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이 사람아!
海月 정선규
요즘 살기가 싫다. 더는 세상을 알고 싶지도 않고 가고 싶지도 않으며 삶의 끈을 이 자리에서 그대로 놓고 오랫동안 잠을 자고 싶다. 아무리 사람이 서로 부대끼며 산다고는 하지만 약주고 받는 것 하나에 서로 얼굴을 찌푸리고 짜증을 내기도 싫고 말하기도 싫다. 다만 피해 가고만 싶을 뿐이다. 부대낀다는 것이 좋은 일에 행복한 일들로 밀로 당기며 분주하게 밀어가는 초상이라면 오죽이나 좋으련마는 삶은 그렇지 않다. 나도 남한테 듣기 싫은 말을 하는 것이 싫으며 하기도 싫은 사람인데 내 성품과는 달리 그렇게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고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마는 일이 다반사로 생긴다. 어디부터 어긋났을까? 또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더해봐도 잡히지 않을 뿐 그러면 그럴수록 내 인생이 참으로 고달프다. 흐름, 흐름, 분명히 흐름은 있는데 뭔가 잘못됐다. 내가 힘들다. 자꾸만 삶이 싫어지는 증후군으로 가고 있다. 그래서 어느 사람은 오늘도 온종일 술에 취하고 잠에 취해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잔다. 얼마나 힘든 삶의 여정이기에 잊고 싶어 그렇게 말도 못하고 술에 잊고 술에 취해 아무 행동도 생각도 다 그저 잊고 싶은 심정 하나만을 부여잡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이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 나의 하나님! 하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 사람을 저 아픈 사람을 그저 옆에서 보고만 있으면서 같이 침체해가는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어떤 때에는 차라리 내가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잠이 들곤 한다. 여자는 남자의 면류관이면 좋겠거늘 남자의 상처가 될 수밖에 없을까? 좋아하다 사랑하고 결혼하여 행복한 인간의 권리를 누리며 한평생 살아가면 오죽이나 좋겠는가? 어느 해던가? 아는 한성열 전도사님 앞에서 하지 못할 말을 너무 힘들어서 하고 말았다. “전도사님, 차라리 결혼 따로 연애 따로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에 한성열 전도사님은 내 얼굴을 뻔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선규 형제님! 너무 힘든가 보네.”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더 미칠 것만 같았다. 답을 안 나오고 마음은 답답하고 그래서 사람들은 아마 죽겠다고 하는가 보다. 때로는 사도 바울처럼 평생 혼자 살면서 복음을 전하고도 싶었다. 요즘도 그렇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것이 결혼이다. 그냥 홀몸으로 가정이란 울타리를 돌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장다운 가장이 아닌 고개숙인 남자로 살지 않기 위해서라도 평생 동안 부지런히 글만 쓰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 누군가 물었다. “형 어떤 이상형의 여자를 원해.” 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 치마만 두르면 다 좋아.” 막연한 대답을 던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면서 말했다. “남자는 밖으로 나가야 큰다. 절대 내조 없이는 안 된다. 알았지.” 하고 웃었다. 글쎄 내가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무튼, 많은 사람이 결혼과 이혼의 상처를 안은 채 평생 치유받지 못하고 재혼 혹은 독신으로 고스란히 상처를 가슴에 묻고 가족과 헤어져 살아가고 있다. 잊고 싶다고 해서 잊히는 것도 아니고 지워버리고 싶어도 날아가는 것도 아니고 하기에 어떤 사람은 술을 마시고 어떤 사람을 마약을 하고 어떤 사람은 일에 미쳐서 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을 원망하며 살다 죽는다. 꼭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아직 사랑은 해도 결혼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뭐라고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옆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차라리 몸부림이라도 치고 미친 듯이 뛰어다니기도 하고 울기라도 하면 좋겠건만 말은 아낀 채 그렇게 참고 견디며 살아가야하는 그들의 짐이 너무 고단하게 보인다. 사람이 꼭 육체적인 노동을 한다고 해서 고단한 삶이 아니라 마음이 고단한 사람들이 있다. 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맨정신으로 도저히 견디지 못해 마시고 또 마시고 마시면서 시체처럼 지내는 사람을 보고 있으니까 내 아버지가 생각이 나고 내 어머니가 생각난다.
얼마나 고단했을까? 없는 살림에 살아보자고 몸부림치며 얼마나 힘들기에 술에 취해 미친 듯이 날뛰었을까?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절대 술 마시지 않고 아버지, 어머니처럼 살지 않으리라. 씹고 또 씹고 얼마나 씹었던가? 지금 저 사람의 모습도 보기 싫다. 나도 술이나 마실까? 차라리 온종일 잠이나 잘까? 깨워도 깨울 수 없는 잠을 자노라면 이것저것 보기도 듣지도 않고 나무라지도 않고 따지지도 싸우지도 않고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아니야.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 한 사람이 살아남아서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라앉는 배에서 함께 침몰해 죽을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남이 사는 것이고 남이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다. 자신을 추슬러간다. 내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나는 인덕이 없어 한다. 내 평생에 기도가 있다면 “하나님! 나의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게 사람을 붙여 주시옵소서. 조력자를 보내주옵소서.” 내가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며 길을 잃을 때면 괜히 나도 흔들리곤 한다. 동 대전감리교회가 떠오르고 남 대전침례교회의 그리움의 향수가 전해져온다. 마음이 아프고 괴로울 때면 밤이고 낮이고 가리지 않고 지하 기도실에 들어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자도 기도하면서 잤고 일어나도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자신을 치고 또 치고 했었다. 이렇게 지금 내가 살아가는 것도 그때 그 신앙의 기도가 뿌리를 내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자신이 잘 나갈 때는 모른다. 어느 날 삶이 힘들 때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연약한 자의 마음을 가지고 나온다. 누구를 믿느냐는 자유의지의 표현이지만 사람은 누군가를 찾고 의지하지 않으면 못 살게 되어 있다. 그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술, 마약, 도박, 여자, 일인데 미친 듯이 자신이 죽을지 살지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그래서 삶은 폐허가 되어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게 자신이 망가지고 남에게 묻지 마 범죄로 유추되고 있을 뿐 뭔가 이에 따르는 탈출구가 있어야 하는 것을 없는지 아니면 찾지 못하는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렇게 사람은 누군가에 쫓기듯 방황하며 정신이 미쳐가고 부산하게 병든 정신에 의존하여 미쳐야만 살아가는 갈 수 있는 이 세상의 능력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차라리 나는 두 눈을 감고 싶어지는 것이다. 산다는 것에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고난이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어느 날 하나님과 나와 우리 집에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대문을 활짝 열고나오니 어느 새 세상은 아픔에 고통이 사라지고 없어졌더라. 이런 동행의 꿈을 꾼다. 그리고 저 고난의 밖을 엿보게 된다.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안식으로 평안하게 들어갈 그날의 고난 밖의 일을 생각하며 웃는다.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에 나그네 신분으로 왔으니 세상에 소풍온 듯 한 번 살아보고 고난의 밖으로 나가 더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실없이 미쳐가는 듯 하지만 분명 고난에도 그 이유가 있음에는 분명하고도 명백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세상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참 인덕이 없어서 좀 반듯하게 살아가는 사람, 본이 되는 사람, 자연스럽게 교훈이 되어 주는 사람은 없을지라도 끝가지 참고 인내하는 가운데 내 삶은 어딘가 달라지리라. 하늘나라의 그림자 같은 세상은 내가 떠나지 않아도 먼 훗날 낡아지고 불에 태워 없어지리라. 내게 없는 듯하게 또한 내게 있는 것이 있다면 이것이겠다. 죽어도 죽지 않는 것이 있다면 숭고한 사람의 정신이리라. 비록 내 뜻대로 안 되는 세상이지만 내가 있기에 또 하나의 삶이 고난의 밖에서 만날 인구가 늘어난다는 것이 내게 뿌듯하기만 하다. 연약한 것을 강하게 가난한 것을 부유하게 라고 했다. 연약한 것에서 벗어나오는 것이 강해져 있는 것이리니 약한 것을 그대로 드러내면 연단 속에서 강해지리라. 오늘도 하루가 다 가고 있다. 지금 들어가면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니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소망을 담고 있는 내 육체에서 정신을 지그시 내려다보니 내 우주가 보인다. 긍정, 긍정의 힘이 있다면 이 세상은 다 내 밥이 되겠다. 이것이 긍정의 능력이리라. 하늘을 우러러본다. 나의 능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해맑게 웃는다. 해바라기기 꽃으로 민들레 홀씨 무너져 홀로 날아가듯 자꾸만 날아간다. 어떻게 살 때 잘 사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일까? 그럴지라도, 그래도, 그렇더라도, 돌이켜 나그네의 신분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리라. 내 생의 축복인 그 사람을 거쳐서 돌아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