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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규 시인의 작품읽기

정선규 시인
술을 내렸다
작성자: 정선규 추천: 0건 조회: 4112 등록일: 2022-01-15

술을 내렸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사당에 제를 
올려도 술이 아니면 흠향치 않고 
임금과 신하 벗과 벗 사이에도 
술이 아니면 의리가 두터워지지 않을 것이요 
싸우고 화해하는데 술이 아니면 못할 것이라고 했던가 
술은 깊었다   
질척이며 잘난 체하고  
견딜 수 없이 남을 업신여겼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몸이 상하고  
피가 흘러도 흠뻑 취해서 아픈 줄 모르고  
세상을 느끼지 못했다  
술로 신 내리듯 하고 미친 듯이 거리를 헤집고 
메주 알 고조 알 정신없이 떠들었고 
웃다가 울다가 술은 사람을 먹었다   
울부짖는 짐승처럼 세상을 원망했다  
괴성을 내뿜으며 고막이 찢어지도록 외쳤다   
전봇대에 옷을 걸어 놓고 신을 벗어 놓고 잤다
세상에서 무서운 게 없었다
술기운을 입고 정신은 몽롱하게  
취할수록 희열의 도가니였다 
그 밤에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필름은 끊어졌고 귓전에 잡음만 감돌았다 
어쩌면 술이라는 것은 술 취했다는 그 욕망의 
충족에서 다가오는 쾌락인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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