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인의 18번째 새 시집《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가 시와 시학 출판사에서 한국의 서정시 088번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조촐한 출간기념 시낭송과 더불어 신작소시집을 발표한 김정화 시인과 조경진 시인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에 이어 회원들의 시낭송이 이어졌습니다.
임보 시인의 <오빠가 되고 싶다>를 민문자 시인이 낭송하고 더불어 참석한 구마루 무지개 회원들의 시낭독은 놀랄만큼 뛰어나 참석자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광화문 비각 앞에서 사람 기다리기
임보
광화문 네거리 교보빌딩 앞, 비각 앞에서 사람을 기다린다.
가세가 기운 집안의 양반처럼 기가 죽은 듯 웅크리고 있는 비각,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의 칭호를 쓰게 됨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유서 깊은 건물이다.
비각의 주위에 세워진 낮은 철제 울타리를 따라
왔다 갔다 하면서 한 사람을 기다린다.
미국 서부에 자리 잡아 살고 있는 교포 여인,
몇 년 만에 모처럼 고국에 나왔는데, 나를 보고 싶다고 전화가 왔다.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묻기에, 교보문고라고 했더니… 바로 오겠다고 했다.
분당에서 광화문까지 오려면 두 시간쯤은 걸릴 텐데… 하면서도,
나는 넓은 서점을 몇 바퀴 돌면서 쓸데없는 책들 뒤적이며 시간을 죽이기로 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북적대고 있는 복잡한 이 서점 어느 코너에서 그녀를 만난다?
서점 한 귀퉁이에 간이카페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 청춘남녀들이 다 자리를 점령하고 소란스럽기 짝이 없다.
차라리 호텔의 커피숍에서 만나잘 걸 그랬구나 하고 후회가 되었다.
답답해서 밖으로 뛰쳐나와 만날 장소를 물색해 다시 알리려 하는데,
내 눈앞에 옛 친구 같은 친근한 집이 한 채 나타났다.
비각이다.
아, 이곳에서 만나 적당한 음식점으로 이동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래서 서점에 들어가지 말고 비각 앞에서 만나자고 문자를 날렸다.
동아일보사 전광판에서 4시를 알리는 문자가 번쩍인다.
두 시간이 지났으니 지금쯤은 도착할 시간이 되었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횡단보도의 시그널이 수도 없이 바뀌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번갈아가면서 도로를 점령하고…
건널목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하던 사람도 자리를 뜨고,
노랑 깃발을 든 안내원 따라 충무공 동상 앞에서 줄을 서 있던
외국인관광객들도 이젠 눈에 띄지 않는다.
광화문 저 쪽으로, 책을 펼치고 있는 세종대왕의 좌상에도 불빛이 들어왔다.
고층건물의 유리창들도 환하게 불을 밝힌다.
레온이 들어오고, 전광판들의 명도가 더욱 선명하게 반짝인다.
아마도 5시는 넘은 것 같다.
공부하러 미국에 건너갔다가 그냥 주저앉았다는 아담한 여성,
아들 하나 기르며 당차게 살고 있는 엄마,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남의 시선 의식하지 않고 껴안기도 한 열정적인 사람,
이미 몇 권의 시집도 내고, 소설도 쓰고 싶다는 야망을 지닌 문인,
4년 전에 보았는데 그동안 얼마나 변했을까?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고 자동차의 전조등이 켜지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둠에 무너지기 시작한다.
어쩌지?
스마트폰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