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낙율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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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학 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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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낙율 |
추천: 0건
조회: 2700 등록일: 2011-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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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학 개론
오 낙 율
가끔,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이들이 있지요.
사랑하는 이가 겪는 고통을 지켜보며, 애써 스스로의 마음에도 생채기를 내고, 마치 그 고통을 함께하는 듯 보이게 하여, 상대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좀 더 확고히 표현해보려는 사랑의 이기주의자들 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순수를 얻으려고 가식도 마다하지 않는 그들을..
또 우리는, 고독을 씹는다, 고독에 몸서리친다, 등의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의 뜻을 살펴보면, 고독이라는 단어가 그리 유쾌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필자는 여기서 고독을 씹는다는 표현대신 ,고독을 즐긴다는 표현으로 바꾸면 어떨까 싶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의식의 어느 모퉁이에, 애틋함이나 그리움, 외로움 등의 감정들을 숨기고 살아가기 마련인데 우리는 삶의 그늘에 가려 그 사실들을 까맣게 잊고 살아가기 일수 이고. 아마, 그 잊고 있는 감정들 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의 핵심이라고 얘기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무미건조한 삶을 살다가 어떤 조건으로 인해, 그 숨겨진 본능이 솟구칠 때면, 왠지 낮 설지 않게 느껴지지요. 그리고 그것이 그리 싫지 않은 감정이라고 느끼면서, 그것을 밖으로 표현 하려하고, 또 누군가에게 공감을 바라기도하고, 때로는 하소연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문에, 그 고독의 유발원인이 이성에 있었다면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이성을 찾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찾은 이성과 함께, 사랑이라는 그늘 아래서 영혼을 빼앗기기도 한답니다. 어찌 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망각의 숨바꼭질 인지도 모를 일이지요. 그러던 어느 날엔가 사랑이 끝나고 나면, 그 예전의 고독했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날 테니 말입니다.
여기까지 피력한 필자의 견해가 약간은 그럴 듯하다고 가정 해 봅시다. 그렇다면 앞서 얘기한 애틋함이나, 그리움, 외로움 등의 형이상학적인 감정들이 진정,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알맹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마음이 애틋할 때 그 애틋함을 유발시키는 조건이 충족되고 나면 애틋함이 사라지고, 못 견디게 그리울 때 그 그리움의 대상을 만나게 되면 그리운 마음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감정들이 내 가슴속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나 상대방에게 존재하는 것이든가 혹, 대상 그 자체가 아닐 런지요. 다시 설명하자면, 내가 외로울 때 홀연히 나타나서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A라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나에게만은 A가 아니라, 외로움 이라는 얘기입니다. 가령, 그렇게도 그립다가 내 앞에 구원자처럼 나타나신 당신이, 애인 또는 부인 이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그를 일러, ‘자기’ 또는 ‘부인’ 이라고 부를게 아니라‘그리움’ 하고 불러줘야 그를 바르게 불러주는 것이 아닌가라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불리어지는 상대방이야말로 진정한 내 마음의 알맹이가 아닌가, 라는 말입니다 또 이런 형이상학적인 단어들은 언제나 숨어 있어야 그 존재를 인정받는 단어들로서, 밖으로 드러나서 그 조건이 충족되면, 즉시 소멸되고 마는, 그래서 더욱 가슴 깊숙이 숨겨 두어야만 정서의 고향을 체험할 수 있는, 값진 단어들임을 잊어서는 안댈 것입니다. 내 곁에 머무는 사랑은 언재나 찰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담 여기서 또, 앞서 서술한 필자의 얘기가 약간은 그럴 듯하다고 가정할 때, 내 가슴 부근에서, 그렇게도 아리고 시리고 저리던 느낌의 실체는 무엇이냐가 의문으로 남겠지요? 필자는 그것을, 집, 또는 껍질의 울림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기하고 보니, 마음이라는 통념적 의미와 상반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그러나 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의 실체를 ‘알맹이와 분리된 껍데기’ 또는, 사랑을 불러들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러브 홀’ 이라고 말하고 싶은 데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나름대로의 집을 짓고 있답니다. 어떤 이는 사랑의집, 어떤 이는 명예의 집, 또 어떤 이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욕망이라는 개념의 유에 포함되지 않은, 비워져 있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의 표현적 양태를 뜻한다고 해 봅니다.
그렇게 사람들은 각자에게 맞는 껍데기 같은 집들을 가슴마다에 지어놓고, 애타게 그 집에 살 주인을 찾아 헤매거나 간절히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마치, 김소월님의 “초혼”에서처럼 말입니다. 내가 아는 K 라는 여인은 그의 마음속에 거대한 공간처럼, 커다란 ‘러브 홀을’ 만들어두고 사셨는가봅니다, 그리하여 어느 멋있는 왕자님을 영원히 거주시키려 했나봅니다. 사랑의 집에 확실한 입주자가 생기면, “셋방 있음” 광고 전단지는 때어야 하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엔 아무도 그 집을, 사랑의 집이라고 불러주지 않는답니다,
효천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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