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육체 안 가시의 꿈
海月정선규
오늘은 온종일 비몽사몽 잠으로 취해 있었다.
글쎄 연중행사처럼 찾아오는 것이 있다. 핏줄을 타고 힘줄에 온몸의 짜릿한 전율의 타오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의 넓힘이다. 그저 만사가 귀찮아 무엇을 하고자 하는 의욕도 떨어진다. 마치 기름이 바닥난 자동차처럼 힘을 못 쓴다. 한참을 자다 면 낮인지 밤 인지도 모른다. 때로는 슬럼프인가 보다. 고비를 맞는구나. 싶어지면서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는데 특히 왼쪽 아랫배가 아픈 대장증후군을 생각하면서 “그래, 그래, 참, 잘한다. 조금만 더 힘주면 변비에 가스에 염증 등 다 모아 속 시원하게 김밥 옆구리 터지듯 확 뱉어내거라. 그러면 매우 홀가분하겠구나.” 중얼거린다.
참으로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이 사람의 육체이다. 평소에 괜찮다 싶다가도 어느 날 난데없이 감기몸살 기운이 감도는 듯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에서는 몸살이 난 듯 온몸은 죽창에 옆구리를 찔림과 동시에 허리띠를 졸라매듯 근육이 뻐근하게 응, 응 잠재되어 통증 집중 국을 이루는 허리를 박차고 쭉 백두대간 준령을 넘는다. 그럴 때면 통증과 함께 심한 멀미가 나고 숨이 가쁘게 차오르면 나는 신이 나서 중얼거린다. “그래, 그래, 너도 참, 잘하는구나, 이 모든 통증의 멀미를 하자꾸나. 내 몸 밖으로 빼 내자구나.” 그리고는 화장실에 들어간다. 하지만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큰 둥이, 작은 둥이 그리하여 남매 둥 이와 새 록 마님이 있다. 언제까지 엄살 부리며 살 수는 없다. 오늘, 또 오늘, 하루만, 딱, 하루만 하다 보면 자신은 흐트러지고 모든 것은 한순간의 파편으로 튀어 올라 상처가 된다.
그래서 나는 내 몸의 그분이 오시는 것에 대하여 낭만의 시대 육체의 저항이라 하고 “정신 바짝 차리자, 모든 성공에는 노력의 대가 전제 아래 있는 것이 아니던가.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바로 이때가 나에게 적기이다.”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그 말이 있지 않던가? 하나님 앞에서 시험 본다고. 하나님께서 풀무 불의 금처럼 연단하신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이 과정을 인내할 때 구원을 얻어 더 좋은 것으로 옮겨주시리라. 믿은 대로 될지어다.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은근히 화가 치밀어오를 때면 화장실 좌변기에 앉아 엉덩이에 힘을 꽉 주고는 이런 생각 한다. “
변비야! 나와라. 이제 너 상대하기도 힘들다. 어떤 사람은 너 때문에 화장실에 앉아서 빈 담배만 피우고 나온단다. 이제 우리말이야 합일점을 찾아보자.
같이 하나가 되는 합의를 이루자.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살지 않겠니. 음! 변비 네가 막히는 일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일로 우리는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그래 우리 확 터놓고 살자. 너는 대장을 터놓고 나는 마음과 생각을 터놓는 대화에 함께 참여하는 행복으로 살아가자 구나.” 참 내가 나를 생각해도 멋진 사나이다. 이 얼마나 인자하고 자상한가? 그렇지 않아도 지금 머리가 좀 아프다. 성경은 문학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주장에 아니다. 성경도 문학이다.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혹은 내가 이단이 되지 않을까? 참, 이러다가 아예,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이 쓴 문학으로 치우쳐 잘못된 결과를 낳는 것을 아닐까.
작가의 고뇌와 작가의 양심 아니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쓰임 받은 후에 버림당할까. 온갖 마음이 난무하여 내 분별력이 약한 것은 아닌지.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겸비하고 돌이킬 뜻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편. 서신서. 욥기. 역사서, 애가 등에는 다분히 문학의 바탕이 깔렸음과 복음서의 예수님의 많은 비유는 곧 문학의 은유적 바탕이 된다. 물론 계시록은 묵시문학으로 말씀을 묵상하여 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을 따라 문학으로 집필하면 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확신이며 주관이다. 그 언젠가 대전에 있을 때 갈 마 동 기쁜 교회 집사였던 기쁜 사랑님의 말씀이 말갛게 떠오른다.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글 쓰는 일인데 자네가 어디 가서 흙을 파겠는가? 대한민국 사람이 다 자네가 글쟁이라는 것을 다 아는데 어디 가서 떠돌이 직장생활 하겠는가? 다른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이니 끝까지 정진하고 또 정진하세.” 그렇게 기쁜 교회에서 헤어진 후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때 그분의 말씀을 듣다 보니 착한 청지기가 떠올랐다. (눅16:1-8) 청지기에 대한 말씀이다.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
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
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말이니 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
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 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 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 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
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을 주셨다.
그래서 나는 결단에 이른다.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문단을 떠나 기독교문학으로 그래 어차피, 내가 하나님께 약속한 성시를 쓰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선택이 좋겠다고 확신을 얻은 것이다. 그 당시 인터넷에서 만난 서경화 전도사는 늘 나를 들쑤셨다. 왜 시인이 되었느냐 하기에 성시를 쓰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삶의 목적이라 했더니 말끝마다 어디 성시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처럼 말했다. 바로 그게 아쉬웠다. 차라리 내가 신학을 더했더라면 완벽했을 텐데. 한쪽 구석이 부족하다 싶을 때 눈치 빠른 서경화 전도사는 애써서 동대전성결교회 여전도사를 전화상으로 소개해주었던가 보다.
그러나 그게 급한 것이 아니라 절차가 이었다.
보통 사람은 연시 즉 사랑 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이 큰 오류점이다.
서정시가 모든 시의 기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성시가 나올 리가 만무하다.
성시에 들어갈 형상이나 묘사에서 배경 등 서정적으로 그려야 할 부분들이 있다.
그래서 처음부터 성시를 쓴다는 것을 무리이다.
애가를 보자.
그 어떤 사물에 빗대어 비유적인 은유를 포함하고 있다.
연시도 서정적으로 묘사해야 맛깔스럽고 들쭉날쭉 옮겨가는 맛이 나는 법이다.
어느 날 서경화 전도사에게 전화가 왔다.
“시인님! 지금도 시를 쓰시나요?” “예 씁니다.” 모든 대화는 성경 풀이하듯 이루어졌다.
그러나 답은 언제나 없었다.
왜냐하면, 서역화 전도사는 성경에서 박사이지만 반대로 나는 성경에 문학을 접목해나가는 새로운 문학의 장을 열고자 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으니 무조건 성경의 틀에서만 뱅뱅 돌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화하다 보면 답답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며 내 생전에 절대 여자 목회자와는 사귀지도 결혼할 일도 없으리라.
종다리처럼 중얼거렸을까.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전화가 왔다.
"시인님! 시인님은 성시 쓰실 거예요. 기도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시인님이 쓰신 성시를 보여주셔서
다 읽었답니다. 하지만 때가 아니라 내용을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기도드리겠습니다."
딸각 전화는 끊어졌고 플래닛은 폐쇄되어 아주 연락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큰 힘이 되어 주고 떠났다.
이왕이면 기독교 문학으로 가까워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은 마음으로
깊은 생각에 빠졌고 결국 창조문학. 창조문예 카페에 가입했으나 분위기가 어째 이게 아니다 싶게 전혀 회원들의 글이 올라오지 않는 휴면 상태에 빠져 있듯 하여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어 신춘문예 쪽으로 가닥 잡고 각 일반 신문사를 비롯하여 창조문학신문, 기독교신문에 작품응모를 했으나 모두 연락이 없었다. 그렇게 2009년 4월을 맞아 갈 때 창조문학신문 박인과 대표에게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는데 아쉽지만, 신문문예 당선이 아닌 2009년 창조문학신문 신인문학상 당선에 응하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는 듯하다, 돌연 이상하게 마음이 끌려 허락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인터넷신문 뉴시스와 이어를 통해 2009년 창조문학신문 신인문학상 당선과 함께 심사평과 작품이 실려 발표 되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작품을 통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며 독자들에게 가까이 갈 것으로 내다보았으나 제목에서 풍기듯 다른 작품과는 달리 지랄, 좀 설익은 시어의 향기에 걸렸다.
그 후 실망스러운 모습으로 향인 문학 작가회의 회장님으로 계시는 우리 두산 이현기 선생님께 쪽지를 통하여 시큰둥하게 말씀 드렸더니 큰 위로를 주셨다.
"원래 크는 나무는 자르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것이라고,"
정말 창조문학신문은 새로운 문법 녹색 문법을 지향하고 있었다.
많이 생소하면서도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퇴색되어 가는 은유를 살리자.
다시 말해서 글에 긍정의 힘을 사용하여 쓰면서 은유를 살려 글을 살려내자는 것이다.
창조문학신문의 녹색 문법은 돌연 내 인생을 돌이켰다.
그래 은유, 은유, 예수님이 대가 아니던가.
이 세상에서 성경보다 더 긍정적인 영혼구원을 묘사하는 글이 있던가.
나는 기다렸다는 듯 독자적인 행보를 이었다.
신의 문학, 신의 문법의 혁명이었다.
그때 시편, 애가, 서신서, 역사서 특히 욥기를 꼽았으나 창세기 1장에서 3장으로 옮겨 가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문법을 보았다. 조사 돌림은 운율의 리듬은 하나의 변주와도 같았다.
말 그대로 가녀린 선율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그렇게 일 년을 넘겨 시편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집필을 하면서 돌연 발견했다.
바로 그것은 성경의 언어와 문법이 우리와 다르지만, 창세기 1장에서 3장의 파노라마와 비해
꼭 문장과 문장 사이 가로막처럼 막히는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