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내가 처음 만난 그 사람을 사랑한 것처럼
첫사랑의 신비감이 나이테처럼 번진다
왜냐하면 하늘과 땅이 생겨난 맨 처음이기 때문이다
아득히 감도 잡히지 않는 지난 세월 속에서 알 수 없는 이름 모를
손님이 찾아오고 있거나 현재 찾아오려고 하는 듯한 그림이 잡힌다
길을 가다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왠지 낯설지도 않고 언젠가 어디에서인가 많이 본 듯
절로 친근감이 우러나는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온다
누구를 길을 가다 만난다는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아직은 알 수는 없지만, 세월이 가고 시간이 흐른 다음
알겠지 하는 마음이 우러난다
하나님을 하늘과 땅이 생겨난 맨 처음부터 알게 되었으니
이 또한 첫사랑이 아닐까 싶다
하늘과 땅이 생겨난 맨 처음부터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그저 매우 반가울 따름이며 소중한 첫 만남의 감동으로
천지창조를 지켜보게 된 첫 감사의 마음이 불길처럼 타오른다
이러는 나를 나도 모르는 하는 감동을 안겨준다
사건은 점점 극대화되어 간다.
2절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아직 땅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어둠만 가득히 깔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이 아득하기만 하고 주인도 없어
천지는 어둠의 광야와 같으면서 아무것도 살 수 없는
황무지와도 같으니 당연히 질서도 생겨나지 못한 채
그저 망망대해를 떠다니듯 어지럽고 아찔한 순간처럼
여겨진다
아직은 채워져야 할 것들이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상태
마치 텅 빈 공간에 무중력 상태로 서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은 물에 계신다
문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하나님의 신은 물을 거닐고 계신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가셨듯이 그렇게
앞으로 천지창조를 구상하시면서 물 위를 서성이시는 모습 같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를 읽을 때만 해도
마음이 답답하고 우울하더니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까지
읽다 보니 하나님과 세상은 별개가 아니라 천지창조와 함께 아름다운 동행의
꿈을 이루고자 하고 있음을 본다
수면을 거닐며 홀로 외롭게 고민하는 창조자 하나님의 모습 속에서
곧바로 어둡고 절망했던 마음에 절망의 상태가 소망으로 전환하는
밝은 영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3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 구절에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생겼는데
신은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빛이 있으라 말씀만으로도
없었던 빛도 다 생겨나는가?
빛을 어디에 숨겨 놓았다 불러오는 것인가?
아니면 말씀만 하시면 빛이 그 자리에서 생성되어
나오는 상태인가?
말하자면 하나님은 이미 천지창조에 소모되는 모든 재료와 천지에
모양과 형태를 만들어 어디 창고 같은 곳에 두었다. 천지창조의 날
기다렸다는 듯이 꺼내놓고 있는 모습이 아니겠는가 하는 마음이다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말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인데
전 세계의 문학사에 이런 표현은 없었고 또 앞으로도 전혀 없을 것이다
4절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행복을 느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내려주신 축복이리라
생각된다
이 구절에서 보자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표현을 약간 변형시켜 보자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
어떤가
어감이 좀 다르게 느껴진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말에는 긴 여운이 깃들어져
말끝이 꼬리를 차고 힘있게 위로 올라가는
형상인 데 비해서
그 빛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는 표현은 말끝이 아주 짧아 단명한다
난데없이 도마뱀 꼬리가 어디론가 끊어져 나간 듯이 밋밋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이상의 여운을 길게
갖지 못하도록 숨을 끊는다
작가가 어떤 단어를 쓰느냐에 따라 읽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질긴 생명력으로 오랫동안 살아남아 긴 여운으로 가려진 부분을
평생토록 생각하는 습관으로 나타내는 길을 제시하면서 절망에서 소망하는
긍정의 힘으로 전환해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처럼 살아 있는 글을 원함으로 써야 한다
알지 못할 장래의 일 같이 기억되어 살아가는 삶의 지표가 되어주고
소망을 생명으로 제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 글을 읽는 이후에 삶 가운데
교훈으로 삶의 양식으로 기억되어 살아나면서 깨닫는 기쁨으로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의 문법을 구사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빛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빛이 보통 예사롭지 않다
바라보시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무엇을 그렇게 마음에 쏙 들어 하셨을까?
어떤 의미를 빛으로 부여하고 계셨을까?
그냥 바라보시며 좋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과 뜻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고 만다
어둠의 때와 빛의 때를 반으로 나누어 놓으신
하나님의 작품성을 생각해보게 된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뉘사
이제 낮과 밤이 달의 주관과 태양의 주관 아래
빛과 어둠의 두 때로 나누어져 드러나는 순간이다
나는 다시 생각해 본다
나누다
나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뉘사
하는 표현에서 뉘앙스가 느껴진다
빛과 어둠이 번개 치듯 반짝하는 순간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면서도 섬세하게
독특하면서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그 어떤
미묘한 힘이 들어가 있어 움직이고 있는 듯한 감이 온다
반면에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는 표현을 썼다 한다면 이것을 틀림없이 달라진다
이것 또한 나뉘사 와는 달리 길게 늘어지면서 켕겨나는
감칠맛이 없이 어감이 금방 끊어지고 만다
다시 말해서 글에 생명이 없다
글을 읽는 사람이 끝까지 가지고 가야 할 몫이 없다
글을 읽고도 신은 왜 그랬을까?
왜 빛과 어둠으로 나누었을까?
하는 부드럽게 미끄러지듯 글을 읽고 알 듯하면서도
모를 듯한 것을 가지고 가야만 기억 속에 오래 글이 여운으로
남아 살아가면서도 모르는 그 무엇을 놓고 자꾸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깨달을 수 있는 날을 만들어가게 해주어야 하는데
딱딱하고 사무적으로 작자가 그 길을 미리 끊어 버리면
독자의 읽은 재미도 빼앗아 가거니와 읽은 후에 기억에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한 예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한 탐스러운 선악과를 생각해 보자
하와 가 넘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아리송한
선악과의 이미지가 아주 탐스럽게 숨어 있었던 것이고
이것을 알고 유혹하기 쉽게 도구로 이용한 것이 뱀이었다
여기에서 뱀의 지혜조차도 탐스러워 보일 정도를 넘고 있다
이것이다 싶으면서도 아리송한 생각에 다시 옆에 것을 바라보며
저것도 같은데 하는 독자의 생각을 불러일으켜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하고
생각의 자유를 만끽하며 표현의 자유를 자연스럽게 누리면서
자신의 생각을 찾아가고 구체화 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누사
나누고
나뉘사
나뉘어
몇 번씩 곱씹으면 감이 잡힌다.
5절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왠지 나는 하나님의 낭만다운 멋이 한껏 살아나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방 안에 내가 홀로 있는데 전등불이 센서에 의해 자동으로
켜졌다 꺼졌다 하는 그림을 그려본다
이게 바로 그림언어이다
그림도 하나의 언어이며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고 감동으로
글로 써내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시인의 글을 보고 감동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도 있다
한 때는 나도 그림을 보고 시를 쓴 적이 있었다
하나도 흐트러뜨리지 않고 하나하나 조각을 맞추듯 조화롭게 이루어내시는
질서 정연하고 또렷한 성격이 바지런하면서 완벽함을 추구하는 완벽주의자처럼
하나님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 올마다 섬세하게 털실 한 묶음으로 목도리를 뜨면서
올겨울 이 목도리를 하면 얼마나 따뜻할까?
행복해질 한 때를 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잘 감당하는 아주 멋진 성품으로 느껴진다
자상하면서도 정리정돈을 잘하고 좋아하는 깐깐한 성품으로도 느낄 수 있다.
말씀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연상하면 곧 말씀이 질서이며
법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다 이루어지는 모습에서 말씀이 씨앗이 되어 잉태되어 나오는
힘을 맛보며 믿음이란 말씀이 내 속에 들어올 때 단비를 맞은 듯 내 영혼에 싹이 터
움직이고 생동하는 참 맛을 느끼게 되는 미묘하면서도 아름다운 관계 동행이 아닐까 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참 이 구절이 신비로우면서도 내 고정관념을 깬다
왜냐하면 나는 아침저녁이라 말함으로써 아침이 먼저 오고
저녁이 나중에 오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하나님은 저녁이 먼저 오고
아침이 오는 것이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창조의 아침은 어둠 가운데 환하게 동트는 아침 새날이 오는 것이리라
우리에게는 하루하루가 모두 삶의 소망이다
소망은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가 가질 수 있으며
또한 가지고 있어야 살 수 있는 긍정의 힘이다
이는 첫째 날이니라
새날이 되었다
세상의 첫날이 되었다
드디어 차근차근 실행하여 여기까지 왔다
고요한 새날의 아침이 우리 앞에 활짝 열린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창조의 아침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내 인생을 어떻게 창조해나갈 것인가?
삶이란 이런 것인가?
감동이 밀려온다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둠을 밤이라 칭하시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상반된 단어를 썼다
빛으로 낮을 삼고
어둠을 밤으로 삼아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 되었다
어떤가?
글이 살아서 움직이면서 안에서 밖으로 나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빛에서 낮이 나오고 어둠에서 밤이 나오고
저녁이 되더니 아침이 밝아와 첫째 날이 되니
벌써 글이 움직여왔어도 100m는 옴 직하다
서로 빛과 낮 어둠과 밤의 상반돼 조화로운 표현에서
어긋나 삐걱거리는 소리가 엇박자로 나는 듯하면서도
너무 잘 어울리는 조화가 맛깔스러우면서도 신비롭다
한가지 사물에서 두 가지 역할과 표현을 하고 있다
이 완적인 표현이라고 할까
생물이 살아 숨 쉬고 먹고 마시면서 기어가든
걸어가든 꿈틀 이든 아무튼 운동력을 가지고 살아가듯
글도 이처럼 생태적으로 살아 운동력을 발휘하고 있다.
6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환상적인 신비로운 제3차원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하면서도
신비로움이 표지등처럼 감미롭게 돌아가는 맛을 느낀다
액면 그대로 물이 있고 그 가운데 궁창이 길처럼
쭉 뻗어 사막 위에 고속도로처럼 난 것인지
아니면 물과 궁창이 한자리에 섞여 있는 상태인지
그것은 알 수 없어도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오늘날에도 분명히 물은 하늘의 구름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궁창에 물이 잠겨 있는 듯한 서정이 그려진다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나누어지게 하는 장면에서는
처마 끝에서 빗물이 방울방울 떨어져나와
흘러가듯 하나의 에서 또 하나의 물을 분해하여 걸러내는 듯한
착각이 환상처럼 펼쳐지면서 벌어지는 물과 물 사이를 생각하게 한다
과연 물의 간격을 생각하게 한다
확실한 것은 모르겠으나 지금의 땅과 하늘 사이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머물러 본다
홍해가 바다가 갈라질 때 양쪽으로 물이 갈라져 벽을 이루었던
출애굽 당시의 모습을 연상하게도 된다
물이 갈라질 때 즉 나누어질 때 양쪽에서 잡아당겨 팽배한
먼지 털어내는 이불과 같은 형상이었을까?
아니면 컵에 담긴 물을 다른 컵으로 쏟아부어 담는 모습과
흡사했을까?
연상하면서 어쩌면 물의 성분을 그렇게도 알맞게 만들어 놓으셨을까
하는 놀라움과 감동한다
나는 긴장을 놓을 수가 없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에서 한번 긴장을 하고 만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모습이 전해져오기
때문이다
신선한 충격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약과인가 보다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마음을 정하시고
한 컵에 담긴 물을 다른 컵에 반반씩 적당하게 쏟아붓는 것 같은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기발하면서도 과연 물이 어떻게 갈라질까?
서로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까?
하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긴장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긍정의 힘이 느껴진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에서
긍정적인 신의 마음이 강하게 타오른다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에서
마음에 강하게 결단하여 작정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긍정적으로 보고 생각하여 결단하는 긍정의 마음은 곧 그대로 되는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눈여겨볼 것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는데 라고
표현했다면 글의 들어가는 긍정의 힘의 능력은 어떠했을까?
반으로 줄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는 말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는데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고
살짝 단어를 바꾸어 보면 벌써 글의 힘에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위에 있어 잔뜩 힘이 들어갔다
긍정의 신호이면서 자신감에 차 있다
어떻게 본다면 긴장이 주어졌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의 경우와 같이 표현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질까?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는 데에서
벌써 긴장이 느슨하게 풀리면서 늘어지고 만다
글에서 힘이 빠져나오면서 확신과 자신감이 사라지고 그만큼
긴장이 없어 하는 둥 마는 둥 하는 느낌이 흐리멍덩하게 읽는 사람의
마음에 자리 잡는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듯하면서도 읽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들리느냐
약하게 들리느냐에 따라 마음의 향방이 정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소망을 바라는 마음의 상태이리라 보인다
이뿐인가? 아니다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확신에 찬 말끝은 개구리처럼 펄쩍 높이 뛰어오르는 말의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읽는 사람들에게 긍정의 효과를 발휘하여 현실에서 박차고 오르는
소망을 제기하고 있다.
7절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에서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물이 한곳에 모여 있다. 칼로 물 베듯 소리 없이 갈라져 결 좋은 나무처럼
나누어지는 장면을 연상하면서 아래위로 착상하는 모습이
자궁 안에 한 생명이 착상하여 자리 잡듯 꽉 들어차는 듯이 알차다 싶다
그리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제자리가 있어
자신의 역할과 삶에 온 힘을 다하는 아름다움이 배어 있음이 엿보인다
궁창 아래 즉 하늘 아래를 말하는데 지구는 둥글어도 단면도처럼
반으로 쪼개어져 활처럼 휘어 보이는 하늘은 활처럼 휘어 우리의 발아래
또 다른 반쪽이 존재한다는 설렘과 그리움을 가지게 된다
볼 수 있는 세상과 볼 수 없는 세상이 둥글둥글 푸른 빛을 지닌 채 생명을 잉태하고 돌아가는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주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생각하는 멋이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궁창을 만드시고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에서
또 한 번 느끼는 것은 나누게 와는 달리 나뉘게 함으로써 수동이 아닌 자동으로 받아들여진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물이 나누어지는 것이 아주 부드럽게 그것도 천천히 자동으로 나누어진 듯한 맛이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했다면
어떨까?
누군가가 손수 나누어지게 어떤 물리적인 방법 즉 수동에 의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누어지지 않으면 안 되게 힘을 행사함으로써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미지가 강하게 생깁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대로 되니라 수동이 아닌 자동 모든 사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고 순종하는 쪽으로 움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강조 한다
나누게
나뉘게
두 단어의 어감과 이미지는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나누게 하는 단어에서 풍기는 맛은 강제성이 있어 보이는 수동이 존재하고 있으며
나뉘게 하는 단어에서 풍기는 맛은 자동 즉 알아서 순종하듯 아주 부드럽게 움직이는
이미지가 강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이 구절에서 느끼는 첫 느낌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막힘이 없이 만사형통이라는
말이 있듯 술 술 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틈바귀)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하고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했다
칭하시니라까지 쭉 잘 나가다가 잠깐 끊겼다. 부활하듯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고 이어진다
이것으로 보아 신은 잠시 어떤 시간을 가졌을 것 같기도 하고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고 보니 저녁이 다된 시간적 개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신이 일하시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이 궁창의 이름을 짓는데 투자된 시간이 하루 온 종일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우리의 고정관념이 깨어지는 순간이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우리는 아침저녁이라 말한다
늘 아침이 지난 다음 저녁이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신은 반대로 저녁이 지나야 아침이 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2절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이대로 본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는 달리 신의 말씀처럼 저녁이 먼저 지나야
밝은 내일이 새벽을 지나 아침으로 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둠에서 혹은 어둠을 물리치고 혹은 물리치고 난 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소망의 빛을 보게 된다는 의미로 들린다
그런가 하면 둘째 날이니라 말하고 있는데
둘째 날이다 하는 말과는 어감의 차이가 있어 보인다
날이다 하면 그래. 그렇구나. 나도 알아 하는 식에 당연하다는 투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지만
날이니라 하는 말에는 하루를 누군가 내 코앞에 들이대며 혹은 대놓고 말하는 느낌이 강하다
또한 되니라 하는 표현은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그리움과 설렘이 새어나오면서
흐르는 생동감에 강한 마음이 전해오면서 정확하게 뭔지는 잘 몰라도 꼭 그것이 이루어지고 말 것 같은 생각에 소망이 덤으로 생긴다. 즉 이것이 살아 있는 문법이다
이점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 어떤 단어를 골라 쓰느냐 하는 문제는 생명이 있고 없고를 가늠하는
문법의 흐름에 따라 퇴색되어가는 글이 살아난다. 신의 말씀은 곧 우리가 배워야 할 말 하고 글쓰기 요령이다
9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이 구절에서 엿볼 수 있는 천지창조의 신비를 만끽한다
온 세상은 땅이 없이 온통 물로만 뒤덮여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분별할 수 없는
망망대해 속에 헤매는 듯이 광활한 미지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처럼
매우 신비감으로 푹 싸여 있는 느낌이다
잔잔하게 세상이 물이 바다 덮으면 같이 온 땅이 뒤덮여 있었다면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물의 흐름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바다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물이 바다 덮으면 같이 세상의 온 땅을 덮고 있는 상태라면
물은 더는 움직일 수 있는 즉 흘러갈 수 있는 여백을 가질 수 없는 꽉 조인 상황이 아니었을까
그러니 결국 물은 잔잔하게 바다처럼 고인 상황이 아니었을까
세상 그 자체가 바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이 가능해진다
마치 광활하게 퍼져 있는 물속에 어떤 것들이 살고 있을까
무엇이 들어 있을까
궁금해지는 인상이다
그러면서 잔잔한 물결은 아주 부드러운 비단결 같고 왠지 무한한 그 어떤 알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은 신비감이 흐른다
온몸에 전율이 확산한다
이렇게 조용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신이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했으니
어떻게 보면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처럼 격동하는 세상처럼 보인다
눈 뜨면 새롭게 변하는 세상이라는 말이 새삼 느껴진다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이 구절에서 나는 웅장하게 쏟아지는 파도소리를 듣는다
물이 폭풍처럼 일어나 거대한 몸집으로 세차게 한곳을 향해 달려가는 생동감을 느낀다
파도 소리가 얼마나 쐐애액 했을까?
지금의 파도 소리와 같았을까? 하는 궁금증을 가져본다
물이 움직이는 순간마다 뭍이 드러나는 신비로우면서도 감미로운 상상에 전율이 인다
물이 지나는 길목마다 뭍이 벌거벗은 듯 나타나는 그 모습은 영광의 순간이랄까
내가 올림픽대회에 나가 국가를 대표해 금메달을 따는 순간 그 벅찬 감동의 시간이랄까
성취감이랄까
사람은 만족이 행복이라는 말이 있듯 바라보는 기쁨 속에서 상쾌한 행복으로 젖는다
그대로 되니라
신께 순종하는 물의 온유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본다
물이 물의 뜻대로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따라 그대로 순종하여 드러내는
아름다운 모습이 경이로우면서 한편으로는 물속에 무엇이 있기에 신의 말씀을 알아듣고
순종하는가 하는 생각에 젖는다
그대로 되니라의 어감은 어디에서 대기하고 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신의 말씀에 그대로 되기를 작정하고 나오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신의 말씀은 이렇게 살아서 움직인다
우리에게 생명이 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성찰하고 다녀가는 능력의 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