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1985년 정신
海月정선규
2011년 12월 30일 향년 64세의 나이로 정치인이었던 김근태 전 위원이 파킨슨병으로 돌아가셨다. 26년 전 당한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끝내 다시 일어서서 못한 채 쓰러지고 말았다. 1983년 학생운동 출신들과 함께 민주화운동 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여 초대의장을 맡아 민주화운동을 확산시켜 나갔다. 전두환은 1985년 2월 거센 저항을 보고 척결을 지시했다. 골치 아픈 재야를 싹쓸이할 민청련과 학생들을 하나로 묶어 뿌리 뽑자는 방안이 나왔다. 바로 이것이 민청학련 사건이다. 그 결과 김근태와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하는가 하면 17명을 추가 수배하게 된다.
1985년 9월 4일 새벽 5시 30분 서울 서부경찰서 유치장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김근태는 의경이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의장 2년여 동안 그는 집회가 끝난 뒤에는 늘 유언비어 유포 등 어처구니없는 혐의로 즉심에 넘겨지곤 했다. 그는 이번에도 민청련 총회와 관련해 구류 10일을 선고받았는데 이날은 그 마지막 날이었다. 그는 이번을 마지막으로 당분간 운동 일선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할 생각으로 홀가분하게 유치장을 나섰다. 앞선 민청련 총회에서 의장직은 다른 사람이 맡기로 이미 결정된 터였다. 수사과를 지난 막 복도로 나서려는 순간 7명의 정사복 경찰이 앞을 가로막았다. 실순 스산한 한기가 전신을 덮쳤다. 마당에 나서니 시동을 켠 포니가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는 30여 분을 달려 남영동 전철역 주변의 치안본부 지금의 경찰청에 닿았고 김근태는 5층 15호실로 끌려들어 갔다. 이곳 515호실에서 그 짐승의 시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이미 많이 알려졌다. 처음부터 무슨 사건이 있어서 그가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고문자들은 김근태에게 폭력혁명주의자, 공산주의자임을 자백하라고 집요하게 강요했다. 그는 발가벗겨진 뒤 발목, 무릎, 허벅지, 배 가슴이 혁대로 묶인 채 고문용으로 제작된 칠성판 위에 내팽개쳐졌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한 죽음과의 처절한 싸움은 열흘 이상 지속했다. 고문자들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현장에서 움직이는 하수인들이 누구인지를 대라면서 고문의 강도를 계속 높여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날아들어 김근태의 심장을 물어뜯었다. 처음 사흘 동안 그는 한숨의 잠도 한 숟갈의 밥도 제공받지 못했다. 사흘이 지나면서부터 고문은 더욱 포악해지고 격렬해졌다.
그는 제2의 광주사태가 진행되고 있다고 추측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당국도 투쟁 과정에서 일정하게 존재를 인정해주던 민청련 의장에게 이렇게까지 할 수는 없었다. 일곱 번째의 고문이 진행되던 중 김근태는 마침내 고문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모든 혐의사실을 시인했다.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을 자주 만났다는 등등 그야말로 소설이었다. 그는 제발 고통 없이 죽여줄 것을 애원했다. 고문자들은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말할 테니 살려달라고 하는데 너는 죽여달라고? 그래, 끝까지 반항하는 놈 깨끗이 죽여주마.” 고문자들은 포획한 먹잇감을 들여다보고 시시덕거리는 승냥이들이었다. 김근태는 지옥의 나락에서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았다. 고문이 잠시 멈추는 틈틈이 그는 고문자들의 손목시계를 보고 시간을 기억했다. 진술서 끝에 쓰인 수사관 이름과 서명도 잊지 않았다. 김근태는 9월 20일까지 모두 10차례의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 9월 20일 마지막 고문이 끝났을 때 그는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유관순, 윤동주나 광주의 영령들처럼, 그는 처참한 상처를 입은 짐승처럼 혼자 신음해야 했다. 기댈 언덕도 부여잡을 풀 한 포기도 하나 없는 황야에 버려진 것이다. 그곳은 바깥 세계와 철저히 단절된 고립무원의 아수라 지옥이었다. 고문실을 벗어난 9월 26일, 서소문 검찰청 복도에서 김근태는 아내 인재근을 만난다. 만남의 시간은 찰나였다. 스쳐 지나가는 1분여 동안 그는 고문 내용을 간명하고 정확하게 전달했다.
발과 발꿈치에 난 찢긴 상처, 시꺼먼 발등의 전기고문 흔적을 아내에게 보여주었다. 인재근은 미처 경악하고 분노할 틈도 없었다. 이를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머릿속에 모두 담아두었다. 사실 둘은 70년대 이후 줄곧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함께 한 동지 사이였다. 남편이 구류 마지막 날 경찰서 유치장에서 사라진 뒤 행방이 묘연하자 인재근은 직감적으로 뭔가 불길한 음모가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인재근은 수사기관이란 기관을 다 찾아다녔지만, 남편의 행방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든 것이 비밀리에 부쳐졌다. 한참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검찰은 구속영장을 비밀로 청구했고 법원도 영장 발부 사실을 철저히 감췄다. 인재근은 김근태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여러 날째 잠복하고 있다가 이날 남편을 만난 것이다. 며칠 뒤 민청련과 구속학생 부모협의회 명의로 나온 고문 폭로 무릎 꿇고 사느니 서서 죽기 원한다는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모두 경악했다. 2년간 민청련 의장으로 있으면서 7번째 구류 중이든 김근태는 석방일이든 1985년 9월 4일 새벽 서부 경찰서 유치장에서 석방되는 대신 남영동의 악명 높은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9월 25일까지 23일간 불법 구금상태에서 고문당했다. 故 김 근태 전 의원은 이 시간을 짐승의 시간이라 불렀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피는 바짝 마르고 뼈는 타들어 가는 길고도 먼 여정이었던지 그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라리 죽여 달라고 호소했지만, 그들은 그에게 죽음 원하지 않았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없는 죄를 만들어 내놓고 그렇다고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원하는 그들이 짜놓은 각본에 의해 움직여주기를 원했다. 오직 자신의 의지와 행적과는 무관하게 그저 짐승처럼 시키는 대로 완전히 두 발 두 손을 다 들고 항복하고 시인하고 나오라고 요구했다. 9월 25일부터 무려 장장 23일간의 불법 구금 상태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남영동에서 7차례에 걸쳐 고문을 당했다.
그야말로 죽음보다 다 혹독한 고문이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운데 마치 한 마리의 짐승 다루듯이 알몸으로 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빌라고 물 묻은 몸을 전기로 지졌다. 뇌수까지 정말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그는 결국 그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었다. 그것이 바로 국가보안법위반혐의를 엮어 간첩으로 몰아가는 것이었다. 삼천포에서 배를 타고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남파된 형들과 자주 만났다는 황당하면서도 아이러니한 사실을 시인해야만 했다. 그는 외쳤다.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위한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 대공수사국 국장은 정형근 전 한나라당 의원 정형근의 지시로 김근태 전 고문을 고문한 이근안(75)은 자신의 전력에 대해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라 고문예술가로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것이며 애국이었고 그건 일종의 예술이었다.” 라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털어놓기도 했다. 당신 고문은 일제강점기 끔찍한 한민족 통치기술의 하나이던 고문기술을 승계 발전시킨 것으로 관절 빼기, 볼펜 꽂기, 통닭구이, 물고문, 전기고문, 외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온갖 잔학한 행위였다고 한다.
참 기가 막히고 또 기가 막혀 숨구멍이 다 막힌다. 고문을 하나의 예술이라 했다니 정말 미치지는 않고 할 수 없는 말이다. 하기야 그렇게 미쳤었기에 물고문과 전기고문에 매달려 수많은 사람을 간첩 빨갱이를 제조하는 공정이었겠지.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이라지만 도대체 그 사람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들었기에 그토록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갔을까? 어떻게 생각하면 이근안은 절대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이었으며 아직도 그 회개의 기회조차도 얻지 못한 채 모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아놓았다니 정말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세상은 미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며 미치지 않아도 미쳐버리고 마는 아주 이상야릇한 기운이 감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된다. 고 김근태 의원의 시신이 다 새까맣게 탄 것처럼 보였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그동안에 살아 있었어도 살아 있지도 못하고 고문의 흔적과 싸워야만 했던 그의 길이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권력의 앞에서는 인간의 명세표가 얼마나 되었을까? 죽여 달라면서도 스스로 죽을 수 없는 인간의 고통 그 밑바닥 정신은 어떠했을까? 밖에서는 꽃이 피고 새가 우는데 물고문에 전기고문을 당하면서 그들 앞에 절대 굴복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참았을 것이며 때로는 그만, 그만, 소리도 치고 너무 견딜 수 없어 목이 부어 제대로 말소리도 나오지 않는데 그러면 약을 먹이면서까지도 멈추지 않고 때리고 살고 보자, 살아서 때를 기다리자, 먼 훗날을 도모하자, 살아야 한다는 야망과 죽어도 그들에게 앉아서 죽지도 못하고 서서 죽일지언정 민주화를 내어줄 수는 없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내가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야말로 깊은 질곡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에서 고문보다 더 견뎌야 할 갈망의 갈증을 삼키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으리라. 그는 끝내 내일이면 나올 수 있었음에도 얼마나 고문에 지치고 고달팠던지 항복을 했지만, 그것은 진정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다. 경찰도 비밀리에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법원도 비밀리에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법정에서 고문을 폭로했다. 그러나 재판부에서는 고문의 흔적이 없다 하여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죽으면 죽으리라, 자신의 육체는 죽일 수 있을지라도 그의 정신마저 그들은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고문에 참여했던 모든 고문 경찰관은 그 죗값을 치러야만 했고 이근안 경감은 숨을 죽이고 10년 10개월 동안을 숨어지내고 있다가 끝내 자수하여 7년의 죗값을 치르고 나왔다. 이제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 1985년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5층 15호 515호 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그는 갔지만, 정신적 싸움에서는 아주 큰 승리를 얻었다. 대한민국 민주화의 거대한 촛불로서의 굵고 짧은 생으로 아직 우리의 역사와 마음과 기억 속에서 더 심하게 타오르며 살아 있다. 정말 무서운 것이 사람이라 했다. 사람은 가죽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가죽을 입고 있는 정신이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역시 그랬다. 고문기술자 이근안은 모 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어엿하게 목사가 된 것이다. 이근안 그는 예수를 팔아먹고 회개의 기회조차 얻지 못한 유다와 자가 되었다.
말하자면 정말 세상에서 가장 불쌍하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을 갖고 살아가야 하며 더 나가서는 역사 앞에 씻을 수 없는 그 악명 높은 1985년 남영동이라는 괴물로 남을 것이다. 한 시대를 같이 태어나 살면서 한 사람은 민주화의 열사로 또 한 사람은 고문기술자로 마치 양과 염소처럼 썩을 수 없는 기름처럼 갈라진 운명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고문을 예술이며 애국이라고 그토록 집착했을까? 한 시대의 희생양이라고 할까? 아니면 그냥 자신의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1985년의 철부지 아저씨라고 할까? 그의 정신은 무엇일까? 애국에 대한 집착일까? 충성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시대적인 착오였을까? 칠성판에 손과 발이 묶여 흐르는 전류에 피가 마르고 입술이 타고 목이 마르는 고통에서 흘러나오는 그칠 수 없어 목이 다 부어 말도 못할 정도가 되도록 해놓고 약까지 써 가면서 또한 비명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라디오를 크게 틀어놓고 아주 자연스럽고도 태연하게 웃고 떠들면서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정상인으로 아니 1985년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얼마나 잘 먹고 잘 살았던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해가 안 간다. 어떻게 인간이 그토록 잔인하고도 피도 눈물도 없이 사람이 죽지 않을 만큼 적당한 전류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의 경지에까지 올라갔을까?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일까? 사람이 한번 잘 쓰이면 끝까지 귀하게 소중한 보배처럼 빛을 발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다 사람의 나름인가 보다. 선과 악이 영존하는 세상에서 정말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정신이다. 故 김근태 전 의원의 정신은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아무리 미쳐도 밑바닥까지 미쳐서는 안 된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치열한 정신적인 싸움을 하며 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한다. 내 가정과 가족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이 민족과 사회의 정신을 지켜내야만 한다.
세상은 미쳐가는 것이 아니라 또한 버려져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내로서 살아가면서 구원받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