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지 시조집『행복의 순위』시조집 평
은빛 언어의 환상-
홍문표(시인・문학박사・평론가)
Ⅰ
이영지 시인의 시조집 『행복의 순위』는 새벽기도라는 큰 제목의 연작시조의 일부다. 그는 새벽기도라는 오랜 세월을 통하여 방대한 양으로 축적되고 있다는 시적 작업이기도 하다.
새벽기도는 물론 신앙적 용어다. 따라서 실제 새벽기도라는 신앙적인 행위를 통하여 얻어지는 신앙적 체험을 직접 시조로 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넓게 생각하면 인간은 누구나 새벽의 꿈을 갖고 새벽의 기원을 갖기 마련이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소망을 다짐하는 삶의 총체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새벽기도는 결코 하나의 주제나 소재일 수 없으며, 일상적인 삶과 신앙적인 체험들을 기원의 형식을 빌어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영지 시조시인의 작품을 보면서 당혹스럽게 느끼는 첫째로 형태의 분방함이다.
리움 바다에다 다발로 다 버리고
그 리움 어디 어디 있느냐 또 다시 또
리움 또 다시 찾아 우주만큼 싸 안아
- 「곱하기」에서
벽
그 벽
네모벽은
닫힌 벽
하늘의 벽
젖은 이 하아얀 벽
아직도 드높은 벽이 좌로우로 넘치는
- 「엘리베이터 속」에서
길
구름
있는 날은
초하로 길 떠날 때
- 「도시 숲」에서
포
포롱
새
샛노란
수
수건 방에 넣고
빤
빨간 담요 훌로
싸안고 들어가면
자전거 높은 음자리 난간 위에 앉아서
- 「이층집 圖」에서
물론 모든 시조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용한 몇 편의 시를 보면 매우 시각적이고 도형적인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시조가 엇시조와 사설시조를 거치면서 그 형태를 거듭해 왔지만 이미 최남선이나 주요한에 의해 평시조의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것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러 시조의 역사에서 이 행갈이는 당연한 시대적 요청일 수 있다.
시조의 전성기인 영정 시대를 거쳐 수 세기를 지난 오늘날에 있어서는 평시조의 형태는 한국의 전통적인 형태이다. 이영지 시조는 이를 고수하면서도 평시조가 가지는 그 형태의 변화를 기한다는데에 큰 의의가 있다. 이영지 시조의 이 계승발전이라는 중요성은 평시조의 형식을 아예 기하학학 도형으로까지 변형실험하고 있다는데 주목하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현대시조의 변형과 확연히 구별되는 부문이라고 하겠다. 현대 시사에서 이러한 실험은 이미 모더니즘이나 초현실 주의 시에서 시도된 것인데 바로 이영지 시조에서도 이러한 행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인 글자수는 유지하되 행이나, 연, 또는 서술방식을 과감히 탈피하여 현대시가 추구하는 시각적 기호까지도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2.
두 번째로는 시문장의 문법적인 일탈이다. 이것은 시조가 갖는 자수의 제한성을 위한 과감한 생략이기도 하다. 초현실주의가 추구하는 일상적 어법의 파괴나, 러시아 형식주의가 제시하는 낮 설게 만들기의 시법도 고려할 수 있다.
하늘가
그 쯤에서
손 가려
웃는 바람
이제는 햇빛으로 빛나라
그러라고
이슬로 서질랑 말고
햇빛날개
나와
녜
- 「예 녜에」에서
쪽물을 드릴 천에 홍두께 바람 와도
정성의 손방망이 두드려 따 올리면
세월도 빨랫줄에서 고운물을 들이고
옹달에 빨랫줄은 대나무 줄줄마다
초근목 풀밭에서 꽃술을 담아널은
홍화의 찬물에 담겨 노란색소 나오는
- 「쪽물드릴」에서
꽃신을 바라느라 나의 봄 무르익어 해진 옷 속살속살 은파도 얇아지고 물레의 가시들이 와 내 살 틈에 꽂힐 때
물무리 둘레둘레 사각링 두들기는 내 둘레 쏟아지는 화살꽂이 너무 아파 물길을 물 붓듯 열어 내 살꽃을 세우며
- 「조끼」에서
시는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 주어와 술어가 생략되면서 사물어의 기본 틀에서 진동하고 있다. 원래 시가 산문과 다른 점은 진동이다. 일차적인기의를 생략한 이차적 기의 즉 원관념을 숨긴 보조관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 시조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따른다. 「예 녜에」는 대상에 대한 애정의 집착이기도 한 원래의 뜻을 찾을 수 있으며 「쪽물드릴」에서는 “두드려 열” 혹은 “줄마다 열”에서 마치 후렴구나 매김소리 같은 한국 특유의 서정 기법을 쓴다. “꽃신을 바라느라” “나의 봄 무르익어” “은 파도 얇아지고”의 독자적인 의미는 전달되지만 인접성에 의한 연결은 초현실 기법으로 이해하여야할 일이다.
3.
이영지 시조의 총체적인 기호는 어떤 의미작용을 가지고 있을까? 소쉬르는 시니피앙(記票)과 시니피에(記意)로 구분하여 음성적 형식과 그러한 음성적 형식이 지시하는 의미내용을 구분하였다. 사실 언어란 임의로 어떤 의미내용들을 대신하는 기표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의사소통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의 언어는 일상적이고 문법적인 기표와 기의를 이차적인 기표로 만들고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때 이차적인 기표를 시학에서는 이미지, 은유, 상징, 신화 등의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존의 의미를 벗어나고 있다. 따라서 시의 감상이나 해석이나 비평은 바로 일차적 기표나 기의가 아니라 이차적 기표가 지시하는 정서나 사상의 내포적 세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영지 시조의 이차적 기표부터 살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영지 시조의 이미지나 상징적 기표들의 공통된 구조가 무엇인가를 읽어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달 먼저 떠 오르면
해는 달, 따라나와
달 밑에 서서 있는
그 차례 하얀 차례
해는 달
함께 웃으면
하얀 웃음
보조개
해 먼저 볼 붉히면
달은 해, 따라나와
해 밑에 활 활 화알
속 차례 분홍 차례
달은 해
함께 웃으면
분홍 웃음
보조개
- 「행복의 순위」에서
흰 눈을 소록소록 손으로 섣달 그믐
오묘한 당신만을 만나려 검은 밤의
요정의
별들 흰옷을
설날에만 뿌리느라
이 아침
백합을 양손으로 상큼히 내리시샤
당신이 맵디매운 매운 얼 내리심이 하얀 설
되는 거
이슬은바다
내리심이 되는 거
- 「설날의 눈」에서
한 점의
아침 이슬
여닫는 아침기침
당신의 유자향기 햇살의 둥근 입안
봄바람 한점 라일락 기쁜 그늘
안으려
하얀 눈
산 위에는
눈부신 얼음 녹임
흰 눈썹 그대 눈썹 흰 바람 옷자락의
날개의 한가닥가닥 봄 한 점이
나의 그
- 「한 점」에서
인용한 위 작품들을 이차적 기표로 분석해 보면 「행복의 순위」에서는 해와 달의 상관적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달아 먼저 떠오르면 해는 달 따라 나오고, 반대로 해가 먼저 볼을 붉히면 달은 해를 따라 나와 볼을 붉힌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달과 해의 관계는 대등한 순환이 아니라 서열적 질서의 관계다. 달과 해가 맞서는 관계가 아니라, 해 밑에 달이 서는 따라감의 관계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차적 기표가 제시하는 이차적 기의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너와 관계가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주종의 관계, 순종의 관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해와 달을 시적 화자와 그 대상, 또는 시인과 시인의 신앙적 대상의 관계라고 한다면 신에 대한 순종, 신앙적 삶의 겸허를 내포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의 제목인 「행복의 순위」는 절대자와 나, 당신과 나의 관계가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이며 이러한 서열적 관계에서 행복의 참된 의미를 찾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설날의 눈」에서도 나와 당신의 관계다. 그런데 나보다 당신은 절대적인 존재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 점은 「한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대 눈썹, 날개의 한가닥 봄 한점이 바로 ‘나의 그’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절대자의 섭리를 인격화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4.
그런데 세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것은 하얀 색의 이미지다. 「행복의 순위」에서는 달과 해의 질서를 “하얀 차례”라고 했다. 또한 해와 달이 결합되는 결합의 과정에서도 “하얀 웃음”이 제시되고 있다 .둘째 연에서는 “분홍차례” “분홍웃음”이라는 말도 있다. 그만큼 색상이미지에 대한 다양성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설날의 눈」에서는 “흰 눈” “흰 옷” “백합화” “하얀 설” 등을 나열하여 백색 이미지를 총동원하였다.
다음 작품에서 이 시인의 백색 이미지의 문제는 시인의 시적 에스프리와 같은 관계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덜미
하아얗게
드러내 하얀 웃음
배시시
눈웃음이 하아얗다
물어도 대답 않고 하얀 웃음
하얀 이
하얀 속
보입니다
새까만
밤이 깊어
하얀 눈
숲 달이 떠
앞 가슴 사이로
하얗게
비집고 들어 하얗게
- 「유혹」
새하얀
창가에서
머리에 흰 눈 오면
하얀 남자
하얀 가슴
빠알간 여름들어
두 남녀
흰 물결 흰 바다위에
하얀 바퀴 흘러라
- 「강릉연가」
흰 옷을 입었어요
당
신을 뵈오려고
내 사슴
내 팔뚝을 하얗게 문신하고
흰 꽃을 뿌리드리우고
흰 못으로 박아서
원두막 오를까요
흰 배를 띄울까요
새하얀 흰 이미에
새하얀 흰 너울으
쓸까요 가득히 담아 날릴까요
그대여
눈이며 입술이며 흰 피로 내 사랑에
불꽃이 하얗게만 올라서 피어올라
흰 열풍 하얗게 피어 누에고치 만드실
- 「흰 옷」
「유혹」은 “하얀 목덜미” “하얀 눈웃음” “하얀 이” “하얀 속” “하얀 숲” 등의 시어가 등장한다. 여기서 하얀 눈 숲이나 하얀 눈 서리는 자연적인 색감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지만 하얀 목덜미, 하얀 눈웃음, 하얀 속 등은 신체적 이미지로서 너무가 결벽스러운 순수함을 드러내고 있다. 백색 이미지가 갖는 상징성은 심리적으로 순결, 정결, 소박함, 냉정함 등으로 설명될 수 있다. 주체와 객체가 은빛화됨으로써 일체가 평호와 안정으로 합일되는 세계이기를 갈망하는 기원일수도 있다.
「흰 옷」은 “당신을 뵈오려고 흰 옷을 입고, 내 사슴 팔뚝을 희게 문신하고, 흰 꽃 뿌리드리우고, 마침내 눈이며 입술이며 흰 피로 ...불꽃이 하얗게”이다. 그의 시는 절대자인 당신에 대한 신앙 고백의 절정을 이룬다. 우선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이고 온 몸을 희게 문신하고 마침내 누에고치처럼 정결화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끝없는 자기고백, 속죄를 위한 고행의 몸부림, 그런 과정을 통하여 뜨거운 불꽃이 오히려 하얀 구원의 변신이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영지 시조는 신앙적 차원의 은빛 언어로 채색화되어 있지만 신앙시가 빠지기 쉬운 교회적 강박관념이나 경건함의 엄숙함 보다는 오히려 서정적인 연가풍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서정을 당신을 님으로 표현하면서 백색뿐만 아니라 붉은 색, 보라색, 푸른색 등을 동원하게 되고 해와 달, 하늘과 바다, 그리고 백합화, 목련꽃, 앵두꽃, 복사꽃, 꽃사슴 등의 사물들을 빈번히 소재로 인용하고 있다. 그만큼 시의 순수성을 시의 색상 이미지를 통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한다.
겨울 하늘에 한 마리 학이 파아란 창공을 나르며 고고하게 우아하게 새하얀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으 난다. 이미 지상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고, 그래서 세계는 평화와 은총으로 가득찬 정결한 모습이다. 새벽기도를 통한 그의 지속적인 상상력과 끈질긴 인내를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