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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규 시인의 작품읽기

정선규 시인
고장 난 라이트
작성자: 정선규 추천: 0건 조회: 10598 등록일: 2011-03-12
고장 난 라이트

한 날 어느 때인가
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거의 1년을 넘겨서 만난 지라
그가 말했습니다
"야!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다 이렇게 만난다니까"
어쨌거나 우리는 오랜만에 만난 지라
한 잔 기울이기로 하고 생각난 김에 집에 어제 사다 놓은
삼겹살 생각이 나는지라 우선 그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가서
나는 간단하게 술상을 차리면서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내가 술상을 차리는 동안 냉장고에 들어 있는 삼겹살을 꺼내어
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내가 술상을 다 차리고
자리에 앉아서 30분을 기다려도 여전히 냉장고 문을 열고
냉동실에 머리를 디밀어 놓고도 그것도 부족한지 아예 어깨까지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보다 못해 생각다 못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에게 다가서며
물었습니다
"왜 그래. 응"
그는 내 말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번에는 잔뜩 머리를
냉장고에 박고 발버둥치듯 허우적거리는 듯해 보였습니다
나는 생각에 이상하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세상의 별꼴이다 싶은 마음만 커지고 이건 아니다 싶어
얼른 그를 끌어내며
"왜 그래 나와 봐 형!"
말했더니
그는 겨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안 보여 라이트가 고장 났어."
이 말을 들은 나는 도대체 무슨 라이트가 어디에 있다고
냉장고에서 삼겹살 꺼내는데 헛소리까지 하는가 했는데
그가 연이어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시력이 나빠서 냉동실에 있는 삼겹살이 안 보여
가까이 가면 보일까 싶은 마음으로 머리까지 다 디밀었지 뭐야
그래도 안 보이네."
순간 나는 한 대 뒤통수를 얻어 맞는듯했고
잠시 멍하게 서 있다 그제야 웃었습니다 
"그래 눈이 나쁘면 눈이 나쁘다고 말해야지
라이트가 고장이 났다고 하니 나는 무슨 말인가
오해를 했잖아. 미안해 내가 할 게 나와 형"
말하고는 그의 머리를 냉장고에서 천천히 꺼내어 자리에 앉혔고
우리는 소주 한잔에 곁들여진 삼겹살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즐겼습니다
"오늘 오후 내내 냉장고 문을 열어놨으니 전기료 푸짐하게 나오겠다"
그러고 보면 아무리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1년이면 내가 아는 사람은
산전수전 다 겪고 있겠다 하는 생각에 이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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