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경치
海月정선규
아침에 햇살은 나무 위로 아스라이 사닥다리처럼 걸쳐 있다. 상념의 망루로 쓰면 안성맞춤이겠다. 나는 열두 번도 더 오만 가지 생각으로 하루를 지핀다. 사람은 무엇일까?
즉 사람의 형질은 어떤 것일까? 먹기 위해 사는가? 아니면 혹시나 하고 살기 위해서 먹는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이냐? 닭이 있어야 달걀이 있고 달걀이 있어야 닭이 있는 것이라.
어떻게 말하면 공존을 거듭하여 태어나는 것이 생명의 신비이지 싶기도 하고 둥글게 살아가는 것이겠다. 싶기도 하고 참 생각은 많은데 답은 없다. 또한, 답은 하나이겠지만 말하는 사람마다 듣는 사람마다 다양하게 내놓으니 더 헷갈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기 위해 먹었는가?
먹기 위해 살았는가? 살기 위해 먹다 보니 먹기 위해 살아지고 말았다. 그리고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기 위해 꿈을 꾸었으며 마음에 생각을 품어 꿈을 낚으며 살아왔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자판을 두드리며 일상에서 소재를 찾았으며 쓰고 또 쓰고 다듬었다.
이제 시인의 꿈은 노벨문학상에 이르기까지 정진해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글과 씨름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헛된 욕망을 버리고 그날을 위해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줄, 줄, 보이지 않는 길을 쥐구멍에도 해 뜰 날이 있다고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또 들어본 쥐구멍에 어떻게 언제 해 뜰 날이 있을까? 도저히 궁금해서라도 안 되겠다.
어느 분은 그 핏줄이 무엇인지 아들이 뭐기에 아들 없는 한탄에 외롭다, 외롭다, 절규에 젖어 있다. 그 마음을 100% 다 이해는 할 수 없지만 한 번 가늠해본다. 요즘 내가 나이가 들면서 자꾸 나도 모르게 아이들이 좋아진다. 자꾸만 예뻐진다.
다 안아 보고 싶고 뽀뽀도 해보고 싶고 엉덩이를 토닥거리며 “아이고! 내 새끼!” 하고 싶기도 하고 학교에 갔다 오는 아이에게 “아들아!” 하고 불러보기도 싶다. 어떻게 보면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행복일지도 모른다. 다 내 아들 같고 딸 같으니까 누구에게도 구속당하거나 편애할 수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말이다. 만인의 아빠가 되는 기분이다.
때로는 내 평생 혼자 살면서 능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입양해서라도 키워봤으면 하고 바라고 있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다만 지나가는 과정일 뿐일 것이다.
어느 분의 말씀이 떠오른다. 나를 보면 항상 말씀하셨다. “정 시인! 정 시인은 결혼 안 해요.” 나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결혼요, 능력도 없는 놈이 무슨 결혼을 해요. 요즘 여자들 남자가 능력 없으면 애 낳고도 혼자 집 나가고 그러면 어떻게 혼자 애 키우면서 살겠어요. 저는 그런 것이 싫어서 반드시 결혼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혼자 살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시인 잘 생각했어. 능력 없으면 결혼하지 말아야지 눈만 뜨면 돈 가지고 싸우고 애 기저귓값 분유값이 없어서 사네! 못 사네! 하고 차라리 안 하는 게 좋아.” 늘 우리 둘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공감을 나누었다.
하기야 성경에도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스스로 된 고자도 있고 타고난 고자도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 언젠가 친구를 만나서 농담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너는 네 마누라가 언제 제일 예쁘게 보이데.” 그랬더니 팔불출인지 애처가라서 그러는 것인지 입이 귀에 걸려서 하는 말이 “응 아침에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요강에 앉아서 헝클어진 머리를 박박 긁으며 볼일 보고 있을 때.” 히죽히죽 웃는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아내가 가장 예쁠 때가 아내가 막 샤워를 끝나고 촉촉한 머리 매만지면서 나올 때라고 한다.
나이는 못 속인다고 이제 사십 대를 넘어가면서 아이들이 좋아진다. 길을 가다가도 아이들이 놀고 있으면 모든 씨름을 잊은 채 멍하니 서서 “이놈아 나도 그랬다.” 중얼거리며 나 같은 아이들이기에 아주 예쁘고 좋기만 하다. 어차피 미혼인데 다 내 자식처럼 생각하고 품을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어디 있으랴! 마음이 다 시원하다.
삶 그리고 그 구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르지만, 잠시 마음을 이렇게 주차해 놓고 씨름에 젖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내가 살아오면서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내가 워낙 첫 사랑이 깊어 더구나 순정파라서 내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여자 경험이 낙후되고 보니 웃는 말로 천연기념물이 되고 말았는데 이것이 단점이 되었다.
늘 여자에 대해서는 초보적이니 여자의 마음을 읽을 줄도 모르고 알아주지도 못하고 그저 목석처럼 가만히 있는 게 전부가 되었다.
아! 물론 상대편에서 게시해오는 경우도 없다. 차라리 그러면 따라가기라도 하지. 그래서 지금도 혼자 터벅터벅 무덤덤하게 다닌다. 꼭 말을 해야 알고 꼭 직설적으로 꼬집어주어야 안다. 정말 맹탕이다.
그런데 정말 내 평생에 잊지 못할 이름이다. 한 송이, 포도 한 송이, 눈꽃송이, 꽃송이, 송이, 송이, 송이버섯, 한 송이 꽃 한 송이에 비닐봉지를 살포시 씌워놓으면 내일 아침이면 고무풍선처럼 틀림없이 탱탱하게 부풀어 올라있을 거야 바보 같은 생각에 글을 썼다. 그 작품이 당시 아람 문학 신인문학상 공모에서 당선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토라진 사람을 보면 반송이라고 부른다. 왜 꽃이 활짝 한 송이 다 피어야 하는데 토라져서는 태양을 다시는 보지 않을 듯 고개를 살짝 돌려버리니 이게 반 송이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아무튼, 그해 2006년 아람 문학 가을 호와 낙동강 문학 창간호에 당선되었는데 얼마 후 시향의 바다 정모가 대전에서 있어 나갔더니 바 우 돌님이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시더니 “아! 시인이 이렇게 생겼구나!” 하시는데 얼마나 황당하던지. 오히려 제 얼굴이 빨갛게 홍당무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느 분은 “정시인! 이제부터 자네 사모님하고 부부싸움 할 때 아주 시적으로 때우시게나.” 하시는데 얼마나 또 민망하던지 혼났다. 하지만 없는 마누라도 막 생기고 아무튼, 좋긴 좋았다.
영주에 오기 전 어느 날 이웃 아주머니한테 전화를 걸어 김치 버무리는 법을 알려달라고 전화통화를 하다가 소금을 많이 넣었느니 아니니 짜겠다는 둥 그래도 괜찮다는 둥 김치는 짜야 제맛이 난다느니 하다가 시비가 붙었는데 내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자 이런 말을 했다. “흥! 남자가 여자 이겨서 뭐 할래!” 나는 멈칫했고 생각에 빠졌다. 어라! 이게 아닌데 여자와 싸워서 이겼다고 누가 상 받을 일도 아니고 참 잘했다고 칭찬받을 일도 아니고 참 남자다운 짓을 했다고 소문날 일도 아니고 그저 도끼로 내 발 등 상을 찍은 듯 마음만 왜 그렇게 아프던지. 그리고 얼마나 후회만 했던지 정말 말로는 못 당하는 게 여자인가 싶은 것을 피부로 실감했다. 오히려 나 자신이 짜증스럽고 원망스럽기까지 했는데 아니 웬걸 요즘은 여자도 만나기 나름이고 보기 나름이라고 하더니 이제 산소 같은 여자를 만났다.
가수 김 명성 씨의 신비로운 사랑이 이런 것인지 정말 놀랍기도 하고 감탄이 절로 새어나온다. 이건 사랑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라 여자가 신비스러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말이지 이 산소는 냄새도 안 나고 잡고 싶어도 잡을 수도 없고 모양도 없으니 오직 그 향기로만 바라보아야 하니 때로는 가슴앓이 하듯 아파한다.
산소 같은 여자이기에 듣기만 해도 5월의 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 가는 듯하면서도 단꿈에서 이제 막 깨어난 듯 신선한 감촉에 산뜻한 질감으로 아침 햇살처럼 싱그럽기만 하다.
가녀린 두 어깨에 윤택한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발이 땅에 닿을 듯 말 듯 구름 위를 사뿐사뿐 뛰어가는 선녀 같은 얼굴에는 미묘하게 흘러내리는 가는 미소를 엿보이며 한없이 푸른 풀밭을 힘껏 달려가면서 긴 양팔을 활짝 벌려 수풀을 헤치고 산으로 가는 배처럼 소녀의 모습으로 달려가는데 과연 이것이 칼피스향(칼 조각 형)인가? 여자의 신비인가? 풀잎에 닿은 여자의 손은 부드럽게 풀잎을 투영해갔다. 그 어느 손가락 하나 전혀 베이지 않고 말이다. 참 시인의 고뇌가 커진다. 역시 나는 여자를 이기지 못하는 성정을 가지고 있는가 보다. 하지만 또 이런 내 모습도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내 친구가 얼마나 학교 다니는 것이 싫었는지 자신의 가방에 대문짝만하게 고생 보 따 이라고 써서 다녔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 소지품 검사하느라고 가방 안을 살피시다가 불현듯 대문짝만 하게 쓰인 고생 보 따이를 보셨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는지 “야! 홍길동 이게 뭐야 쓸려면 제대로 쓰던가? 고생 보 따 이가 뭐야. 너 그렇게 학교 다니기 싫어.” 친구는 눈물이 쏙 빠지도록 변선이 선생님께 혼이 나고 있는데 나는 옆에서 철모르고 피는 코스모스처럼 활짝 피어 있었다.
아무튼,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도 사람이지만 또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 사람이다.
산다는 것은 한 번 살아봄 직한 경이로운 신의 경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