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는 복 실이다.
海月정선규
김성권 목사가 쓴 전도행전을 읽어 보면 젊은 시절 배우자를 위한 기도에서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한 몇 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복 실이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신을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어디를 가든 어느 곳에 있든 같이 가기를 좋아하고 같이 있기를 즐기는 여자, 즉 강아지 같은 여자였다. 그래서 지금의 사모를 만나서 결혼했는데
기도의 약발이 얼마나 센지. 목사가 어디를 가든지 가지 말라, 하지 말라, 반대 한 번 하지 않고 강아지처럼 졸졸졸 잘 따라다니다 보니 아주 복 실이라는 애칭을 붙여 부른다고 한다. 늘 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바라보는 아내의 사랑이 큰 힘이 된단다. 내가 처음 이 말을 들을 때 참, 이해가 안 가는 말이었다. 그렇게까지 유치한 것인가? 그런 것이 사랑인가? 그저 사랑도 못 해본 총각의 마음에는 그렇게 탐탁하지 않게 들렸다.
그런데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른다고 내가 딱 걸렸다. 나도 그 사람을 바라만 봐도 얼굴이 다 환해지도록 지독한 열병을 앓듯이 말없이 좋은데 그 사람도 나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웃어줄 때마다 내 곁을 지켜주며 지켜나가는 그 사랑이 고마워서 애틋하게 내 마음에 미소의 싹이 다 난다. 아마 이래서 남자들이 팔불출 소리를 듣는가 보다. 창밖의 매미 소리가 멀게 들린다. 하늘은 더 높이 달아나버리는 9월 영주에 온 지도 일 년을 넘겼다. 추석 명절이 돌아오는 9월 16일 그 사람 생일이란다. 하필이면 9월 16일이 추석 명절에 맞추어졌을까? 하기야 병원에서는 우리나라 달력을 사용하지 않고 양력을 사용하고 있어 그 날이 생일이라. 단언할 수는 없지만 고맙다. 태어나주고 나를 만나줘서 정말 고맙다. 추석 때 생일과 함께 당신은 축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 깊은 마음으로 분향해 올려야겠다. 나는 다른 사람의 미소를 지극히 사랑하고 좋아한다. 그래서 저 미소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무엇이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많은 생각을 해보았지만, 딱히 떠오르지 않고 다만 내가 절대 그 사람의 미소 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하여 실인 미소라 혼자만 알고 부르기로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다. 아니 살인 미소라니. 터무니없는 역사의 오류이다. 애교가 넘치는 미소, 단아한 미소, 천사의 미소, 사랑의 미소, 이왕이면 아주 고급스러우면서도 우아하고 부드러운 대명사가 되어 주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인데 어쩐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참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이때를 위하여 시인이 되었는가 싶은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예 내친걸음에 아름다운 애칭 하나 지어 주어야겠다.
여자의 향기, 풀잎 같은 여자, 긴 머리의 소녀, 뭐가 있을까? 뭐가 좋을까? 어떤 문장이 있을까? 가나안의 여인 왜냐하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멀리에서 바라보며 기뻐했다. 지금의 나도 그 사람을 멀리 아니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좋아하고 기뻐한다. 그래서 말인데 이왕 나온 김에 가나안의 여인이 어떨까? 싶은데 그다지 좋게만 들리지 않는다. 어제 3층에 물품신청서 가지고 올라갔다가 우연히 봤더니 내가 안 보는 동안에 더 많이 말도 못 하게 예뻐졌다. 그래 예쁜이, 상큼 이, 가만있어 보자. 일단 미소는 일품이고 표정에는 늘 기름진 미소에 저 멀리 달아날 듯한 가을 하늘과 같다. 과연 어떤 애칭을 주어야 하나. 그 어떤 축복의 말이 없을까? 깊은 뜻이 없을까? 뭐라고 해야 영주 바닥에 애칭 잘 지었다고 큰 소문이 날까? 남들은 시인이 애칭하나 시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 말하겠지만, 애칭에는 첫째 하나님의 축복이 들어가야 할 것이며 둘째 지극한 내 사랑의 표현이며 바라보고 기뻐하는 마음으로 고스란히 그대로 담겨야 할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축복하였으며 자식의 이름을 통하여 축복하기도 했다. 그것이 가장 내게 절실한 주안점이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시인이면 부부 싸움도 안 하고 시어를 낚으며 싸우는 줄 아는데 어디 시인이라 하여 그렇게 밋밋하게만 살아가겠는가? 그렇게 살다가는 있던 정도 다 떨어져 달아나겠다. 시인도 사람인 것을 사람도 시인도 다 그 나름인 것을 남들은 웃으면 입가에 주름이 지고 눈가에 주름살만 늘어난다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그 사람은 그런 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 그렇게 해맑은 영혼이 또 있을까?
그래서 내 눈에는 더 사랑스럽고 사랑하고 싶은 여자가 된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의 별을 따다가 혹은 달을 따다가 가장 빛이 되는 사랑으로 부르고 싶다. 사람은 이름이 좋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누구이든지 이름이 범상치 않으며 예사롭지 않은 빛이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말 한 대로 되어 생각하는 대로 따라가며 믿은 대로 된다고 했다. 그 사람은 곧 위상이 아닐까. 한 번 정하여 부르기 시작하면서부터 말의 능력은 나타나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의 이름이나 아호 또는 필명에는 지어주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담기면서 뭔가 잘 살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는다. 그것이 꿈이 될 수도 있고 축복이 될 수도 있으며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정말 이름 하나 짓는 데에도 우리는 온 힘을 다하고 온 마음에 뜻을 다하여야 한다. 이 세상에 축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에 더 말할 나위 없이 소중하고 고귀한 말로 끌어내어야만 한다. 아무리 둘만의 애칭이라 할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뜻도 없이 막말로 뱉어낼 수는 없다. 성경에 보면 쌍둥이 형제인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장자인 에서는 사냥터에서 돌아와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동생인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 권을 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나중에는 장자의 축복까지도 동생 야곱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 사람의 매력이라면 소녀라는 것이고 애교 만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축복으로 돌려줄 수 있는 말이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내게 축복이며 영광이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사랑, 사랑, 사랑이란 말은 매우 단순하고 함축적이기 때문에 어떻게 더 아름다운 표현으로 구사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게 된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고 보면 역시 믿음 없는 소망은 없으며 믿지 못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가 없다. 세상의 가장 기초적인 이론의 바탕이다. 모든 신뢰와 존경과 존중하는 마음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요소가 없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사랑은 학습이다. 곧 학습될 때에만이 우리 마음의 형상을 가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을 어떻게 하고 사랑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하는 학습은 없고 좋아하면 사랑이고 사랑한다고 말하면 전부가 되어 버리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마치 본능에만 의존하는 사랑은 쾌락적일 수밖에 없으며 오히려 쾌락으로 오래오래 왜곡시켜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든다.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함께 실현하는 것이다. 온전히 둘이 하나가 되는 방법은 성이다.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면서 마법을 주셨을까? 그것은 쾌락이 아닌 둘이 하나가 되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깊은 뜻이 아닐까?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마법을 주시지 않으셨다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리고 마법의 성에서 둘이 하나가 되어가는 것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맛을 주지 않았다면 그저 밋밋했을 것이며 실현하는 사랑이 없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착각하고 있다. 즐거워하고 기뻐함을 쾌락으로 오인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내 사랑을 아름답게 보배 합으로 열고 닫는 즐거움에 기쁨으로부터 바라보다가 기뻐하며 약속의 땅 가나안의 땅으로 들어가는 기쁨까지 누릴 것이다. “다시 한 번 9월 16일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축복하고 사랑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마음고생 한 번 시키지 않는 사랑을 죽는 그 날까지 지킬 것이다. 김성권 목사의 전도행전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랑을 배웠다. 살아가는 날을 익혔다. 이 더운 날씨에 건강하게 잘 지내시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언제 한 번 뵙기는 뵈어야 할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