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추나무 설화
민문자
내 어릴 때 연산집 바깥마당 가
커다란 대추나무 고목이 있었네
바람 불고 비 오는 날이면 대추가 떨어져
양재기 들고 대추 주워 담으러 달려갔지
영친왕 약혼녀였던 민갑완의 부친 탄생 설화
두 아름도 넘는 대추 나무
늘 신비롭게 생각하면서 대추를 주웠는데
이제는 사라지고 내 마음에만 살아있지
가난한 선비 집에 첫아기가 태어나자 노승이 찾아왔다
‘이 집에 서기가 서려 찾아왔노라’
집고 있던 지팡이를 마당 가에 꽂아주면서
‘아드님과 함께 정성껏 길러보시오,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아기 태어난 지 삼칠일이 되는 날 마른 지팡이에서 새싹이 돋아났다
잘 자라 대추가 주렁주렁 열리자 이 집에 또 아들이 태어났다지
이들 형제는 인물도 준수하고 영민하게 잘 자랐는데 이 소문을 듣고
어느 날 자식이 없는 서울 일가 한 분이 양자를 구하러 찾아왔다
서울 손님은 호의호식은 물론 출세도 보장한다며 두 아들에게 물었다
‘누가 나를 따라나서겠니?’
두 아들 아무도 줄 수 없다고 적극 반대를 했지만 서울 손님은
거역할 시에는 황후마마께 상소하여 역적으로 몰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귀 공명할 상을 지닌 큰아들이 ‘제가 가겠습니다’
서울 양반의 양자로 간 민갑완의 아버지 이야기였다
민갑완은 영친왕 이은 공과 11살 동갑으로 삼간택을 거쳐 약혼 예물까지 받은 처녀로
이등박문의 악랄한 방해로 예물도 빼앗기며 강제 파혼을 당했다.
아버지 민영돈은 장명진사(將命進士)로 순종황제와 같이 커가며 태사태부(太師太傅)께서
‘하늘 천(天)!’하고 선창을 하면 같이 ‘하늘 천(天)!’ 복창하는 황태자의 글동무가 되셨다.
아버지는 동래부사 영국공사 북경공사까지 한 외교관이었지만 심화로 일찍 사망하고
끊임없이 일본 남작과 결혼을 종용받다 외삼촌 따라 상해로 망명하였다가
해방이 되어서야 조국으로 돌아와 백 년 한(百年 恨)이라는 자서전을 냈다.
민갑완 님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아버지 고향인 우리 동네에서
약 3년간 남동생 가족과 함께 피난 생활을 하다 부산으로 이주하였다.
그 당시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이었고 우리 집은 가까운 집안이었으므로 어머니 심부름으로
한겨울에 콩나물을 가지고 가서 그분께 드린 적이 있다.
‘언니!’라고 부르라는 어머니 말씀에 나이 많은 어른에게 어떻게 언니라고 부르느냐고 하던 생각이 난다. 나의 언 두 손을 호호 불며 녹여주시고 콩나물 가져간 바구니에 ‘찹쌀 모찌'라고 불리던 찹쌀떡과 깨엿을 담아주시며 할아버지께 갖다 드리라고 해서 받아온 추억이 있다.
깨엿이야 자주 먹어 보았지만 ‘찹쌀 모찌’는 그때 처음 본 것이다.
여고 졸업을 앞둔 겨울 어느 날 민갑완 님의 수기 백 년 한(百年 恨) 이 나와서 교문 앞 서점에서 내게는 거금인 금 150원을 주고 사왔다. 동네의 많은 사람이 읽고 이제까지 너덜너덜한 책을 보관 한 것을 먼지를 떨어내고 여기에 소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