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강 스피치와 시낭송 문학의 집‧구로 2014. 3. 10. 월
아들
민문자
오늘은 아들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들!
가만히 불러봅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때로는 야속하기도 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이 예로부터 이 아들을 낳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돌부처 코까지 갈아 먹으며 천지신명께 산천기도를 하기도 하던 시대를 거쳐 이제는 불임부부들이 인공수정, 시험관아기를 생산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로 아기 성별을 미리 알 수 있는 시대에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태아가 세상구경도 못 하고 사라졌을까요.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죄인처럼 기죽어 지내다가 아들 탄생만으로도 세상을 다 얻은 듯 당당해지던 우리 어머니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자자손손 가문을 빛내 줄 집안의 기둥이라 생각하고 좋은 것은 모두 아들을 우선해서 먹이고 입히고 교육했습니다. 오죽하면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취급을 했을까요.
이제는 남녀평등시대가 와서 딸이 더 좋다고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아들도 있고 딸도 있어야 좋지요.
다행히 나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첫딸을 낳았을 때, 아들을 바라시던 시어머님께 큰 죄를 진 듯 공연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둘째를 임신하고부터 ‘또 딸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출산일이 가까워졌을 때 진맥을 잘한다는 한의원에 갔습니다. 한의사 말씀이 49%는 딸이고 51%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아기 낳는 날까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지금도 아들 낳은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세상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개구쟁이 아들에 대한 기대와 욕심이 지나쳐 바른길로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친 간섭을 하게 되더군요. 저는 어려서부터 대단히 공포증이 심했습니다. 아들이 고3일 때 여름입니다. 우수진학반에 뽑혀 밤새워 학교 교실에서 공부한다는데 정말 공부하는지 않는지 걱정이 되어 밤중에 학교에 갔습니다. 적막한 운동장을 거쳐 불빛이 보이는 3층 교실을 찾아 올라갔습니다. 누가 뒷덜미를 낚아채는 듯 섬뜩섬뜩해도 아들이 무엇인지 떨리는 가슴을 꾹 참고 층계와 긴 복도를 거쳐 내 발걸음에 놀라며 걸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진땀이 흐릅니다.
우리 어머니들은 만사 제치고 온갖 고생을 마다치 않고 아들 잘되기를 빌며 최선을 다합니다. 아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디에도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큰 기쁨을 받았기에 아들을 위한 고통은 웬만한 것은 감수하며 수월하게 느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셋째로 낳은 작은아들은 임신도 못 해본 형님에게 양자로 보냈습니다. 32년을 가슴앓이하면서 조카로 바라보며 지내다가 결혼 후에야 아들 며느리에게 터놓고 이야기 한 번 했지요.
본인은 이미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알았다고 합니다. 할머니에게 듣고도 의연하게 아무 내색 없이 형님 내외분께 아들 노릇 잘하는 걸 멀리서 그냥 쓸쓸히 바라봅니다. 그 아들에게는 사랑을 감추고 아끼고 아껴야 했으므로 미안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큰아들에게 자식이 없는 것을 노상 걱정하는 어머님께 효도한다는 그때 그 마음이 이제는 퇴색되었는지 숙모와 조카가 된 현실에 때때로 눈감고 싶어 애써 가슴 달랩니다. 그 애도 이제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중년에 들어섰습니다.
아들은 영원한 우리들의 희망이자 아픈 상처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아들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은발(銀髮) / 허영자
머리 위에
은발(銀髮) 늘어가니
은(銀)의 무게만큼
나
고개를 숙이리
긴 봄날엔 / 허영자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눈물겹기야
어찌 새 잎뿐이랴
창궐하는 역병
죄에서조차
푸른 미나리 내음 난다
긴 봄날엔……
숨어 사는 섧은 정부
난쟁이 오랑캐꽃
외눈 뜨고 쳐다본다
긴 봄날엔……
한강 / 허영자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내 나라 육백 년 은성한 도읍의
맑은 하늘을 싣고 흐르는 강은
한강 뿐이리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북악과 삼각산 푸른 그리매
그 굽힘없이 기상을 담아 흐르는 강은
한강뿐이리
귀 기울이면
흰 옷 입은 사람들의 수런거리는
또 귀 기울이면
먼 내일의 창망한 세월을 노래하는
강물 소리
세상에는
수많은 강이 있지만
진정 사랑하올손 어머님의 젖줄
구비구비 우리가슴 한 가운데를 적시며 흐르는 강은
한강 뿐일리
무지개를 사랑한 걸 /허영자
무지개를 사랑한 걸
후회하지 말자
풀잎에 맺힌 이슬
땅바닥을 기는 개미
그런 미물을 사랑한 걸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그 덧없음
그 사소함
그 하잘 것 없음이
그때 사랑하던 때에
순금보다 값지고
영원보다 길었던 걸 새겨두자
눈멀었던 그 시간
이 세상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며 어여쁨이었던 걸
길이길이 마음에 새겨두자.
허영자 시인의 약력
1938 경남 함양 출생
1961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63 숙명여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2 박목월 선생 추천 『현대문학』으로 등단
1963 청미동인회(靑眉同人會) 회원 ~현재
1972~2003 성신여대 국문과 교수
1982 인하대 교환교수
1992 프랑스 르아브르대 파견교수
2008 현재 성신여대 명예교수
시집 : 『가슴엔듯 눈엔듯』 『친전(親展)』 『어여쁨이야 어찌 꽃뿐이랴』
『빈 들판을 걸어가며』 『조용한 슬픔』 『기타를 치는 집시의 노래』
『목마른 꿈으로써』 『은의 무게만큼』
시조집 『소멸의 기쁨』
기타 『허영자 전시집』 『허영자 선수필집』
수상 한국시협상, 월탄문학상, 펜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