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강 스피치와 시낭송 문학의 집‧구로 2013. 9. 2. 월
◆ 스피치의 실제 훈련
◆ 3분스피치
독학으로 성공한 인물
오늘은 「독학으로 성공한 인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선시대의 학자였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외롭게 성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불우한 처지였으나 그는 학문으로 입신하려고 뜻을 세우고 노력하여 성인(聖人)으로까지 칭송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항상 깊이 사색하여 매사를 처리하였으며 정해 놓은 선생이 없이 독학을 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몸이 그렇게 수척한데 어제 또 밤을 새우더구나. 학문을 하기는 해야겠지만 그렇게 몸을 상해가면서 공부를 해서야 어떻게 견디니? 쉬엄쉬엄 하려므나."
어머니는 아들의 건강을 걱정하였지만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몸 생각을 하구말구요. 그러나 이 고장에는 훌륭한 선생님도 안 계시고 훌륭한 선생님을 찾아가 사사할 형편도 못되니 선생님을 모시고 공부하는 사람들보다 저는 몇 배를 더 해야 합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공부하는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셔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고 보니, 학문은 일취월장이 되어서 그의 나이 28세 때 진사가 되었고 33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문과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의 관직은 차츰 높아갔으나 퇴계는 원래 높은 관직이나 영달보다는 학문을 이룩함에 뜻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에게 여러 차례 간청을 하였습니다.
"소신의 뜻은 학문에 있사오니 고향으로 물러가서 학문을 닦게 하여 주십시오."
임금은 그의 간청이 간절하였으므로 할 수없이 관직을 그만두게 하였습니다.
퇴계는 안동으로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밤낮으로 주자(주子)에 대한 학문만을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임금이 다시 불러 조정에 나아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에 학자들을 양성하는 서원을 짓게 하였으니 이로부터 세상에 서원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가 학문에만 진력을 하니 그를 사모하는 제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가 70세의 나이로 운명하자 임금 선조는 영의정의 벼슬을 주었고 그의 제자들은 도산서원(도산서원)을 만들어서 스승인 퇴계를 길이 모셨습니다.
퇴계가 열악한 환경에서도 위대한 인물이 된 것은 뜻을 세우고 그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독학으로 학문에 정진한 결과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모든 성공자들이 다 그랬던 것처럼 뜻을 세우고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독학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가 있습니다.
아니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문연구는 독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스스로 열심히 공부합시다.
오늘은 「독학으로 성공한 인물」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 시낭송
◉ 윤동주 시집 소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이>
(2004년 백두산 여행 중 연변 용정 대성중학교 교정의 윤동주시비 방문기념)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가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 어머니 / 윤동주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어 주시오.
이 밤이 자꾸 설워지나이다.
이 아이는 턱에 수염자리 잡히도록
무엇을 먹고 자랐나이까?
오늘도 흰 주먹이
입에 그대로 물려 있나이다.
어머니!
부서진 납인형도 싫어진 지
벌써 오랩니다.
철비가 후누주군이 내리는 이 밤을
주먹이나 빨면서 새우리까?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울 달래어 주시오 (1938.5.28)
◉ 자화상 /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가만이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1939.9)
◉ 코스모스 / 윤동주
청초한 코스모스는
오직 하나인 나의 아가씨
달빛이 싸늘히 추운 밤이면
옛 소녀가 못 견디게 그리워
코스모스 핀 정원으로 찾아간다
코스모스는
귀뚜리 울음에도 수줍어지고
코스모스 앞에선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 지나니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 (1938.5.28)
◉ 또 다른 고향 / 윤동주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白骨)이 따라와 한 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 온다
어둠 속에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 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魂)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1941. 9.)
◉ 윤동주 시인의 일대기 및 업적
1) 윤동주의 생애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당시 북간도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파평으로 간도 이주민 3세였습니다. 19세기 말,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에 기근이 심해지자 조선 사람들은 국경을 넘어 간도와 연해주 등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으며, 윤동주의 증조부인 윤재옥도 집안을 이끌고 1886년경 함경도에서 만주로 이주하였습니다. 아버지 윤영석은 1910년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촌에 정착하게 됩니다.
윤동주(1917.12.30~1945.2.16)은 일제 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시인으로서,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출생. 1941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후, 일본 도쿄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1942년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겼으며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하였다는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어, 1943년 7월에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복역중 건강악화로 1945년 2월 16일에 생을 마쳤습니다(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2) 대표작
저서로는 <삶과 죽음>, <초한대>, <가톨릭소년>, <병아리>, <빗자루>, <오줌싸개지도>, <무얼 먹고사나>, <거짓부리>, <달을 쏘다>, <새로운 길>, <서시>,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등이 있습니다.
3) 시의 특징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시에 표현한 민족시입니다.
4) 시대적 배경과 영향
동주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시에 표현한 민족시인으로 일제 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시인입니다. 1990. 8. 15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습니다.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습니다. 연희전문에서의 4년간은 윤동주 나름의 시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습니다. 그것은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고, 거기에 맞서 자신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이었습니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습니다. 때문에 그의 고뇌와 번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희전문의 기숙사를 나와 하숙생활을 시작한 2학년 때부터 동시 쓰기를 아예 그만두었습니다. 1939년 한 해 동안 그가 쓴 시는 6편에 불과했는데, 그나마도 9월에 가서야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 때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을 하는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그는 일제의 강압에 고통을 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그러한 사상은 그의 시 속에 반영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작품은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