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룻 이정님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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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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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정님 |
조회: 1115 등록일: 2015-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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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꾼 인생의 한 사건
지금도 눈을 감으면 저 멀리 들판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추며 학교길을 오가는 아이가 보인다. 무엇이 그리 즐겁고 좋아서 춤을 추며 노래를 흥얼거렸던 것일까.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행복에 있어서 그렇다던가 그런 것을 알 리 없는 아이는 그냥 무의식에 의존해서 저절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껏 의문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에 태어난 나는 우리 민족이 모두 그랬듯이 가난한 살림속에서 자라야 했다. 문명의 이기(利器) 하나 없는 시골에서 태어나 누가 무용하는 것을 보았을 리도 없다. 그런데 나는 춤추기를 좋아했다. 그것이 춤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만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흔들고 휘저으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놀기를 좋아했다.
걸음을 걸을 때도 한 발 한 발 떼어놓는 것이 아니라 깡충깡충 토끼처럼 뛰며 리듬을 탔다 . 한 발에 한 발자국이 아니라 한 발에 두 발자국을 떼어놓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저것이 무엇이 되려고 얌전치 못하고 수선이냐고 나무라셨지만 나는 그것이 좋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면 그쪽에 소질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 말은 맞다. 소질이 있어서 좋아하게 되는 건지, 좋아하니까 소질이 생기는지 무엇이 앞뒤인 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나는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좋았다.
어린 것이 조순하지 못하고 저 모양이니 자라면 무엇이 되려는지 부모님은 많이 걱정이셨을 것이다. 그러나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꿈이란 말조차 모르고 좋아는 했으나 꿈이 익기도 전 사라진 나의 꿈!
그렇다. 무엇을 꿈꾸고 해보겠다는 의지를 키우기 전 무산된 사건의 계기는 6. 25. 사변이었다. 나의 꿈은 나래도 펴보기도 전에 그저 어린 것의 막연한 동경으로 끝맺음 했으니 지금 돌아보면 애처롭기 까지 하다. 배어보기도 전 유산이 된 셈이니...
사변이 나면서 우리 집안은 이상한 회오리 바람에 휘말렸다. 일제 강점기 애국운동 독립운동에 물심양면으로 심혈을 기울인 조부님은 해방이 되자 독립운동이 이뤄낸 정부와 견해 차이를 벌이면서 자동 남로당으로 편입되셨다.
사변이 터지고 북쪽에서 밀고 내려왔을 때 조부님은 저들의 이용목적에 의해 외부로 노출이 되었는데 곧바로 국군의 북침이 이뤄지면서 조부님은 총살을 당하셨다. 나는 그 얘기를 부친으로부터 수없이 들어 눈앞에 그림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그 장면이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곤 한다.
민족상쟁의 역사! 정말 이런 것은 두 번도 없어야 할 일이다. 살아남기 위해 가면을 써야하는 일도 많다. 특히 이문열의 소설 ‘영웅시대’에서 주인공의 모친이 사상이 불온한 아들 (이미 공산당이 잘못이었음을 알고 회향 했는데도) 때문에 공산당이 싫어하는 기독교 교회를 택해서 나가는 일은 신앙 이전에 호신용이었다.
그런 차원은 아니지만 부친은 밥을 먹고 살기 위해 정치하고 무조건 거리를 두기 위해 한의학을 공부하고 한의사가 되셨다. 집안의 어려움은 나아져갔다. 그러나 춤만 추며 살 세상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된 나는 부친의 권유로 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이 첫 번 째로 내 인생을 바꾼 계기였다.
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초등학교 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큰 사명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병아리 교사로 있을 적에 결혼을 했고 그런대로 행복했다. 첫아들이 뇌성마비로 태어나면서 힘든 결혼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늘이 내려앉는 거 같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장애인 교육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대학교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한 후 장애자를 위한 봉사활동과 함께 교사직을 감내하며 아들도 잘 키워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을 맞았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교육자의 삶을 산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 생활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글 청탁이 오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도 덤으로 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삶을 꿈꾼 적이 없다. 그렇다고 내가 살아온 삶을 후회한다는 뜻은 아니다. 어쩜 더 보람차고 잘된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내 속 어딘가에는 아무도 못 막는 바람기가 숨죽여 있는지 지금도 춤추는 일이 좋고 노래하는 게 좋다. 하다 못해 노래방이라도 가서 노래 부르길 동료나 친구들보다 더 좋아한다. 춤이래야 노인들 건강을 위한 댄스 스포츠거나 웰빙 댄스라는 이름의 것이지만 이것이 나는 신나고 재미있다.
음악에 곁들이는 춤과 춤에 곁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음악은 쌍둥이처럼 붙어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나는 좋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마음을 글로 쓰면 시나 수필, 소설이 되지만 마음을 몸으로 나타내면 춤이 된다. 마음을 물감으로 그리면 그림이 되는 것처럼.
이제 세월이 흘러 노년에 이른 지금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누구였던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었던가. 꿈이 없으면 이 백성이 망한다고 성서에 있지만 꿈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나이에 가졌던 막연한 동경을 이루며 살지 못했어도 나는 여기까지 인내하며 보람속에 잘 살아왔다.
그리고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나를 바꾼 일이 단 한 번 뿐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형편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인생은 혼자의 결단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제 삼의 요소와 합작이 아닐까 싶다.
제 삼의 요소를 운명이라 이름할 수 있다. 첫아이가 뇌성마비였다는 사실 앞에서 겸손과 인내를 배웠고 장애아 교육 연구에 진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생각도 못해본 일이다. 내 인생의 계획에 없던 일이다. 다만 삶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최선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 가치관으로 정립된 오늘이다. 그것은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철학이다.
사족(蛇足)으로 유명한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이 자기가 탄 차의 바퀴에 스카프가 말려들어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대목에서는 내가 무용을 안 한 것이 다행이었다는 변명도 달아본다.
실버넷뉴스 이정님 기자 leeruth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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