헛디딘 슬프디 슬픈 모습을 지나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의 인간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큰 사랑, 그러기에 목사로서 삶의 길에서 발을 들 있다.
발을 딛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을 들고 있을 때에 「기쁨이랑」시가 쓰여 지는데 그것은 한 고비 넘긴 삶의 달인으로서의 나날을 말한다. 사람과의 약속은 언제나 변칙성을 가지지만 오히려 그로하여 하나님이 나의 편에 서 계심을 재 확인하는 일이다. 사람의 안이 보이며 안이 다 튀어나와 속속이 보이지만 진짜 속을 알아보고 내 안이 싱글벙글 웃을 수 있는 힘마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