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이 치는 자 많사오니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의지하리다.)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찬송해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의지하였는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어찌하리까) 5.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6.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7.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피하리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찬송하리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의지하였는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 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신의 문학, 구원의 문법 65
시편 56편
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사람이 나를 삼키려고 종일 치며 압제하나이다. 2. 나의 원수가 종일 나를 삼키려 하며 나를 교만이 치는 자 많사오니 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의지하리다.) 4.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찬송하올지라. (찬송해올지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의지하였는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어찌하리까) 5. 저희가 종일 내 말을 곡해하며 내게 대한 저희 모든 사상은 사악이라. 6. 저희가 내 생명을 엿보던 것과 같이 또 모여 숨어 내 종적을 살피나이다. 7. 저희가 죄악을 짓고야 피하오리이까. (피하리까) 하나님이여 분노하사 뭇 백성을 낮추소서. 8.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9.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가 물러가리니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인 줄 아나이다. 10.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며 여호와를 의지하여 그 말씀을 찬송하리이다. (찬송하리다.) 11.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의지하였는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12.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 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13.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 하셨나이까.
해설
지금까지 시편 1편~56편까지를 살펴보았다.
시편을 볼때마다 그럴싸하면서도 딱히 꼬집어서 무엇이다. 이것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고기에서 혹은 생선에서 가시를 발라내는 것만 같다는 표현을 애매하게 써왔다. 하지만 이제 좀 더 구체적이면서도 확신적인 물꼬를 잡았다.
항상 이게 뭘까? 뭘까? 충만한 고민에 익숙해져만 가고 있었는데 급기야 찾았다.
영 -> 말 -> 운동력 -> 형체(형상) -> 유익(영적인 체험)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릇에 담는 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담는 그릇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면 하나님의 말을 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것이 운동력이며 더 나아가서 형체는 말씀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고 유익은 열매라고 할 것이다. 축복의 통로이다.
또 한편 항상 시편의 대조법을 보면서 이게 뭘까? 왜 이렇게 썼을까? 수백 번도 더 고민하고 묵상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찾았다. 바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인간 이야기를 하고 인간의 앞에서는 하나님 이야기를 하는 어떻게 보면 중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상대성 원리라고 할까? 비례한다고 할까? 아무튼, 하나님은 사람을 인격체로 만들었다. 이렇게 볼 때 시편에서의 대조법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의 함축적인 균형이 아닐는지·····.
그러면서도 찬양의 통하여 인격적인 하나님의 자상하신 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시편을 간단하게 말한다면 찬양공학이라 할 것이다. 특히 하나이다, 의지하리이다, 찬송하리이다, 어찌하리이까, 피하오리이까 등의 어법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다. 선택의 의지를 통하고 있다. 그렇게 여운을 공백처럼 남겨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움직이고 옮겨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를 초월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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