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봉과 물에 대한 이황의 시에서의 의태어
물의 의태어로 이황 퇴계는 시조 작품을 지었다. 이황은 그의 고향 마을의 산인 청량산을 늘 오르내리었다. 느슨함이 전혀 없는 S자 형태의 가파른 청량산을 시조로 지었다.
다음은 이황 퇴계의 시조이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峰)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훤사(喧辭)하랴 못 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떠지지마라 어주자(魚舟子) 알까 하노라
- 이황 「청량산 가」
청량산 12봉우리 아는 이 나와 흰갈매.
갈매기 떠들건가 못 믿을 복숭아 꽃.
도화야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떠들지마라 어부마저 알까봐.
- 이황의 「청량산가」이영지역
낙동강이 휘감아 도는 봉화의 청량산은 암벽이 불쑥불쑥 솟은 바위산이다. 웅장하지도 높지도 않지만 연이어 솟은 바위 봉우리와 기암절벽이 잘 어울려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릴 만큼 산세가 수려하다. 청량산의 청량사를 중심으로 청량산 육육봉(12개의 큰 봉우리, 작은 봉을 합하면 36개의 봉우리)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66봉이란 이름은 주세붕이 붙인 이름이다. 봉우리들은 꽃잎이 돼 청량사를 꽃술 삼아 한데 감싸 안은 꽃 형상으로 된 절경의 산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청량산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아 지은 시 「육육봉」을 꽃, 복숭아 꽃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의 거대한 자연인 산을 꽃으로 의태화하고 이 모양이 물에 비추이면서 떨어지며 물 위에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는 묘사를 통한 이 의태어는 물과 산과의 조화를 아주 높은 하늘에서 보아야 보이는 절경이다. 물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으면서 도화와 흰 갈매기가 있음을 보아 물이 있음을 은유하면서 삶의 깨끗함이 곧 맑은 물의 깨끗함과 오버렙되는 하이퍼성을 가진다.
66봉봉우리가 복숭아 모양이 되어 있어서 차원높은 하이퍼성으로 시작하였다. 겉으로, 곧 시의 외연은 물에 떨어진 복숭아 꽃의 아름다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물과는 상관없는 마음의 상상력의 시로서 그의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력의 하이퍼성이 된다. 곧 현실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시적 특수성으로서의 가상현실이기 때문이다. 직설적 해석으로 할 때 아름다움의 그 정도가 아름답기에 혹여 물에 떨어지면 고기잡이 하는 어부들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걱정한다는 것이다. 이 아름다운 산을 속세의 뭇 사람들이 알고 어지러히 드나들까 두려워 백구의 비상과 도화의 낙화의 아름다움을 떠들 어부를 염려하는 고도의 은유적 표현으로 의태어의 극치이다.
육육봉(六六峰)의 이름들은 원래 불교적 이름들이 많았으나 소수원을 지은 주세붕이 이들 이름을 다수 고치었다. 이 시조에서 주자학적 도가의 멋을 부린 시조는 퇴계의 산 사랑이면서도 불교적 냄새를 내지 않고 있다. 육육봉의 이름을 대부분 고친 주세붕은 이미 그 당시 불교이름을 보다 더 민속적이게 고치려 하고 실제 산의 아름다움에 맞게 하려 하였다. 이황 퇴계 의 청량산가는 중국 황정연의 필요없는 말의 절제를 나타냐면서도 중국의 율시가 아닌 시조로 물의 의태어를 통하여 작시하였다.
그러나 12봉 이름이 중국의 바위들을 그대로 옮겨 온 것들도 있어서 그 때의 사상이 전여 중국과 무관하지 않음을 보인다. 물론 눈에 보이는 바위모양을 따라 이름이 지어지면서도 중국의 산악과도 무관하지 않아 중국문화권의 영향이 있음을 드려낸다.
다음은 66봉의 이름(인터넷 자료에 의하면)의 내역이다.
① 경일봉(警日峰)은 750m 매년 춘분과 추분에 경일봉에서 바라보면 해가 한가운데 뜬다하여 이름지어진 것으로 동방에 해가 떠서 빛난다는 뜻인 인빈욱일(寅賓旭日)이 있으므로 주세붕이 경일봉이라 하였다. 연(지금의 석탑자리)대의 정동쪽에 위치한다. 자소봉 서남쪽에 위치한다. 경일봉은 3층으로 아래에는 김생암, 대승암이 있다.
경일봉 위로 해 솟으니 선계가 분명한데
66그 봉우리 뚜렷이도 솟아있네
세찬바람 몰아닥쳐 낙엽들 소용돌이치니
수줍은 듯 첫 눈은 당황하며 놀라는가
경일봉 햇살 이 가슴에 가득담고 나니
어찌 도 무얼 구하고 바라겠는가
- 록담 류호선
② 금탑봉(金搭峰)/치원봉(致遠峰) 620m 경일봉 동남쪽 위치한다. 원래 이름은 치원봉(致遠峰)이다. 연대의 동남쪽 층암절벽이 3층으로 이루어져 연대에서 바라보면 3층탑과 같다. 중층에 치원암, 극일암, 안중사, 상청량암, 하청량암의 5암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③ 자란봉(紫鸞峰) 796m 마치 신비로운 새가 춤추는 모양같아서 붙여진 이름으로 선학봉의 동쪽과 내산 경계에 위치한다.
④ 탁립봉(탁립봉) 경일봉 위에 바깥 뒤쪽 돌봉우리이다. 내산의 주봉인 자소봉에서 바라볼 때 동쪽 끝이 높이 보이는 봉우리이다. 청량산 동쪽 맨위 뒤쪽이 탁립봉, 중앙이 경일봉, 아래쪽이 금탑봉봉이다.
⑤ 자소봉(紫峰) 845m 푸른 바위가 천길이나 높이 솟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연대의 뒤쪽이며 내산의 종주가 되는 봉우리이다. 봉우리 중간 동쪽이 평평한 반석으로 되어 있어서 등산객이 2-40명이 앉을 수 있는 봉우리다. 청량산의 세 번째 높은 봉우리이다. 원래는 보살봉인데 주세붕이 고친이름이다.
⑥ 탁필봉(筆峰) 820 붓모양봉우리
자소봉에서 2-30m 봉우리 전체가 뾰죡한 돌봉우리로 되어 있어서 붓같다 하여 옛날에는 필봉이라 하였는데 주세붕이 탁자를 더하여 고침. 문필봉이라 하기도 한다.
⑦ 연적봉(硯滴峰) 850m 연적모양봉우리
탁필봉 5-6m에 나란히 서 있는 봉우리, 정상이 평평한 것이 연적 모양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 천여리를 바라볼 수 있고 10여명이 앉을수 있다.
⑧ 의상봉(義湘峰) 876m
연대의 서쪽에 위치한다. 암벽의 층 모양이 처음 피어나는 연꽃모양 같다하여 연화봉이라고 한 것을 주세붕이 고침. 앞뒤 봉우리로 되어 전 연화봉, 후연화봉이라 한다. 불가에서 말하는 의상이라는명칭을 주세붕이 연화봉으로 고침(遊淸凉山錄)
⑨ 향로봉(香爐峰) 846
연화봉 서쪽에 있는 돌봉우리로 향로모양으로 생기었다 하여 주세붕이 지은 이름, 아래 자비대에서 바라보면 전경이 보인다.
⑩ 축융봉(祝融峰) 845m 중국의 오악중의 하나인 남악형산을 본따서 지은 이름 흙과 나무가 없어서 항상 깨끗하다.
연대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세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내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주세붕이 중국의 오악중에 하나인 남악형산의 이름을 본따서 지은 이름이다. 이는 5행으로 남쪽의 화(火)에 속하고 축융은 남방의 불을 맡은 화신이라는 뜻이다. 청량산의 봉우리중 두 번째로 높은 산으로 이 봉우리에서 바라보면 전경이 그야말로 아름답다. 산 위는 평평하여 여러사람이 앉을 수 있다. 흙과 나무가 없어서 깨끗하다. 이곳에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⑪ 장인봉(丈人峰) 870m
예부터 청량산의 주봉은 장인봉으로 불리어졌으며 의상대사가 수도하던 의상대와 의상굴이 있어서 마을사람들이 의상봉이라 부름과 같아서 의상봉이 되기도 한다.
⑫ 선학봉(仙鶴峰) 장인봉에 동쪽에 있으며 외산산봉의 가운데 봉우리이다. 학의 집이 있다하여 주세붕이 선학봉이라 이름하였다. 산 모양이 마치 학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 밖에도 자소봉의 중층,만월대 앞에 있는 작은 돌봉우리들을 옥소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주세붕이 66봉에 넣지 않았다. 지금 유리보전 뒤에는 반야봉과 문수봉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다. 이상의 봉중 옛날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것은 금탑봉과 연적봉 두 봉우리뿐이며 옛날의 이름을 고친 것은 장인봉(구 대봉), 자소봉(구 보살봉), 연화봉(구 의상봉)의 세 봉우리이고, 이름이 없던 것을 새로 명명한 것이 선학봉, 자란봉, 축융봉, 경일봉, 향로봉, 탁립봉 등 여섯봉우리이다. 옛날 이름에서 한 자를 더한 것이 탁필봉(구 필봉)이다.
이렇듯 청량산의 옛 이름은 봉우리 자체가 보살의 현신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주세붕 이후 열두 봉우리가 명명되어 지금에이르고 있다. 곧 유불문화의 잔여기록이 되겠다. 계곡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할 정도의 산세 급경사를 이루는 산 봉우리의 집합체인. 청량산을 이루는 12개(일명 육육봉) 봉우리를 예안이 고향인 퇴계 이황 선생이 청량산의 아름다움을 「청량산가(淸凉山歌)」로 시조의 의태어로 작품화하였다.
그런데 주세붕이 명한 열두봉우리의 이 12는 신화소로서 하이퍼성을 지닌다. 봉우리가 더 있는데도 굳이 12봉우리라 한 것은 12에 대한 하이퍼시의 현실성이다. 성경에서의 신화소 12제자를 비롯하여 일 년 열 두달, 물건들의 12개의 한 묶음, 김지향시와 홍문표시, 그리고 이상시에서에서의 시어의 의태성으로 연구한 바 12수이다.
이 12는 신성수로서 전 세계적인 것을하나로 묶을 수 있는 하이퍼성이다. 성경에서도 12제자와 이 열두제자중 가롯유다가 배반하자 그를 제명하고 한 사람을 더 세워 12제자로 삼는다.
2) 맑디맑은 물에 대한 의태어
이처럼 시적 표현으로 맑디맑은 물에 대한 이황의 관심은 시에 대한 묘사를 나르시스로 한다. 시에서의 묘사는 물에 대한 나르시스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존재로 접근되는 시의 아름다운 발상이다. 시인의 삶을 열정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삶의 눈으로 바꾼다. 맑은 물을 절대화하는 그의 시심은 그의 본향 가까이 있는 강을 가까이 한 삶을 살면서 고고하고 높은 자신의 삶이 그대로 직설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비유되면서 묘사된다.
이 때문에 청결함을 삶의 기본으로 하는 이황시인의 삶의 모습으로 바꾼다. 더 나아가 물의 반영 앞에서 하는 자신의 마음은 물가에서 물이 스스로를 나를 비추는 보석이 된다.
이황은 물을 대하면서 마음이 음이 안정되는 의미로 하이퍼성을 드러낸다.
다음 문학작품은 물가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안정을 묘사했다.
露草夭夭襓水涯(이슬에 파아란 풀이 제잘제잘 물가를 둘렀다)
小塘淸活淨無沙(아주 작은 연못 맑디맑아 모래도 안 보이고)
雲飛鳥過元相管(새는 하늘 구름을 치며 날지만)
只惟時時燕蹴波(나는 제비가 맑디맑은 물결칠까 정말정말 두렵다)
- 이황의 『退溪集』「野塘」*이영지 역
물이 마음의 상태를 다스리게 한다는 묘사는 아주 작은 고요한 연못가에서 얻어지는 위대함의 경지 곧 하이퍼성의 발효물질이다. 이처럼 아주 가난한 마음이 행복이 되는 것은 향기를 읽을 수 있는(溪居雜興 끝 수)데 있다.
이영지의 가계는 이황 이퇴계와 이어진다. 이영지의 시조작품에서 그 가계잇기가 이어진다.
그리고 즐겨 지었던 시조로서의 그 명맥 유지이다.
부석사 義湘大師 지금도 살아있는
鳳凰산 대나무 숲 탑두리 두르면서
선비화 지팡이 짚고 숲실잇는 한밤실
우수골 지나면서 당고개 이르면
박열린 초가집이 소백산 보다 낮아
비기실 한걸음물러 梅岩亭이 보인다
龍頭골 용트림을 들어으며 자라나서
과수원 꽃잎하나 입에 문 딸이 되어
방골도 밤(栗)고을로 꽃줍듯이 사는(生) 시
河岩할베 우리 할베 퇴계어른 후손이라
소백산 사그리에 그 폭포 넘어오면
落河岩 바위하나가 부석사로 남았네
- 이영지 「浮石寺」
- 1985. 8. 31일자 중앙일보 내고향 시조기행에 발표
*국보 18호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본전인 이 무량수전은 국보 45호인 석가여래좌상이 봉안, 영풍군부석면 북지리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 (676)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
당신이 펴 놓으신 우물물 한 모금을
마시고 왔습니다 더러는 가랑잎이
덮혀서 있었지만은 햇빛이 든 물 먹고
빛만을 잉태해서 돌아와 낳자마다
해동인 땅에 앉아 솔잎이 되어서도
맨살로 빛을 가슴에 안아들기 시작해
나날이 갈수록에 잎들이 둘러서며
하늘안 보일정도 가슴에 빛소리가
새어나 울려퍼져서 나갑니다 당신이
숲으로 덮여있는 해동이 찾아들어
되돌아 다시오는 강줄기 바라보며
의자에 하루종일을 앉아서들 있으면
빛바람 사이사이 울리어 부자인데
낮은데 물러앚아 해동이 하늘바람
이름을 "당신께서"라고 지어놓고 기뻐서
맨살의 덩어리로 빛되어 개울가에
흐르며 물덩이로 해동이 해 덩어리
가슴이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떠 먹는
- 이영지 「도산서원 1」- 새벽기도 · 1515『하나님의 행복한 연출』(서울: 영예문학, 2004), 42.
한걸음 물러서는 님으로 하여서도
그곳의 물자리는 그리움 차차익고
흐르는 따사로움이 구름구름 몰려와
몇며칠 몸져누워 생각에 생각더 해
이제는 너에게로 달려갈 일 뿐이라
서른채 지붕위에는 구름구름 몰려와
한석봉 새겼다는 당신의 구름구름
그 원은 무엇인가 그 산은 어디에서
얼만큼 높으냐하며 도산 쓰는 손떨림
- 이영지 「도산서원 2」『행복몸이 숨쉬는』 (서울: 영예문학, 2010).
진성이씨로 본을 같이 하고 있는 이영지 부모님의 고향이 이퇴계의 형 온계의 23대 손이다.
퇴계는 형을 만나기 위해 죽령경계선을 중심으로 만났다. 그 때 만나 지은 시가 전해진다. 이황 퇴계는 죽령 옛길에 시로 한시로 「촉령대」와 「소혼교」를 세워놓았다.
영영한 물소리 정 넘쳐 흘러나네
우뚝 선 봉우리는 이별한 쌓은듯이
소혼교 안영협 골짜기 우리둘이 나눈 정
– 이황 「소혼교」 이영지 역
형님을 염려하여 부디 근무 잘 하시라
촉대를 만들어서 우리형님 충청감사
행차에 대 만들어서 보내노라
- 이황 「촉령대(矗玲臺)」 이영지 역
온계와 퇴계 형제는 소혼교 다리 자리 곧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갈라서며 온계는 충청도로, 퇴계는 풍기군수로 공무를 보기 위해 서로 헤어지고, 또 만났음이 현재까지 한 시로 소혼교와 촉령대에서 전해진다..
그분들의 후예인 이영창은 이 길을 넘으며 다시 이 비 앞에 서 있다고 수필가 이영창은 수필을 남긴다.
이퇴계는 형 온계가 있었는데 그 때 당시 충청감사이었다. 이 퇴계도 풍기 군수이었을 때여서 두 형제는 죽령경계선을 중심으로 서로 만나 형제애를 돈독히 하였다. 퇴계는 그 기념으로 시를 지어 놓았고 현재까지 전해진다.
퇴계어른은 죽령 옛길에 촉령대와 소혼교를 세워놓았다.
「소혼교」 「촉령대」
온계와 퇴계 형제는 소혼교 다리 자리 곧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갈라서며 온계는 충청도로, 퇴계는 풍기군수로 공무를 보기 위해 서로 헤어지고, 또 만났다.
이러한 형제간의 우애는 형을 염려하여 부디 근무를 잘 하라고 촉대를 만들어서 우리형님 충청감사행지 때에 만들어서 보내노라는 촉령대(矗玲臺)가 현재까지 전해진다.
이 두 시 모두 이황 이퇴계가 그의 형 온계와 서로 만나서 헤어지는 장소에 지금도 세워져 있다. 그분들의 후예인 나도 오늘도 이 길을 넘으며 다시 이 비 앞에 서 있다.
형제간에 만나면서 그 기념으로 시를 지어 놓았던 일을 보면서 나의 옛 어른이라 더욱 감회가 깊다. 나도 다소 삶이 권태로울 때 찾아와서 옛 어른들을 만나는 마음으로 잠시 차에서 내려 기념비 앞에 잘 앉는다.
이 길은 죽령 옛 길에 있다. 제7길 죽령 옛길로 정해져 있다.
내 고향 부석에서 풍기를 지나 서울로 나들이하는 3대 관문중의 하나인 죽령은 문경세제보다 47m 녹다. 추풍령보다는 454m더 높다. 죽령이라는 이름은 아달라왕 5년(158)에 죽죽이란 사람이 길을 열고 지쳐서 순사(殉死) 했다고 한다. 고개 마루에 죽죽을 제사 드리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죽령 옛길에 세워진 촉령대 소혼교는 고향 예안을 오가는 충청도관찰사 온계를 풍기군수 되계가 만나 형제간에 회포를 풀던 주변은 온달 장군의 전사지가 있다. 그리고 농암 이현보와 신재 주세봉의 사연도 있는 곳이다. 곧 풍기 소수서원과 관련된다. 이 죽령에는 죽지랑가에 얽힌 죽지의 애타는 사랑도 있다. 지금도 이러한 이야기 전설 등을 찾아 묻혀버렸던 길을 개척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죽령에는 주막도 있다. 죽령 주막은 죽령이 높고 험하여서 이 길을 가다가 날이 저물면 자고 가거나 타고 가던 말을 갈아타던 마방이 있다. 나도 이 길에서 맑은 하늘을 보며 구름한 점을 같이 불러 이야기를 나눈다.
술맛 좋기로 소문난 곳에서 술 한 잔을 먹고 고개 아래 첫 마을을 들면 셋골이 있다. 깊은 골짜기에 없을 듯 걸려 있는 그림 같은 산촌을 지나 용부원리 옛 도로를 따라 마을 쪽으로 내려가서 만나는 보국사지는 신라가 고구려를 침공하고 영토를 확장한 다음 마을 사람들을 다스리기 위하여 지어졌다.
나의 고향에는 제 2길 죽계구곡길도 있다. 순흥 죽계구곡은 영조 때 순흥부사 신필하가 주희가 죽계천에 붙인 이름이다. 초암사에서 제1곡이 시작되어 개울물을 따라 삼괴정까지 제9곡에 이른다. 이퇴계 어른은 소수서원 앞을 제1곡으로 국망봉 등산길이 갈라지는 지점까지를 제 9곡으로 지정하시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백운동, 취한대, 금단반석, 백우담, 이화동, 목욕담, 청련동애, 용추비폭, 금당반석, 중봉합류라고 하셨다.
초암사는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초막을 말한다. 이 길을 제3길 달발 길이라 한다. 퇴계 어른은 동쪽 옥녀봉과 서편 완적봉을 청룡백호로 싸인 초암사에서부터 오솔길이 나타나는데 길을 따라 300m쯤 올라가면 퇴계 이황이 걸었다는 숲은 숲길이 있다. 이 길을 들어서면서부터는 개울과 길이 하나가 되는 깊은 협곡이 계속되는데 숲속에 감추어 흐르는 개울은 여름에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추위를 느끼는 곳이 바로 이 달밭계곡이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길은 금방 목욕탕을 나오는 아가씨의 깨끗한 몸과 같다는 느낌이 든다. 깊이 쌓인 낙엽, 울창한 숲, 외나무다리, 돌다리를 따라 나도 이 길에서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시간을 좋은 시간을 보낸다. 신라 문무왕 29년(680) 의상조사가 영전사에 거주하면서 문도라는 제자와 함께 창건하였다.
굽이굽이 서려 있는 길에서 나는 지금도 이 길을 오가며 사는 행복을 누려서 감사하다.
- 이영창 수필 「온계와 퇴계의 형제우애」이영창 ▪수필가. 경북 영주 부석 출신 ▪「창조문학」수필 등단(2003) ▪경북 영주 부석 농협장 역임 ▪메암 드림농원 경영.
이처럼 증명되어지는 이황 퇴계와 본을 같이 하고 있는 이영지 시조의 작품은 주로 시조작품을 택한다.
이 또한 이황 퇴계가 즐겨 작품을하였던 시조의 문학장르와 도 동일하다.
한국언어의 특성은 특히 시조에서 드러나고 있다. 시조 장르는 이미 신라시대부터 3대목과 연결지어지는 고유의 한국문학장르이어서이며 이 연결이 현대에도 이르고 있다.
정제된 시조작품 속에서 특히 의태어가 가지는 아름다운 시어들은 한글의 독특성인 물의 의태어에서 중국 강서시파의 황정견 문학과 관련할 때 이황 퇴계와 그 후손의 이영지 시조와 연결점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이 기대감은 어떻게 비교연구될 지에 대한 흥미에 있게 된다.
따라서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의 시조가 가지는 물의 의태어의 작시되어진 현대시조로서의 시적 가치유지와 시조의 초장과 중장의 관계 그리고 필수조건인 종장에서의 그 원리가 신라시대의 기록에서부터 이어지는 연결점이라는 점에 전통성명맥을 잇는다는 큰 과제에도 기여하리라는 확신에서이다.
이러한 결과는 대립이 아닌 이것이 옳으냐 저것이 옳으냐의 대립성이 아닌 두 개의 세계를 아우러서 그 해답을 제 3에서 얻는 방법이다.
이 특징은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시조의 리듬체계이다. 중국이나 불교권이 가지고 있는 리듬체계와는 다른 시조의 초장과 중장과 종장의 문학을 통하여 그 해결점을 찾는다는 철학성이 내재한다. 이 논문은 이로하여 상응이 대립의 원리와 철학을 넘어서서 이를 극복하는 시조문학에서의 종장이 갖는 상승의 원리
종장 상승원리이자 철학이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화 되는데에도 이러한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그 깊은 내면이 5천년 역사를 이어오는 정통성이기도 하다 .
초장과 중장이 상응의 원리라면, 초장과 중장이 서로 각기 다르면서 그 특징을 다르게 나타내는 원리라면 종장은 이 서로 상반된 초장과 중장의 관계가 합하여져서 나타나는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의 상승성 지향이다.
중심자리는 셋이 모이어 하나가 되는 리듬을 가진다.
* 표 3: 한국 전통시에서의 3은 한국 전통시인 시조의 종장자리 다섯째의 중요성으로 의미는 중심자리이며 한국 시조의 종장 자리는 정서를 강조하는 자리이다.
셋이 모이어 하나가 되는 자리 즉 한국 시조 종장의 자리는 감탄어법으로 ‘아희야・어즈버’ 등의 감탄구로 쓰이었고 그 서열은 5째 자리이다.
얻는 결과는 시조의 종장이 가지는 가치로 하여 초장과 중장의 갖는 깊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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