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電氣) 이야기 소산/문 재학 형광등 한 개가 깜빡거리더니 결국 탈이 나버렸다. 새것으로 교체해도 불이 오지 않았다. 형광등 끼우는 틀이 나무로 되어 있어서인지 약간 검게 그을렸는데, 아무래도 문제가 생긴 것 같았다. 형광등 한 개로 책을 보거나 조금 더 작은 물체를 보려면 돋보기를 사용해도 눈이 침침하여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형광등 전체를 새것으로 교체하고 싶어도 전기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여진다. 전기 업자를 부르고 싶어도 형광등 한 개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하기는 미안하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미련을 부려본다. 6.25동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숙제를 내어 주면 그을음을 내는 등잔불 (나무로 된 등잔걸이에 접시를 약간 기울이게 하고, 그기에 피마자기름을 담고 솜으로 심지를 만들어 불을 붙이면 기름이 있는 한 불이 꺼지지 않음) 아래서 숙제를 했다. 불을 켜기는 해도 어둠을 약간 밝히는 정도로서 바늘에 실을 끼는 것도 어려웠다. 석유를 구하게 된 후 부터는 호롱불(역시 등잔걸이에 사기로 된 호롱에 석유를 담고 솜으로 된 심지를 끼워 불을 붙임)을 켰는데 불꽃이 큰 탓인지 접시 등잔불 보다는 훨씬 밝았다. 등잔불을 벗을 삼아 어머니는 동지섣달 긴긴 밤에 주무시지 않고 자정이 넘도록 물레를 돌려 실을 뽑거나 베를 짜고, 아버지는 새끼를 꼬셨다. 때로는 어린 필자를 불러 가마니를 짜기도 했다. 모든 것이 자급자족 하던 시절이라 눈만 뜨면 쉬는 일 없이 누구나 무슨 일이던 항상 일을 했다. 비록 등잔불이지만 익숙해서 그런지 그때는 별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화학섬유가 없던 시절이라 여름이면 삼베옷. 겨울이면 무명천에 솜을 넣은 핫바지를 입었는데, 천연섬유가 위생적으로는 좋을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빨리 해어지는지 누더기처럼 기워 입어야 했다. 또 물감이 없어 염색을 못하니 잔치 때나 市場 등 사람이 모인 곳은 사람들이 모두 하얗게 보이니 白衣民族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겨울에 추울 때는 목욕시설이 없어 소죽솥에 물을 데워 목욕을 해야 할 정도로 목욕을 자주 않으니 이(기생해충)는 얼마나 생기는지 밤이면 옷의 솔기에 하얗게 슬어놓은 서캐(이의 알)를 호롱불에 갖다 대면 서캐 터지는 소리가 타닥타닥 속 시원하게 태우기도 했다.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 이웃집에 갈 때는 등불(사각형 나무틀에 문종이를 사방에 붙이고 가운데 호롱불을 넣음)을 들고 가다보면 비탈길에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한 것도 부지기수였다. 잘사는 집에서 사용하는 남포등(남포에 켠 불)은 유리로 되어있고, 심지가 굵어 얼마나 밝은지 그것은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50년대 후반 중학교시절 겨울방학 때 부모님을 졸라 대구시에 계시는 사촌 형님 집(봉덕동)에서 삼덕동으로 학원을 한 달 다닌 적이 있었다. 밤에 대구역 앞 깡통시장(지금의 교동시장인데 그 당시 美製品이 많이 거래되는 곳이라 그렇게 부른 것 같음)에 한번 가본 적이 있는데, 전기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켜놓으니 호롱불에 익숙한 눈이라 처음 보는 별천지. 천국에 온 것처럼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그야말로 상품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고, 상인들 표정도 밝아 보였다. 구경 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헤맨 적이 있었다. 이곳의 상인이나 물건을 사려오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싼 전자제품을 사려 교동시장을 찾기는 하지만 이제는 슬럼가라 생각할 정도로 초라하게 변해 버렸다. 60년대 초중반 서울에 遊學시절 기차로 서울을 다녔다. 대구 달성공원 부근에 오촌 숙모님 댁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대구역(동대구역은 없었음)에 도착하여 밤 11시 18분 중급행 열차를 타면 서울역에 아침 6시경에 도착했다. (중급행 열차는 자석제가 아니라서 승차는 그야말로 전쟁 이였다. 운이 좋으면 대전서 내리는 손님 자리에 앉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밤새도록 덜커덩거리며 뜬눈으로 서울역에 내리면 눈은 십리나 들어가고 초라한 몰골에 피로를 한 아름 안고 내려야만 했다.) 고속도로는 이야기조차 없던 시절이라 버스도 없고 기차만이 유일한 서울 가는 교통수단 이였다.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낮에 다니는 특급열차 “재건호”(새마을호 전신) 탈 수 있었지만, 돈 없는 필자에게는 아예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또 낮에 다니는 서민들의 생업열차 완행이 있긴 하지만, 역마다 쉬어가고 많은 사람이 타고내리면서 서울까지 12시간을 교통지옥 속에 보내야 했기에 완행열차도 타려고 하지 않았다. 서울 영등포 노랑진에서 한강철교를 지나면 한강의 수면위로 쏟아지는 서울의 야경이 그냥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그 당시 여의도는 수해 상습지로 집 한 채 없는 不毛地였다. 한강의 다리는 차와 사람이 다니는 제1한강교와 기차가 지나는 철교. 단 2개뿐이고, 광나루 앞 강원도로 가는 천호대교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제3한강교는 공사 중이였다.(참고로 강남의 봉은사 절에 가려면 뚝섬유원지에서 나룻배를 타는 것이 유일한 방법 이였다.) 일가친척 하나 없는 서울 바라보는 것만으로 일말의 두려움이 가슴에 일렁이었다. 저 많은 불빛(비록 새벽이지만)속에 내가 쉴 안식처가 없다는 것이 못내 씁쓸하기만 했다. 그 당시 서울인구가 300만 명(통계상 1960년도 인구가 245만 명이였음)정도로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아파트는 이름조차 생소했고 아파트 단지로는 새로 조성하는 반포 아파트이외는 아파트 단지 라고는 어디에도 볼 수 없었다. 60년대 후반기 필자가 공직에서 처음 맡은 업무가 電化事業 이였다. 시골이라 군청소재지에는 전기가 들어와도 오후 8시에 들어오고 밤 10시가 되면 전기가 가버리는데, 그것도 전압이 낮아 형광등 경우는 오후 5시경에 미리 켜두어야 불이 켜질 정도로 전기 사정이 劣惡했다. (참고로 그 당시 TV나 냉장고 등 전자제품은 구경조차 힘들었다. 서울도 잘사는 집이나 일부 다방에 작은 흑백 TV가 가끔 있을 정도였다.) 군청 소재지를 벗어나 5개 마을에 처음으로 시작하는 電化事業, 外線공사는 한전 부담이고 인입선부터 內線공사는 모두 수용가 부담인데, 매월 내야하는 전기요금이 비싸 (지금까지 전기 없어도 잘 살아 왔다고 핑계를 대면서)전기를 넣지 않으려고 하여서 설득 하느라 애를 먹었다. 그래도 공사를 완료하여 전기가 들어오는 날은 客地에 나간 자식들은 물론 일가친척도 찾아오는 등 온 마을이 환호 속에 잔치 분위기였다. 새로운 천지가 전개되니 전기료 걱정은 일시 접어두고 모두 서로 손을 붙들고 이집 저집을 다니면서 좋아 하는 것을 보니 일의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전기를 넣는 집도 전기료 절약을 위해 큰방과 작은방 사이, 또는 방과 부엌사이의 벽에 구멍을 뚫고 壁 가운데 전구를 달아 2곳을 동시에 이용하는 집이 많았다. 그렇게 사용해도 호롱불보다는 몇십 배 밝다고 좋아 했다. 지금 생각하면 失笑를 금치 못하겠지만 그 당시는 그렇게 했다. 벌써 50년이 다되어 가는 옛날얘기다. 필자의 고향 마을은 100여 호나 되는 비교적 큰 마을이고 군청소재지에서 가까워도(5km 떨어짐) 1972년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와 호롱불의 한을 풀었다. 전기가 없으면 어떠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원시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아파트 등 주거생활의 불편은 물론 모든 산업현장이 정지되고, 컴퓨터로 제어되는 교통과 통신. 항만과 항공업무. 은행업무 등등 각 분야에 수작업이 가능한 것이 있더라도 거의 마비될 것이다. 비록 酷暑期 나 酷寒期의 冷煖房 성수기에 전력대란을 막기 위해 정부에서 전기 절약 캠페인을 벌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반가정에서는 모두들 여유롭게 전기를 사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아무튼 전기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 번 깨닫고 더불어 살아가도록 정부시책에도 적극 협조하여야 하겠다. 일본의 원전사고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소 가동 등 최근의 밀양의 철탑설치 등 전기에 관련된 여러 가지 憂慮스러운 일이 일어나기에 전기에 대해서 잠시 회고해 보았다. 2013년 9월 21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