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리이다 여화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신의 문학, 신의 문법 12 시편 5장 1절: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시인의 간절한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되 나의 마음을 알아 주십시오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정말 간이 다 절이도록 마음과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기도하고 있는 시인의 고독한 마음이 가슴으로 깊이 와 닿는다. 자, 이 구절에서 우리가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바로 조사 에의차이점이다. 아래 예문을 보자
1, 대지에 정기가 한곳에 모여, 하늘과 땅에 신비함을 지니고, 2. 대지의 정기가 한곳에 모여, 하늘과 땅의 신비함을 지니고, 관형어 구실을 하며, 뒤 체언이 나타내는 대상이 앞 체언에 소유되거나 소속됨을 나타내는 조사 '의'가 오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대지의 정기', '하늘과 땅의 신비'로 표현함이 좋을 듯합니다. '-에'는 부사격 조사로 공간적 시간적 위치를 나타내거나, 행동이 나아가는 곳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면,
1. 나는 학교에 있다. (장소) 2. 나는 8시에 일어난다. (시간) 3. 나는 꽃에 물을 준다. (꽃"의" 물이라고 해버리면 꽃이 물을 소유하고있다는 뜻이 되어버려서, "에"를 써야 합니다.)
'-의'는 체언이나 용언의 명사형에 붙어 관형어 구실을 하는 관형격 조사입니다. 소유격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쉽게 말해서, 주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할때 주로 씁니다.
1. 우리의 사랑 2. 나의 즐거움 2절: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좀 더 쉽게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세요, 제가 주께 기도해요, 하고 썼다는 시의 맛은 과연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다. 말하자면 들으소서 하는 말보다는 요즘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어법으로 바꾸어 보자 하는 것이다. 좀 더 혀를 굴리면서 새어나오는 발음에서부터 감칠맛이 더해지기도 하고 억양이 거칠게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고 어떤 문장을 넣느냐 혹은 어느 자리에 어느 문장을 갔다 놓느냐에 따라 많은 영향을 받는 갈래 길이 된다.
3절: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 이 구절에서 살짝 나라는 단어를 빼고 내 하는 표현으로 써보자. 또 어떻게 글맛이 달라지는지 잘 생각해보자.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니 ~ 나와 내의 어감 즉 말에는 사람의 감정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심정이 살짝 토라지듯 감정이 바뀌거나 바뀔 질 수도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어감과 어법이 있는데 어감은 위에서 말했듯이 말하는 사람에 감정이 말에 실린다는 것 즉 글에도 작가의 사상이나 독선이나 아집 그리고 철학 등이 들어가게 되는데 또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참 우리나라 말이 참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말은 어떻게 끝까지 다 들어봐야 안다고 한다.
나는 집으로 갔다. 집으로 나는 갔다. 갔다, 나는 집으로 이 어법 즉 말하는 순서에 따라서 글의 뜻이나 감정이나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글을 쓸 때 단어와 문장의 선택도 중요하지만, 말의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할 부분도 있기에 많은 사람이 이를 놓치고 있는 듯하다.
4절: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이 구절을 함축하면 즉 압축하면 한 마디로 하나님은 악과 함께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또 이렇게도 해보았다. 하나님은 죄악을 싫어하시는 신이시니 악이 주와 함께하지 못하리라. 어찌 보면 뜻은 같지만, 분명 좀 더 시적인 맛을 가미시켜주는 구절이 있고 반대로 시적인 맛을 좀 덜하는 시귀가 있다. 참고로 성경은 지금도 계속하여 개역 번역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많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본다. 아니시니, 아니다, 아니리라. 자꾸 단어와 문장을 접하면서 읽고 또 읽어보면 그 틈새까지도 다 읽혀져서 좀 더 아름답게 구사할 수 있는 신종 시귀와 아울러 새로운 장르의 문학으로 만들어갈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다. 5절: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자 그렇다면 앞에 있는 1절, 2절의 단어를 제하여 전체적으로 시편 5장을 읽어보라 또 글이 어떻게 다라지는 맛을 낼까? 발견했는가? 다 다른 측면을 발견했을 것이다. 어감에서 어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먼저 나는 수필을 읽듯 쭉쭉 수필처럼 빨리 읽을 수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시라는 개념보다는 마치 짧은 여운을 남기는 맛을 구절구절에서 느꼈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탁하고 글의 맥이 끊어지는 듯하더니 어디선가 바람처럼 나타나는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주옥같은 말들을 주르륵 미끄러지듯 전개해 나가고 있다. 6절: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시를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음! 점점 더 아쉬워지는 것은 만약 시편 뿐만아니라 모든 성경에 구절 표시를 없애버리고 문맥을 끊지 않고 쭉쭉 빠지는 대로 읽히는 대로 수필처럼 아니 시를 끊어져 읽지 말고 계속하여 직행하여 읽어간다면 참으로 더 좋은 시에 착착 켕기는 맛에 시학의 묘미가 넘쳐서 더 좋은 문학의 장르를 열어갈 수도 있겠다 하는 소망을 가진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앞으로 신의 문학, 신의 문법은 정말 놀라운 문법으로 발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다분히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좀 시대에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어 발음이 잘 안 되거나 꼬이는 어법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구수하면서도 오늘날 우리의 문학에서 누릴 수 있는 어감과 어법에서 벗어나 많은 글의 매력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새로워질 수도 있는 새 장으로 열어갔으면 좋겠다. 7절: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1절에서 6절과는 달리 매우 어려운 은유를 구사하고 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 이 말에서 뭐가 은유일까?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 이를 다시 말하면 오직 나는 많은 혹은 풍성하게 많은 하나님의 사랑을 힘으로 받아 이렇게 풀어 읽거나 해석할 수 있겠다.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 주의 집 쉽게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다. 그리고 주를 경외함으로 ~ 경외 경외가 무슨 뜻일까를 알아볼 필요성이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경하고 두려워함 그러니까 주를 공경하고 두려워함으로 성전 거룩한 집, 교회라고 보면 문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교회를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 우리가 예배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럼 예배란 또 무엇일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어디까지나 보편적인 가치상에서의 이해이고 신학적 이해의 가치에서는 많이 복잡해지므로 자세한 것은 다음에 말하기로 하고 일단 그냥 넘어가겠다.
8절: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8절을 읽다 보면 넘실거린다고 할까? 운율이 하나의 결 같다고나 할까? 뭐 그런 형상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시편이든 아니면 국어책이든 단 한 번 읽어보고 그 글에 대하여 비평을 하거나 이렇다저렇다 말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솔직히 그 글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은 작가이며 작가 외의 사람들은 글 속에서 자신의 상상과 지식과 마음의 풍요로움을 따라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없지 싶다. 자 다시 보자 여호와여 어감이 왠지 여호와여 ~~ 늘어지는 느낌보다는 언덕을 숨 가쁘게 오르고 있는 시인의 마음을 엿본다.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 점점 시인의 마음이 격하게 온도가 올라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 간절히 바라는 시인의 기도하는 모습을 연상해본다. 9절: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 이 말을 뒤집어 다시 살펴보면 곧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거짓된 말들이 많다는 것을 꽤 뚫어볼 수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갖추어야 할 통찰력이다. 시인은 글을 쓰기도 하지만 그전에 많은 사람과 만나기도 하고 이야기하며 건성으로 그냥 그때그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서 그 사람의 생활과 모습과 마음과 생각과 더 많은 정보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행동 하나에서 말한 마디에서 투영함으로서 글로 옮겨 가야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때에 살아있는 글이 거침없이 나오는 것이다.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 입에서 나오는 말이 거짓이니 그들의 마음은 자연적으로 무지하게 악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 참 멋있는 은유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목구멍은 열려 있는 무덤이라는 것인데 시인은 왜 살아 있는 그들을 보고 열린 무덤 같다고 했을까? 그야 그들이 악하기 때문일 것이며 은유적으로 그들의 목구멍을 무덤에 비유한 것이다.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 이제 다 나왔다. 시인이 본 것이 무엇이고 어떤 사람들을 만났으며 시인이 왜 그들을 악하고 말하고 있는지 이 시의 모든 의문이 풀린다. 또한, 그 시대적 배경이 참으로 악으로 가득 차고 아첨과 거짓이 난무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0절: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 니이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 정죄란 무엇인가?
Condemn은 '정죄'입니다.
정죄란 판사가 범인에게 너는 죄가 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니 내(판사)가 형을 내린다!.
- 이것이 이 세상 정죄의 뜻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정죄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신학을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매우 아쉽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서 보는, 곧 성경에 나타난 정죄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죄인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생명, 곧 빛을 자기의 자유의지로 스스로 거절하고
하나님을 떠나 사망, 곧 어둠에 거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죄인이 되기로 선택하여 죄인이 되었고, 그 스스로 선택한 어둠 속에서
어두운 사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어둠 속, 사망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이 어둠 속에서 호화롭게, 또는 고생스럽게 사망을 선택하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
이런 상태가 바로 스스로 정죄를 받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직접 그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어 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음 말씀을 보시면 확실해지실 것입니다. 자기 죄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나를 배역함이니 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요. 제 발등 제가 찍는다고 그렇지요? 흔히 똑똑하다는 사람들치고 자신의 덫에 자신이 빠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자만하고 교만하여 다른 사람들의 말은 곧이도 듣지 않고 귀를 막고 저 자신의 말만 역설합니다. 새로운 것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오직 자신 밑으로 사람 없고 위로 사람 없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결국 자신의 그 오만불손함에 빠져 변화하고 새로워지는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아 망하거나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에는 어떻게 된 것인지 죄가 아니라 허물이라고 하네요 죄와 허물을 알아봅시다. 죄’ (sin) ‘허물’ (fault)
성경에서 죄는 씻을 수 없는 인간으로서 숙명적으로 갖고 살아가고 계속 저지를 수밖에 없는 과오를 말하며
허물은 좀 더 가벼운 잘못로써 실수와 결점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거 같네여~! ^^
두 영어 번역의 어감을 이해하시면 좀 더 쉬울 듯.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 이다 이 말은 곧 주를 배척한다는 말인 듯한데 국어사전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1절: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를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잘 보세요.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 주의 보호를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구절 속에서 상반되는 내용이 둘로 갈라져 마치 땅에 비유한다면 지진이 난 듯 하다 싶습니다.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상반되는 의견으로 독자들에게 송치하는 듯하기도 합니다. 글의 균형의 변화가 엇박자를 내면서 글에서 소리가 납니다.
12절: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 은유가 참 멋들어집니다.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다 ~ 참 맛깔스럽고 멋집니다.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지켜주소서.
참고
1. 예배란 무엇인가?
구라파의 기독교는 예배를 리투르기(Liturgie)란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는 헬라어 “레이트루 기아”에서 파생된 것이며, 그 뜻은 성전에서 행하는 예전의 직무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신약시대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레이 투르 기아”의 개념은 그리스 교회에서 성찬의식을 위하여 적용되었던 이래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교회의 인간적인 행위로서의 예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구라파 교회와 신학에서 사용한 “레이 투르 기아”는 기독교의 중심적인 예배 행위로 이해되는 성찬을 뜻하는 것으로서, 유대교의 성전제사와 대비시켜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행하신 섬김의 행위(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사건)로써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배가 인간이 신을 기쁘게 하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봉사적 의미로만 표현되는 것은 문제성을 가지게 된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예배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섬겨 주신 구원의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써 감사와 찬양과 영광 돌림으로 이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서로 만나며, 대면하고, 확인하는 장이 예배의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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